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소녀] 5. 자나깨나 입조심 Mr.알랑...

비상숑 작성일 07.02.16 09: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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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나깨나 입조심







내가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을 알자


뭔가 벽에 막힌 듯,


조금 전까지와 같은 기세는 사라진 채


때때로 나를 힐끔거리기만 한다.


그래도 위아래는 구분하는 모양.





“그래도 책임은 져야죠.”


“......”


“어쨌거나 그쪽이 잘못한 거잖아요.”





어쨌든 결혼은 해야된다는 건가..


내가 나이가 많아도 상관없다는..?


아니,


원래 보통은 남자쪽이 나이가 많던가?





“어떻게요?”


“네?”


“어떻게 책임지는데요?”


“으음..”





설마 진짜 결혼하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고작 뺨 한 대 맞고 나서



“나를 때린 건 당신이 처음이야..”



하고 반해버리는 어이없는 드라마가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실 좀 곤란하다.


이 여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도 않을 뿐더러


싸움까지 잘할 것 같다.


이런 여자와 엮이는 건 좀..





“성의를 보이라는 거죠, 성의를.”


“성의요?”


“네.”


“어떻게요?”


“그거야 댁이 알아서 할 일이고..”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조폭의 협박수단이다.


세금을 바치라는 건가.





그 사이에 차례가 한 번 더 돌아온다.


전차남은 이번에도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강스매시를 찔러 넣는다.


공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가기 힘들다.


태권도학과에서 발차기만 가르치는게 아니었군..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도 열개의 공을 받는다.


실수없이 받아내기야 하지만


파워에서 전차남과 심하게 대조되는 듯.


열개를 모두 넘기고 돌아서는데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내 차례가 지나고


다시 전차남 뒤로 가서 서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어요.”


“좋은 생각이라뇨?”


“성의를 보일 기회를 드리죠.”


“어떻게요?”





뭔지는 몰라도 어째 불안하다.


뭘 원할 것인지..


설마 내 순결은 아닐 테고.





“이 수업 끝나면 점심 사요.”


“점심이요?”


“네. 밥 한끼만 사시면 그냥 넘어가 드리죠.”


“......”





‘밥 한번 사주면 더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으마.’



라고 들리는군.





고작 밥 한끼로 전차남의 보복의지를 꺾는다면


더없이 다행이긴 하다만..





“아구창이 아프다면서요.”


“네?”


“아구창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


“아..”





나의 기억력을 굉장히 얕보았군.


자네 말에는 뭔가 모순이 있다구.


앞뒤가 맞질 않잖아.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라는 거죠.”


“무슨 소리예요?”



“아구창이 너무 아파서 저는 보나마나 밥을 남기겠죠.


근데 그게 내 돈으로 사먹는 밥이면 얼마나 아깝고 억울하겠어요.


그러니까 공짜로 얻어먹는 거면 안 아까울 거 아니에요?“





상당히 억지스럽군;


어차피 남길 생각이면


도대체 왜 얻어먹는 거냐고.





“오케이?”


“흠..”





고작 밥 한끼 정도라면


나로서도 나쁠 건 없다만..


이거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잖아.





그보다..


도대체 내가 왜 성의를 보여야 되는 거냐고;


나는 그냥 내 차례에 라켓을 휘두른 것뿐이고


니가 멋대로 뛰어든 거였잖아.





“저도 많이 봐준 거예요.”


“뭘..”


“보통은 그 정도로 안 끝나거든요.”


“......”





하이킥 안 날린건 고맙긴 하다만..


아니, 그게 아니지.


내가 고마워할 문제가 아니잖아.


난 잘못이 없다고.





게다가 나는


수업끝나면 집에 가서 옷도 갈아입어야 되고..


점심은 동국이랑 먹기로 했는데..


어제 동국이의 태도로 봤을 때


전차남이랑 같이 밥을 먹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이 수업 끝나고 밥 사시는 겁니다?”


“오 오늘은.. 머리 풀고 오셨네요.”





은근슬쩍 딴 소리를 한다.


여자들은 아마도


자신의 바뀐 스타일에 관심을 가져주면


굉장히 좋아한다지?





내가 흔히 쓰는 수법.


우리 과 여자애들한테 이런 방법을 쓰면


십중팔구는..





“아.. 이거? 내가 어제 명동 갔다가 어쩌구저쩌구..


그래서 미용실 언니가 이러쿵저러쿵..


이게 누구누구 스타일인데 조잘조잘..


자그마치 오만원을 줬던가 십만원을 줬던가 궁시렁궁시렁..“





..과 비슷한 반응이 나오면서


끝도 없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의 대화는 말끔히 잊게 된다.





“오랜만에 머리를 감았거든요.”


“..그렇군요.”





보통 여자가 아니군;





“머리는 왜요?”


“뭐 그냥.. 머리 푸니까 더 예뻐 보여서요.”


“..뻥치시네.”


“......”





뻥인 거 알고 있었군.


확실히 머리를 묶고 있을 때보다는


까무잡잡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리고 있는게


좀더 낫긴 하다만..





“운동할 때는 묶고 있는게 더 편하거든요. 그래서 원래는 잘 안 푸는데..”





헤헤..


하고 비실비실 웃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


하긴 뭐,


예쁘다는데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


이것으로 내 작전이 어느 정도 먹힌건가..





