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소녀] 1. 겨울학기 Mr.알랑

비상숑 작성일 07.02.09 17: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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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학기







대학교 4학년.


복학을 하고 2년 동안이나


아침 9시부터 선발출장하여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수업을 뛰고,


마음에도 없는 봉사활동까지 해가며


빵꾸난 학점을 나름대로 메꿔 보았으나


졸업학점을 계산해보니 여전히 4학점이나 부족하다.





어쨌거나 의대생도 아닌 주제에


5학년이 될 수는 없으므로


겨울방학 때 개설하는 겨울학기 수업을


신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3학점은 미처 수강하지 못한


필수전공과목으로 선택하고


나머지 1학점이 문제인데..





1학점짜리 수업이란 게 그리 흔하지가 않아서


체육 교양수업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추운 겨울이란 점을 고려해


‘탁구’라는 실내종목을 택하게 되었다.





수업첫날부터 운동복 차림으로


필요한 ‘연장’을 챙겨서 오라는 공지에


뽀대용으로 구입한 아디다스 삼선추리닝 바지를 입긴 했으나..



자금이 딸려 져지까지는 미처 구입하지 못한 관계로


집에서 편하게 입던 미키마우스 후드티를 걸치고 보니


이거 참, 본의아니게 오지게 귀여워졌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긴 하다.





늦은 나이에 이런 차림으로 나간다는 게


조금은 껄끄럽긴 하지만..



어차피 방학인데 뭐 어때?



라는 생각에..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자취방을 나섰다.





고작 일주일짜리 수업이니


내 기나긴 인생에서


단 일주일이나마 귀여워지는 것도


그리 나쁠 건 없지.





이 수업이

 

9시부터 시작되는 아침수업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


수업시작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나섰으므로


이 어색한 꼬락서니를 목격하고


억지로 먹은 아침밥을 토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가는 길에 동네 문구점에 들러


삼천원짜리 싸구려 라켓을 하나 구입하고는


체육대학 건물 안에 있는 실내탁구장으로 향했다.





체대건물 입구에서


안내도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 다음


지하에 있는 탁구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기요.”


“네?”


“혹시 탁구장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자그마한 체구에 똘망스런 눈??


모자가 달린 귀엽고 타이트한 운동복을 차려입고


한 손에는 어설프게 탁구라켓을 움켜쥔 모습이


수많은 남정네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게 생겼다.





“아, 저도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첫날부터 이게 웬 떡이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하야


다음 해에는 청춘사업이 순조롭게 풀릴 징조?





“겨울학기 수업 들으시나 ??”


“네..”


“왜 하필 탁구를..?”


“추울 거 같아서...”





역시나 나와 같은 생각이었군.


겨울이라구, 겨울.





아니, 그런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여자애가 뭐가 아쉬워서


불리할게 뻔한 체육수업을 듣냐는 거지, 내 말은.





뭐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졸업을 하려니 학점이 부족하고,


그게 하필이면 정확히 1학점이어서


울며겨자먹기로 이 수업을 신청했을 터.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영위했다면


졸업학기에는 학점이 남아도는 게 정상인데,


겨울학기를 듣는 걸로 봐선


그쪽도 학교 다닐 때 어지간히 놀았나보군요.





역시 ‘미인은 돌대가리’


라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



그런 옛말이 있었나?





어쨌거나


이 귀여운 아가씨와 함께


탁구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돌아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저저저저저 발정난 눈동자들하고는.





여학생들이 기피하는 체육수업인데다


여자이면서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므로


이 체육대학 실내탁구장에 여자가,


덤으로 귀엽기까지한 여대생이 나타났다는 것은


앞으로 불어닥칠 폭풍을 예감하게 한다.





“모여서 사열로 서 주세요.”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교수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체대생이거나 조교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대충 줄을 맞춰 서다보니


운좋게도 조금 전에 만난 그녀의


바로 옆에 설 수 있었다.



이거 꼭 일부러 그런 것 같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주위에서 쏟아지는 눈초리들이 심상치 않다.


나란히 들어온 데다 둘 다 모자달린 옷을 입고 있으니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뭐, 기분나쁠 건 없다.





