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가 젊을 때, 정안 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는 이를 이상히 여겨 태조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 하였다.
태조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담비[蜜狗]가 달려 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한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런 기록들이야 넘쳐나는데 사람들이 별로 믿지를 않기 때문에 이런것을 빼고 순순히 전공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이렇습니다.
몽골식 이름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즉 환조 이자춘이 고려 조정에 내알한게 1355년.
이성계가 처음 관직에 나선것은 1356년입니다.
태조의 연세가 22세인데 비로소 벼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35번째 기사
이성계의 이때 나이가 22세.
공민왕 10년(1361)
신축 9월에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배반하여 천호(千戶) 임자부(任子富)와 김천룡(金天龍)을 죽이므로, 왕이 형부 상서(刑部尙書) 김진(金璡)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게 했으나, 김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때 태조는 통의 대부(通議大夫)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 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는데, 왕이 명하여 가서 김진을 원조하게 하였다. 태조는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니, 박의는 벌써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강계(江界)로 들어갔으나, 다 잡아서 이를 목베었다.
─ 독로강 만호 박의의 난 제압. 이성계 나이 27살때의 일
공민왕 10년(3161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 위평장(僞平章) 20)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번(破頭潘) 등 20만 군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서북 변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글을 보내[移文]기를,
“군사 1백 10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니 속히 맞아 항복하라.”
하였다. 태조는 적의 왕 원수(王元帥) 이하 백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 무리 격퇴. 이성계 나이 27살때의 일.
공민왕 11년(1361년)
공민왕 11년(1362) 임인 정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등 9원수(元帥)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와서 서울을 수복하고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목베었으니, 적의 목을 벤 것이 대개 10여만이나 되었다. 이때 태조는 휘하(麾下)의 친병(親兵) 2천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東大門)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에 올라 적을 크게 부수니, 위명(威名)이 더욱 나타났다.
─ 홍건적에 의해 빼앗긴 개경 수복에 참가하여 가장 먼저 입성함. 이성계 나이 27살때의 일.
공민왕 12년(1362년)
7월, 나하추(納哈出)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 등과 함께 홍원(洪原)의 달단동(??洞)에 둔치고, 합라 만호(哈剌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어 여러 백안보하 지휘(伯顔甫下指揮)와 함께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는데, 태조는 덕산동원(德山洞院)의 들에서 만나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고, 함관령(咸關嶺)·차유령(車踰嶺) 두 재[嶺]를 넘어 거의 다 죽였으나, 군기(軍器)를 버린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 원나라 군벌 나하추의 수만 군대 격퇴. 이성계 나이 28살 떄의 일.
이 뒤로 전투 과정에 있는 장황한 설명이 있는데 거의 이성계의 원맨쇼 수준인데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듯 하구요. 나하추 같은 경우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사로잡았다가 놓아준 뒤 요동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되었는데 당시에 상당한 네임드 중에 한명이었죠. 북원의 세력이 기울어진게 나하추가 명나라의 장군 남옥에게 귀순한것이 크다고 합니다. 귀순 한 다음에 대우도 좋았구요.
공민왕 14년(1364년)
본국(本國)의 최유(崔濡)가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장작 동지(將作同知)가 되었는데, 여러 불량배(不良輩)들과 더불어 기 황후를 달래어 왕을 구함(構陷)하여 폐위(廢位)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인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왕을 삼으려고 하여, 요양성(遼陽省)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왔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 등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여 물러와서 안주(安州)를 지켰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精兵]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指揮)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精騎]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태조가 적장 두서너 사람을 쏘고 드디어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 덕흥군과 최유의 공격 대파. 이성계 나이 30살때의 일.
고려사절요에서는 1만 군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1만 명중에 살아서 연경까지 도착한 사람이 17명이라고....
다루가치(達魯花赤) 김방괘(金方卦)가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낳으니, 태조에게 외종형제(外從兄弟)가 되었다. 여진(女眞)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 팔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서 북쪽 변방에 꺼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대대로 함주(咸州)에서 생장하여 은혜와 위력(威力)이 본디부터 쌓여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우러러보았으며, 여진족(女眞族)들도 또한 위력을 두려워하고 은정(恩情)을 사모하여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태조가 서북면(西北面)에 가서 도운다는 말을 듣고 여진을 유치(誘致)하여 크게 침략을 하고 드디어 함주(咸州)를 함락시키니, 수비하던 장수[守將] 전이도(全以道)·이희(李熙)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돌아오고, 도지휘사(都指揮使) 한방신(韓方信)과 병마사(兵馬使) 김귀(金貴)가 화주(和州)에 진군(進軍)했으나, 또한 패전하여 물러와서 철관(鐵關)을 지키게 되니, 화주(和州) 이북 지방이 모두 함몰(陷沒)되었다.
