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도 아냐
방학인데 뭐 어때..
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계산착오였다.
분명히 방학이 맞을 텐데도 캠퍼스 안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왔다갔다한다.
다들 겨울학기 수업을 듣는듯.
겨울학기를 듣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결국 문제가 되는 건 복장 때문이다.
아침에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내 티셔츠에 그려진 미키마우스를 보고는
싱긋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수치심이 없어지는 줄 알았건만
쪽팔릴 때는 여전히 쪽팔*군.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 벗어나고자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아무 생각없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더니
뒤쪽에 따라오는 전차남양이 보인다.
설마.. 보복하는 건 아니겠지?
조폭도 아니고 그냥 대학생인데..
그것도 여자씩이나 되면서 설마 그런 짓을..
하는 생각에..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는다.
아닐거야..
아닐 거라고 믿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돌아보니
거*는 아까보다 더욱 좁혀져 있다.
분명히 아까보다 빨* 걸었을 텐데..
뭔가 오싹한 느낌에 스피드를 조금 더 올린다.
도대체 왜 거*가 좁혀진 거지?
다시 한번 돌아보니
조금 전보다도 더 가깝다.
느와르영화같은 데서 보면
걷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이 점점 가까워지고
관객의 눈 앞까지 다가왔을 때
사시미를 찔러넣는 장면으로 확 바뀌던데..
마침 인문대 건물은
체대 건물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거의 뛰다시피 하여
건물 안으로 잽싸게 들어간다.
간신히 숨을 돌*고 바깥을 보니
막 인문대를 지나쳐 걸어가는
전차남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를 노린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담배 한대를 꺼내 무는데
뒤에서 등을 툭- 하고 친다.
“배고파 죽겠다. 밥 먹으러 가자.”
“아, 벌써 수업 끝났냐?”
“첫날부터 수업은 무슨.. 넌 이제 끝났냐?”
“우린 세 시간 다 하더라구.”
마찬가지로 겨울학기를 듣는 친구놈인데
그* 중요한 녀석은 아니고..
프*미어*그 입성을 축하하며
이름은 이동국쯤으로 해두자.
자취방이 그* 먼 것도 아니건만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내 의견을 묵살한 채
“밥! 밥!” 을 외치며
식당으로 끌고가다시피 한다.
지금 이 복장으로 학생식당을 가기는 좀..
이놈의 짐승같은 피지컬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그냥 그대로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무슨 수업인데 첫날부터 풀타임을 뛰냐?”
“일주일짜*라 그런가봐.”
“그러게 학교 다닐때 공부 좀 해놓지 그랬냐.”
“......”
이놈이..
여름방학에 이어 이번 겨울방학까지
벌써 12학점째 계절수업을 듣는 녀석이..
“이번 겨울을 마지막으로 내 학창시절은 끝이로다.”
“너같은 놈도 졸업을 하긴 하는군.”
“말도 마라. 복학한 뒤로 계절수업만 24학점째다.”
12학점이 아니었군;
군대가기 전 2년 동안
학사경고 2회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나도
4학점만 추가로 듣고 졸업이 가능한데
도대체 이 녀석은..
“내가 복수전공을 해서 그래. 연관도 없는 전공을 두 개나 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러고보니 동국이는 영문과가 아니다.
처음 만난 것도 복학을 하고나서이고,
사실 알고 지낸 것도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녀석이 영문과를 복수전공하면서
같은 수업을 듣다보니 우연찮게 알게 된 것 뿐.
“아직 취직 안됐지?”
“니 걱정이나 하시지.”
“난 취직 안 할 거라니까.”
“미친놈. 그냥 놀고 먹겠다고?”
“사업할거라고 했잖냐..”
아참, 전에 말했었구나.
생각하는 사업이 있어서
영문과를 복수전공하는 거라고.
“외국 나가서 태권도장 차릴 거라니까.”
“하긴.. 너야 뭐..”
그러고보니 이녀석..
태권도학과였었군.
“스페인에다 태권도장 차려놓고 주말에는 맨날 축구보러 가는거지. 카카캇.”
“좋겠다.”
동국이는 스페인축구의 광팬.
사실 스페인*그보다는
지구방위대 레알마드*드의 팬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듯.
“근데 왜 하필 영문과를 복수전공했냐?”
“뭐? 무슨 소*야?”
“이왕이면 스페인어를 배우지 그랬어. 우* 학교에 서반아어과도 있는데..”
“......”
녀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놈 설마..
“스 스페인 영어쓰는 나라 아니냐?”
“......”
“베컴은 영국놈인데 레알에 있잖아.”
내 예상이 맞았군.
“동국아..”
“응?”
“그럼 차두*는 한국놈인데 독일에 있으니까 독일은 한국말 하겠구나.”
“......”
“..*.”
이놈은 굉장히 무식하다.
“양키는 다 영어쓰는 줄 알았지.”
하긴 뭐,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니
영어를 배워 두는게 훨씬 효율적일지도..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다.
“너 태권도학과랬지?”
“응.”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성실하게 밥만 먹으며 대답한다.
“니네 과에 말야..”
“......”
“전차남이라는 애 있냐?”
“푸웃-!”
입 속에 있던 밥알이며 멸치대가*며를
분수처럼 뿜어낸다.
일부는 내 식판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더이상 못 먹겠군.
더러운 새끼..
“아.. 이새끼.. 밥먹고 있는데 밥맛 떨어지게..”
“왜?”
“니가 그새끼를 어떻게 알아?”
“아니 뭐.. 같은 수업 듣길래..”
‘그년’도 아니고 그새끼라니..
모르긴 해도 상당히 미움받는 모양이다.
“말도 마라. 걔 아주 독종이야.”
“......”