“오늘 확실히 오빠가 밥 사기로 한거예요.”


“..네.”





전혀 먹혀들지 않았군;


오빠는 무슨.. 언제 봤다고 오빠냐.


그쪽이 어쩌고 아니면 댁이 어쩌고 하더니


예쁘다는 소리 한번에 호칭이 바뀌나?





“핸드폰 좀 줘??”


“핸드폰은 왜요?”


“혹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수업 끝날 때까지 갖고 있을게요.”


“......”





밥에 대한 집착이 굉장하군.


핸드폰을 인질로 삼을 생각을 하다니..


이 여자는 프로다.





“안 가져왔는데..”


“뭐요?”


“자취방이 코앞이라.. 집에다 두고 왔는데요.”


“아.. 정말..”





어차피 수업 중에는 핸드폰을 못 쓰고,


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장 집에 갈 생각이라


일부러 놔두고 온 터였다.





“도망 안 가요.”


“뭐, 도망가 봤자 내일이면 잡힐테니..”


“.....”





아, 그렇구나.


어차피 내일 또 수업들으러 와야 되지?


깜빡한 척하고 내뺄려고 했더니;





이래저래 시간은 흐른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자


조교가 사람들을 모은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시합을 하겠습니다. 공 가지고 가셔서 쳐 보세요.


테이블이 부족하니까 웬만하면 복식으로 치시구요.“





‘복식’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본능이 번쩍 눈을 뜬다.


뇌가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인다.





“저.. 같이 치실래요?”


“네에-”





보호본능은 예의 그 귀여운 말투로


순순히 승낙한다.


내가 미칠듯한 스피드로 보호본능을 낚아채자


늑대들은 이쪽을 보며 허탈한 표정.





그중 눈치빠른 몇몇은 진작 포기하고


다른 세 명의 여자들에게 접근중.


전차남은 홀로 라켓을 잡은 팔을 붕붕 휘두르며


몸을 풀기 시작한다.





다른 혼합복식조 하나와


친선게임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탁구를 친다.





그쪽 여자도 어지간히 운동신경이 없는 모양.


도저히 게임진행이 힘들어


번갈아가며 치는 규칙을 없애고


그냥 아무나 치는 바보탁구를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아는 상태이니


승부보다는 즐거운 탁구에 초점을 맞춘다.


양 팀 남자선수들은


상대여자선수가 치기 쉬운 방향으로 공을 넘겨준다.


조금 지나니 서로 점수도 세지 않는다.


그다지 재미는 없군.





이십분 정도가 지났을까..


여자선수들은 그만 지쳐버렸는지


경기를 거부한다.





“저희는 좀 쉴게요. 두 분이서 치세요.”


“네.. 그럼 잠깐 쉬고 계세요.”





일대일게임을 막 진행하려는 순간,


전차남이 이쪽으로 접근한다.


어디서 납치했는지 남자도 하나 데리고 온다.





“한 판 합시다.”


“뭐, 그럽시다.”





그리하여 시작된 빅매치.


쉬기로 한 두 여자와


몇몇 관중들이 모여들어..


......


왜 탁구 안치고 이리로 모이는 거지?





“벌써 두 팀 깨고 왔거든요. 여기가 세 번째죠.”


“..그러시군요.”





전차남팀에 깨진 사람들인 모양.


이십분만에 두 팀이나 깨다니..


근데 왜 깨고 다니는거지?





“지는 쪽이 음료수 내기.”


“......”





여기저기서 삥뜯고 다닌 모양이군;


그래도 나는 밥을 사기로 했으니


제일 큰 피해자는 바로 나.


음료수라도 얻어먹어야겠다.





상대팀의 공격은 상당하다.


남자쪽은 좀 부실한 것 같다만..


굳이 남자가 나설 필요도 없이


전차남의 스매시가 구석구석 꽂힌다.


점수는 순식간에 벌어진다.





10:0


내 서브가 돌아온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때 사용하던


변칙기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지랄서브.





뭐 그리 어??기술은 아니고..


그냥 서브넣는 순간


탁구공에 약간의 스핀만 걸어주면 된다.


상대 테이블에 닿으면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그래서 지랄서브.





“어?”


“마구예요. 제가 예전에 선수였거든요.”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탁구공의 움직임은 따라가지만


다시 이쪽으로 넘기지는 못한다.


라켓에 맞는 순간에도 여전히 스핀이 걸려있으므로


공은 또다시 다른 쪽으로 튄다.





사실 조금만 쳐봐도 쉽게 대응할 수 있지만


내가 볼 때는 둘 다 초심자에 불과하다.


특히 상대팀 에이스인 전차남은


라켓도 쥘 줄 모르던 초보.


뛰어난 운동신경으로도


베테랑의 경기운영은 따라올 수 없지.





이래저래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21:15로 역전승.


씩씩대는 걸로 보아 상당히 분한 듯.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군.





“게토레이가 좋겠네요.”


“......”


“갈증해소엔 역시 게토레이죠.”


“......”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건만


어찌나 통쾌하던지..


본의아니게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되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쪽을 쳐다본다.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고기가 땡기는군..”


“......”


“점심때는 고기를 먹어야겠어.”


“고기는 원래 저녁때 먹는게 최곤데..”


“......”


“......”





역시 건드리지 않는 거였는데..





“오빠가 사는거죠.”


“......”





자나깨나 입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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