관군(官軍)이 여러 번 패전하니, 장수와 군사들이 의기(意氣)가 저상(沮喪)되어 밤낮으로 태조가 이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 여진족 삼선 - 삼개의 난입니다.
공민왕 14년(1364년)
2월, 태조가 서북면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인심(人心)이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나 솟았다. 한방신·김귀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전진해 공격하여 크게 부수어 그들을 달아나게 하고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니, 삼선과 삼개는 여진 땅으로 달아나서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태조를 승진시켜 임명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삼고, 봉익 대부(奉翊大夫)로 관계(官階)를 더하고 단성 양절 익대 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또 금대(金帶)를 내리고 의뢰(倚賴)함이 더욱 무거웠다.
─ 삼선 삼개의 난을 평정했습니다. 이성계 나이 30살 때의 일.
그 공으로 추밀 부사(밀직 부사)가 되구요. 추밀 부사를 지금의 기준으로 하면 어느정도라고 해야할까...
공민왕 14년(1364년)
조무(趙武)는 원(元)나라 장수인데, 원나라가 쇠약하매 무리를 거느리고 공주(孔州)를 점거하였다. 태조는 휘하의 군사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종말에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이를 그냥둘 수는 없다.”
하면서,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쳤으나, 그 사람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깝게 여겨 고도리전(高刀里箭)으로 쏘아 수십 번을 맞히니, 조무가 말에서 내려와 절하므로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 조무가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마침내 시양(?養) 25) 이 되어 종신토록 복역(僕役)했으며, 뒤에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 원나라 장수 조무를 항복시킵니다. 이성계 나이 30살 때의 일.
공민왕 19년(1370년)
태조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 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 압록강을 건너 이오르티무르를 격파하고 우라 산성을 손에 넣습니다. 한국 역사에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건너 성을 점령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성계 나이 36살 때의 일.
이때쯤 지문하부사가 되어 종 2품 반열에 오릅니다.
우왕 3년(1377년)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 지리산에서 왜구 격파. 이전까지 북방에서 전공을 올렸다면 이제는 왜구와 싸웁니다. 그전부터 왜구를 대비하며 군사력을 키우는 업무를 맡고 있던 중. 이성계 나이 43세 때의 일.
우왕 3년(1377년)
8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의 신주(信州)·문화(文化)·안악(安岳)·봉주(鳳州)를 침구(侵寇)하니....우왕이 태조와 문하 평리(門下評理) 임견미(林堅味)·변안열(邊安烈),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蔓殊)·홍징(洪徵)으로 조전(助戰)하게 하였다. ...남은 적군들이 험지(險地)에 의거하여 섶[柴]을 쌓아 스스로 튼튼하게 하였다.
태조는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음악을 베풀게 하니, 중[僧] 신조(神照)가 고기를 베어 술을 올렸다. 태조는 사졸들에게 명하여 섶을 불지르게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찼다.
적군이 곤경(困境)에 빠져서 죽을 힘을 내어 충돌(衝突)하였다. 화살이 자리 앞[座前]에 있는 술병에 맞았으나, 태조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김사훈(金思訓)·노현수(魯玄受)·이만중(李萬中)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쳐서 거의 다 죽였다.
─ 서해도는 황해도 지방이라고 합니다. 왜구가 여기까지 오는 수준이군요. 전투를 했던 곳은 황해도 해주 입니다. 적을 거진 격파하고 남은 적이 험한 곳으로 숨어들아가자 앞에서 술상을 차렸는데, 화살이 술병에 맞아 부서졌지만 계속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야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말아라 같은 식이지만... 이성계 나이 43세 때의 일.
이때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묻고, 감히 태조의 군사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반드시 틈을 엿보고서야 들어와 침구(侵寇)하였다.
─ 이때부터 왜구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왜구들은 최영을 몹시 두려워 해서,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샌 최 만호 뿐이다!"라고 했는데 최영을 넘어갔더니 이성계가...
우왕 4년(1378년)
왜적의 배가 착량(窄梁)에 많이 모여 승천부(昇天府) 로 들어와서 장차 서울을 침구(侵寇)하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에게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해풍군(海?郡)에 진치게 하고,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적군이 이를 정탐해 알고서 최영의 군대만 부수게 되면 서울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여러 진[屯]을 지나오면서 이를 버리고 다투어 보지도 않고 해풍(海?)으로 달려와서 바로 중군(中軍)을 향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국가의 존속(存續)과 멸망은 이 한 싸움에 결정된다.”
