4. 그나마 다행인가
2일차.
딱히 입을만한 운동복이 없어
어제 그 복장 그대로
점퍼만 하나 걸치고는 체대 탁구장으로 향했다.
대신 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다음 수업에 임할 생각이었다.
체대 건물 앞에서
보호본능과 또 한 번 마주친다.
날 알아봤는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는 묵묵히 걷는다.
조용한 성격인듯.
뭐라도 말을 한번 걸어볼까?
“일찍 나오셨네요.”
“네에-”
말꼬리를 길게 잡아빼며
수줍은 듯이 대답한다.
이런 여자들만 있다면
겨울학기 수업도 들을만 하군.
탁구장으로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늑대놈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틀 연속 최고 인기녀와 나란히 들어오니
오해를 할 만도 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지만
전차남양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늦게 올 생각인듯.
언제 어디서 나타나
하이킥을 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출석을 부른다.
“박지성.”
“......”
“이영표.”
“......”
“전지현.”
“......”
“전차남.”
“......”
수업참가멤버는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전지현도 전차남도
오늘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은 두시간만 연습하고 나머지 시간은 직접 한번 쳐봐. 조교, 그럼 수고.”
굉장히 편하게 수업하시는 분이군.
하긴 뭐,
이 많은 애들을 일일이 개인지도 할 순 없잖아?
간단한 몸풀기 운동을 하고
라켓을 챙겨오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다들 우르르 뛰어간다.
유리한 위치선정을 위한 치열한 접전.
멍청한 놈들.
정작 보호본능은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그러니 니들이 애인이 없는거야.
뭐, 나도 할말은 아니다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녀의 옆자리도, 뒷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경쟁이 굉장히 치열한 관계로.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하나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앞으로 삼사일 찝적댄다고 해서
잘될 것 같지도 않고..
이런 쓰잘데기없는 일에
승부욕을 불태우고 싶지도 않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조별로 연습하겠습니다. 어제 연습한 조대로 모여주세요.”
“......”
그녀의 동서남북에 서 있던 늑대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거 참,
굳이 노력을 안 해도
잘 풀리는 놈은 잘 풀리는구나.
조가 모인 후에는
잽싸게 그녀의 뒷자리를 차지한다.
남녀관계라는게 원래가
타이밍싸움인 법이거든.
어제 했던 연습들을 복습하고
오늘은 스매시 연습을 하게 되었다.
이것까지 끝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실전이라 이거지?
배울 것들이야 무궁무진하겠으나
고작 일주일짜리 수업에서
그런 것들을 가르쳐줄 필요도,
또 배워서 써먹을 데도 없다.
보호본능은 극악의 운동신경을 보여준다.
하기야 받아넘기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스매시를 제대로 구사할 리가 없다.
헛스윙이거나 홈런이거나 둘 중 하나.
내 차례가 막 돌아오는데..
철커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전차남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온다.
역시나 어제와 같은
펑퍼짐한 운동복 차림.
진짜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몸에 딱 붙는 옷보다 저런게 더 편한가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늘은 머리를 풀고 왔다는 것.
“어이쿠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할 건 없지만
하필이면 내 차례에 나타나서
보호본능 뒷자리를 차지한건
좀 죄송했으면 좋겠다.
타이밍 한번 죽이는군.
역시 남녀관계는 타이밍싸움... 응?
아니 이건 아니고..
탁구를 쳐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스매시라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무조건 세게만 친다고 강스매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한 것.
나야 전국대회 우승경험도 있으니 뭐..
“그렇게 약하게 치시면 상대편이 역습 들어와요.”
“또 받으면 되죠.”
나의 전국대회 우승경험에 비춰볼 때
강스매시 적중률은 굉장히 희박하다.
차라리 일단 받아넘겨놓고
상대방이 실수할 때까지 계속 넘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우승전략.
비록 강스매시는 아니었다만
어쨌거나 열개 모두 성공적으로 받은 후에
맨 뒤로 가 보니..
전차남이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다시 얼굴을 돌린다.
역시..
보복할 생각인가..
“아주 그냥 잠이 안 오더라니까!”
별안간
탁구장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우렁차게 내뱉는다.
어휴, 깜짝이야.
보호본능이 움찔하더니
뒤로 돌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네에?”
하고 묻는다.
“아, 그쪽한테 한 소리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
그럼 나한테 한 소리군;
내 똥꼬에 불꽃마크를 찍은 것만으로는
분이 덜 풀렸나?
동국이 말대로 독종일지도..