눈대중으로 머릿수를 세어 보니


4열로 일고여덟 줄 정도니까


어림잡아 삼십여명.


그녀 말고도


돌대가리 여학생이 둘이나 더 있긴 하지만


딱히 호감을 끌지는 못하는 듯.





아무리 봐도 못난 얼굴들은 아닌데..


옆에 있는 이 여자가 워낙 특출난 탓일까.


주위의 시선은 온통 그녀와 나를 번갈아 훑어낸다.



이거 잘못하면 삼십대 일로 다구리뜨게 될 지도..





줄을 선 채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나타나서는


자기가 교수랜다.


역시 체대라 그런지 교수님도 몸짱.





“일주일 동안 뭘 배우겠다고 온 거냐?”





하루에 세 시간짜리 수업이긴 하지만


일주일만에 뭔가를 배운다는 건 무리이긴 하지.


대부분 학점 못 채운 애들이 왔다는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몸짱교수는 의자에 앉아


출석부를 펼쳐든다.





“박지성.”


“......”


“이영표.”


“......”


“설기현.”


“......”





줄줄이 결장... 아니, 결석이다.


아직 시즌 중이라 그런가.





“전지현.”


“......”





결석자들 중에 여자 이름이 호명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한다.


설마 진짜 전지현은 아니겠지?





“전차남.”


“......”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성별에 따른 차별이 심하군.


전차남군한테도 좀 술렁여주면 어때서.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





“최진이.”





옆에서 들릴듯 말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네에-’하고 손을 들며 대답한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워


안아주고픈 충동이 든다.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목소리.


일시에 늑대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진이인지 진희인지 헷갈릴 법도 하건만


‘진이’가 맞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손에 쥔 라켓 뒷면에


‘최진이’ 라고 이름을 써놓았기 때문.


하는 짓이 어쩜 이리도 깜찍하냐.





조용히 출석만 부르던 교수님이


그녀의 대답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고개를 들어 손을 든 모습을 확인하고는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연약한 척 하지 마라.”


“......”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며


말없이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그러게 씩씩하게 좀 대답하지.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괜히 안쓰럽다.





끝까지 출석을 부르고 보니


열 명 정도는 첫 수업에 나타나지 않은 모양.


일주일짜리,


정확하게 말해 주말을 빼고 5일짜리 수업에서


첫날이라고는 하지만 하루를 빠졌다는 것은


학점관리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5일밖에 안하니까 첫날이지만 수업을 하겠다.


오늘이랑 내일은 기본자세를 연습하고 3일차부터는 시합 위주로 할 거야.“





체대교수님답게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본론.


설마 진짜로 첫날부터 수업을 할 줄이야.


교수님도 힘드실 텐데 첫날은 쉬어도 좋으련만.





“자, 그럼 여기 있는 조교들이 시키는 대로 연습하기 바란다.”





그리고는 그대로 탁구장을 빠져 나간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군.





간단한 몸풀기 및 준비운동을 끝내고 나니


라켓을 가지고 다시 모이란다.


탁구장 구석에 놓아둔 라켓을 집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녀의 옆자리는 벌써 다른 놈이 차지한 뒤.


재빠르기도 하지.





하는 수 없이 뒷줄로 나와


그녀의 뒤에라도 선다.


뭐 꼭 같이 있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여자 근처에 서면 좋잖아.





“지금 4열이니까요, 1열씩 한 조로 해서 따로 연습할게요.


한 조씩 조교따라 이동해 조세요.“





내 자리를 잽싸게 차지했던 녀석이


금세 사색이 되어 인상을 찌푸린다.


지지리 복도 없는 녀석같으니..


옆에만 잠깐 서면 뭐하냐고.





보아하니 아직 군대를 안 다녀왔나 보구나.


인생이란 건 결국 줄 잘 서는 놈이 장땡이지.


그리하여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와 같은 조가 되어


조교 한 명을 줄줄이 따라가게 되었다.





조교를 따라 한쪽 탁구대에 모이자,


이런저런 기본용어들을 설명해 주는데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어차피 라켓으로 쳐서 넘기면 되는 거잖아.