“선배들 중에도 건드*는 사람이 없어. 완전 독불장군이야.”
“......”
“너도 살고 싶으면 걔한테는 말도 걸지 마라.
아니, 근처에도 가지마. 눈도 마주치지 말고..“
이걸 어쩌나..
눈도 마주쳐 봤고, 말도 해봤고,
거기다..
죽빵도 날렸는데..
“남자선배들도 절대로 걔랑은 겨루기를 안하려고 해.”
“..그래?”
"황선홍 알지?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스트.“
“아니.. 잘 모르는데..”
아테네 올림픽을 보긴 했다만
금메달 딴 사람들 이름을 다 기억하지는..
그나저나 금메달*스트라니 대단한걸.
그런 사람도 피하는 여자란 말야?
“그 황선홍이랑 친한 홍명보라는 분이 우* 과 선배인데..”
“......”
이새끼..
사람 오해하게 만들고 있어.
“명보형은 비록 올림픽 출전은 못했지만 그래도 국가대표 상비군이었거든.”
“......”
“그 형이 연습 중에 걔랑 겨루기를 했었는데..”
“근데?”
“하이킥 맞고 실신했어.”
“......”
굉장하군;
그런데 태권도에서도 하이킥이라고 하나?
“그 형이 실력이 딸려서 그런 건 아니고..”
“......”
“그냥 장난삼아서 한 거였거든.. 물론 처음엔 상대도 안됐지..
근데 이게 계속 지니까 꼴받았는지.. 계속 덤비는 거야..“
“......”
“그래서 명보형이 귀찮아서 한번 져줄려고 했는데..
이년이.. 존나 세게 차는 바람에 그만..“
녀석은 뭐가 그* 심각한지
갖은 폼을 다 잡으며 말한다.
영화 ‘친구’에서
동수가 하와이를 갈까말까 고민할 때의 표정이다.
“어때? 독종이지?”
“그게 끝이야?”
“얌마 이 정도면 졸라 독한거지.”
“우연히 그랬을 수도 있지.”
그래도 태권도학과라면..
어릴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을 테니
어느 정도 힘과 요령은 있었을 터.
상대가 아무* 강한 남자선수라 해도
무방비상태에서 갑자기 당했다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우연히가 아냐 임마.. 죽일 생각으로 찬 거야.”
“죽일 생각?”
“처음엔 우*도 여자한테 지냐고 막 놀렸는데.. 사실은 그게 아냐.
걔는 당하고는 못 살거든. 무조건 두배로 갚아줘야돼. 아주 독종이라구.“
“......”
“태권도도 엄연히 스포츠라 포인트따는 게임인데 말야.”
“......”
“걔는 어떻게 된게 대회만 나가면 완빵 케이오만 노*는거야.
그러니 맨날 예선탈락하지. 그래서 뭐 별로 이렇다할 경력은 없는데..
아마 링 위에서 헤드기어 벗고 싸우는 거면 지금쯤 세계챔피언 먹었을걸?“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두배로 갚아준다니.
그것도 완빵 케이오로..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임마. 괜히 실수했다가 하이킥 맞고 병원에 드러눕지 말고.”
이미 늦었다 새끼야.
진작 좀 알려주지 그랬니..
동국이에게 그녀를 만나게 된 경위와
그 이후의 사건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뭐.. 그렇게 된거지.”
“그렇구나.”
“......”
“그동안 즐거웠다.”
“......”
“불쌍한 새끼..”
녀석이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거*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과까지 했는데.. 괜찮겠지?”
“그렇지 않아. 절대 괜찮지 않을거야.”
“......”
설마..
그녀도 인간인데 그런 걸로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하는데..
“걘 인간도 아냐..”
..하고 혼자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친절한 녀석이군.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어차피 동국이가 한 얘기이므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놈은 나이 스물여섯에 귀신의 존재도 믿는 놈이다.
밥을 먹고 나니 수업까지는 이십분 정도.
자취방이야 코앞에 있으니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다음 수업은 첫날이라는 이유로 일찍 끝날 거란 생각에
동아*방에서 잠깐 시간을 때우다
강의실로 향했다.
이번 수업은 3학점짜* ‘언어학개론’ 수업.
모든 외국어과목에 있어 꼭 이수해야하는 필수전공.
당연히 체육수업과는 다르게 여학생의 수가 압도적이다.
뭐 어차피 이번 겨울방학을 끝으로 졸업이니
조금 창피하고 말지 뭐.
동국이와 함께 강의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두*번거*며 빈 자*를 찾는데
뒤쪽에 앉은 여학생들이 키득키득한다.
그냥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자*를 찾아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아디다스.. 아디다스..” 한다.
이 강의실 전체에
아디다스 추*닝을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역시나 나 때문에 웃은 거였군.
그렇지만 내 복장의 웃긴점은
아디다스가 아니라 미키마우스였을텐데..
뭐, 쪽팔릴걸 각오하고 왔으니
크게 신경쓰이진 않는다.
얼마 안 있어 교수님이 들어오고
예상대로 수업은 이십분도 채 안되어 끝났다.
이 수업은 교재없이는 진행이 힘들다.
동국이와 헤어져서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교재를 구입하고 돌아서는데
서점 알바생이 킥킥, 웃는다.
내일부터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서 다녀야겠군;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괜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나이에 뭐하는 짓이람..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티셔츠와
추*닝바지를 집어드는데..
까만색 추*닝바지 똥꼬부분에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다.
역시나 일부러 그런게 맞군;
발자국 한복판에는
아디다스 불꽃마크가 예쁘게 박혀 있다.
......
웃긴점은 미키마우스가 아니었구나.
똥꼬에다 불꽃마크를 찍어주다니..
역시..
인간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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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은 나의 힘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