보호본능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슬그머니 다시 앞을 보자
곧이어 전차남이 나를 보고 돌아선다.
“어쩔 거냐구요.”
“네? 뭐가요?”
“잠이 안 오더라니까요?”
“불꽃마크 찍었으니까 쌤쌤이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지금 나는 그녀의 하이킥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다.
“왜 왜요?”
“아니, 몰라서 물어요?”
어제 나한테 죽빵 맞은게 너무 아파서?
아니면 제대로 복수를 못한게 억울해서?
아마 둘 다겠지?
그러게 왜 뛰어들어가지고..
“배가 고파서요.”
“......”
배고파서 못 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구창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
여자애가 아구창이 뭐냐 아구창이;
사실 아픈 것보다는
나한테 한방 먹이지 못해서겠지?
“어쩔 거예요?”
“어째야 되는데요?”
“책임을 져야죠, 책임을.”
“......”
책임을 지라니..
설마 그것 때문에
결혼을 해야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냥 면상 대줄 테니까 하이킥을 날리세욤.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여기 꼼짝말고 있어요. 내 갔다 올테니.”
“......”
설마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봐?
음..
어떻게 알았지?
많이 협박해본 솜*군.
“으라차차차차!”
딱! 후우우우웅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조교의 얼굴을 스친다.
일부러 노리고 쳐도 그렇게는 못 치겠다.
거참,
기합소리도 한번 우렁차군.
“저.. 무조건 세게만 친다고 되는게 아니라..”
“아, 됐어요. 난 몸으로 배우는 체질이니까 잔말말고 넘겨요.”
여리고 앳되어 보이는 조교는
아무 소리 못하고 다시 공을 넘겨준다.
“으라차차차차!”
딱! 후우우우웅
우렁찬 기합소리도,
대기를 가르는 탁구공 소리도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인 것만 같아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냥..
결혼해준다고 할까..
그렇게 서너번을 반복하더니
중반부터는 반대쪽 테이블에 여지없이 꽂힌다.
확실히 운동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직접적인 체험으로 기술을 습득하는군.
“자, 다음 분.”
내 차례인가?
앞으로 나가려는데..
“뭐야, 벌써 끝이야? 열 개 더 해요.”
“뒤엣분 기다리시니까 다음에..”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말한다.
“아, 그냥 몇 개만 더 줘 ??”
“아니.. 다른 사람들도..”
‘저새끼는 내 밥이니까 그냥 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조교는
왜 저렇게 심약한지 원.
고집을 부려도 통하지 않자
조교를 지긋이 쳐다본다.
“몇 학번이에요?”
“네? 아, 저.. 공육학번인데요..”
06학번?
뭐야 그럼 1학년이잖아.
어쩐지 어려 보이더라니..
조교라기보다는 그냥 도우미였군.
“야 임마!”
“아..네 네?”
“누나 공이학번이다. 제발 졸업 좀 하자, 응?”
“아...”
“다음 학기에도 학교에서 누나랑 마주치고 싶어?”
“......”
누나보다는 형이라고 하는게
훨씬 잘 먹힐지도..
어린 조교는 나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낸다.
뭐, 내가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건
그쪽도 잘 알텐데..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 주세요.
조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공을 준비한다.
학번이 높다고는 해도 같은 과가 아닌 이상
반말을 들을 이유가 없을 텐데..
아마도 체대생들만의 규칙이 있는듯.
하긴 뭐
이 여자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런게 없다손 치더라도
자기보다 어린 학생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전차남은 끝끝내 열 개의 공을 더 치고는
흡족하다는 듯이 맨 뒤로 간다.
열 개 모두 성공.
내 차례가 되었다.
애초에 세게 칠 생각도 없는데다
먼저 그녀의 강스매시를 보고 주눅이 들어
공을 받는 족족 흐물흐물 넘어간다.
조교가 실실 웃는다.
“운동 좀 하셔야겠어요..”
“......”
이새끼가..
형아는 공공학번인데..
저 누나처럼 막 나가주랴?
어쨌거나 열 개 모두 성공하고
뒤로 가서 서자
전차남은 어김없이 뒤로 돌아선다.
“흐음..”
“......”
팔짱을 낀 채
눈으로 위아래를 훑더니..
“몇 학번이에요?”
“공공학번인데요.”
“엑?”
“......”
흠칫- 하며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기보다 어리다면 무슨 짓을 하려고..
“뭐야, 오빠잖아.”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혼잣말인 듯하지만 똑똑히 들린다.
자네, 목소리가 너무 우렁차다구.
어쨌든 내가 나이가 많으니
그나마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