뭘 그리 어렵게 일일이 설명하고 그러시나.


교수님 말대로 고작 일주일 수업하면서


뭘 배우겠냐고.





탁구라면 군대에서도


말년에 지겹도록 쳐 보았다.


뭐 딱히 어렵지는 않더군.


규칙이야 뭐 대충 족구 규칙이랑 비슷하고,


요는 한 번 튀기고 쳐서 넘겨주면 되는 거잖아.





“오늘은 기본자세 연습할게요.”





그리고는 한 시간 이상이나


제자리에 서서 허공에 라켓을 휘둘렀다.


굉장히 재미없는 거구나, 탁구.





열심히 가르쳐보겠다는 성의는 갸륵하다만


이런 식으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할 필요는 없잖아.


다시 말하지만 겨우 일주일짜리 수업이라구.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심을 잊은 채


대충 아무렇게나 휙휙


라켓을 휘둘러댄다.





귀여운 그녀만이


가르쳐준 자세대로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다


그만 지쳐버렸는지


안타깝게도 헥헥거리고 있다.





“실제로 공을 한 번 쳐보도록 할게요. 제가 넘겨드리면 받아넘겨 주세요.


한 사람당 열번씩 치기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에 쌓인 불만을 눈치챈 모양.


어떻게 한번 회유해 보려는 듯


탁구공이 가득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와서


한 줄로 세운다.





실제로 공을 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까보다야 낫긴 하지만


서로 공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조교가 정확한 위치로 넘겨주는 공을


받아넘기면 끝.


세게 치거나 스핀을 먹여도 안되고


그냥 단순히 받아넘기는 연습이다.





한 사람이 열 개씩을 치고는


뒷사람과 교대하는 형식.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바로 뒤에 붙어선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움직인 것뿐.





항상 느긋하고 게을러터진 녀석이


이럴 때는 신기하게도


몸이 잽싸게 반응하더군.





고작 열 번을 치는 것이니


순서는 순식간에 돌아온다.


앞에서는 그녀가 공을 받을 준비를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지만


생각대로 잘 안되는 모양.


번번히 헛스윙을 해댄다.





뭐,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운동을 잘하면


그건 오히려 마이너스.


남성의 분야라 자부하는 운동 면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호본능을 자극하기가 훨씬 쉽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라면


저 여자는 여우겠지만


지금까지 한 시간 이상 지켜본 결과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남자라는 놈들도


그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지리도 운동 못하는 애들만 모였나보군.





하긴,


‘축구’나 ‘농구’같은


열정적인 과목도 있는데


운동신경 좋은 애들이 굳이


‘탁구’ 따위를 신청했을 리가 없지.


대부분은 추운 날씨에 움직이기 귀찮은 애들일 터.





내 차례가 되어


조교가 넘겨주는 공을


한놈도 빠짐없이 받아넘겨주고 돌아서니


다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경계하는 눈빛.


겨우 이 정도를 갖고 그러시나.





나 말년시절에도 탁구공 받아넘기는 솜씨는


중대 내에서 일품이었다구.


받아넘길 줄만 알아서 문제였긴 하지만.





고작 탁구공을 받아넘기는 정도지만


예쁜 여자가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들 멋져 보이고 싶지 않겠어.


물론 그녀는 전혀 관심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차례에 저지른 실수만을


수치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차례가 한 번 더 돌아


어김없이 헛스윙을 해대고 물러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내 차례를 준비하기 위해 나서는데


탁구대 바로 옆의 출입문이 덜커덩,


하고 열린다.





“......”





일순간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 추운 겨울에 어디서 태워먹었는지


화장기도 하나 없는 시커먼 얼굴,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떡진 머리에


펑퍼짐한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등장한다.


아니, 저 생명체가 과연 ‘여자’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의문의 생명체는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더니..





“여기 지금 탁구수업 하는 거 맞죠?”


“..네.”


“그냥 여기서 같이 하면 되나요?”


“네, 뒤로 가서 서시면...”





조교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는


우리 조의 맨 뒤에 가서 선다.





목소리는 여자가 맞군.





자, 여기서 문제.


태권소녀는 과연 어느 쪽일 것인가.





정답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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