하면서, 마침내 백연과 함께 전진하여 적을 쳤으나, 적군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날랜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가서 백연과 합세하여 쳐서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최영은 적군이 쓰러져 흔들림을 보고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곁에서 적군을 치니, 적군이 거의 다 죽었으며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하였다.
─ 승천부는 해풍 지역이고, 다시 해풍은 현대의 개풍 지역이라고 합니다. 개풍은 본래 경기도 땅이었는데, 한국전쟁에서 이 지역을 수복하지 못해 황해도 지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승천부 전투에서는 최영과 이성계라는 콤비가 같이 싸웁니다.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조선왕조실록 모든 기록에서 최영이 싸우다가 패주하자, 이성계가 적군을 급습하고, 다시 최영이 군사를 거느려 싸워 적군을 개발살 내었다고 나오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최영의 패주가 의도적이었고 다 작전이었는데 이성계 뛰어주려고 말을 살짝 바꿨다고 보기도 하는것 같은데..
하여간 최영 - 이성계에 의해 왜구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이성계 나이 44세 때의 일. 참고로 최영은 무려 62살입니다.
우왕 6년(1380년)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 35)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생략)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생략)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 그 유명한 황산 대첩으로 이성계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입니다. 이때 왜구에 의한 피해가 전에 없을 정도로 유래가 없었고 제압하려 했던 관군들도 오히려 죽는 상황에서 적군을 대파하여 피가 강물을 이를 정도였다는데, 이 싸움으로 인해 이성계는 어마어마한 명성과 입지를 얻게 됩니다.
돌아오는 와중에 최영과 우왕의 반응도 그렇고, 권근 - 이색 - 김구용은 모두 뒤질세라 이성계의 후빨을 하는 시를 짓기까지 하는데, 대략 그 분위기가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삼남지방, 강화도, 황해도 가릴것 없이 박살내고 다니던 왜구들은 최무선의 진포 대첩, 최영의 홍산 대첩, 이성계의 황산 대첩 이후로 어느정도 소강세를 보이는듯 합니다. 이성계 46세의 일입니다.
우왕 14년(1388년)
이때 왜적의 배 1백 50척이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北) 등처에 침구(侵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 거의 다 없어졌다....태조가 가서 치기를 자청하여 함주(咸州) 관아에 이르렀다....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태조가 영을 내리기를,
“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
─ 함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이성계 나이 54세의 일입니다.
태조는 최영(崔瑩)과 친밀한 정(情)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우왕에게 무함(誣陷)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
하였다. 매양 빈객(賓客)을 연회하려 할 적엔 최영(崔瑩)이 반드시 태조에게 이르기를,
“나는 면찬(?饌)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肉饌)을 준비하시오.”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어느날 태조는 이 일 때문에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는데,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뛰어 내려왔으나, 지세(地勢)가 가파르고 낭떠러지인지라, 여러 군사들이 모두 내려갈 수가 없으므로, 산밑으로 비스듬히 따라 돌아서 달려가 모였는데, 갑자기 대초명적(大哨鳴鏑)의 소리가 위에서 내려옴을 듣고 위로 쳐다보니, 곧 태조가 고개 위에서 바로 달려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빠른 번개와 같았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먼데도 이를 쏘아 바로 맞혀서 죽였다. 태조는 곧 말고삐를 당기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주먹을 보라.”
하였다. 최영의 휘하 군사인 현귀명(玄貴命)이 또한 군사들 가운데서 있다가 친히 이를 보고, 그 사실을 최영에게 말하니, 최영이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하였다.
─ 최영과 이성계는 이때까지 좋은 선배와 후배 사이로 굉장히 친했습니다. 우왕에게 이성계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자 직접 최영이 나서 쉴드를 쳐줄 정도이기도 합니다.
신우(辛禑) 14년(1388) 무진 정월, 이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그의 무리 영삼사(領三司) 임견미(林堅味)·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찬성사(贊成事) 도길부(都吉敷) 등이 요로(要路)에 나누어 점거하여 돈을 받고 관작을 팔며, 남의 전정(田丁)을 빼앗아 그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여, 관청과 민간이 빈곤하여졌다. 태조가 최영과 더불어 그들의 하는 짓을 분히 여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우왕을 인도해서 이들을 제거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여 길가는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견미(堅味) 등이 참형(斬刑)을 당하매 태조로써 수 문하 시중(守門下侍中)으로 삼았다.
─ 결국 최영과 이성계는 전횡을 일삼는 이인임을 같이 처리해버렸습니다. 1388년의 일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참 좋았습니다(-_-)
정리
1361년 - 독로강 만호 박의의 난 제압 27세
홍건적 격퇴
개경 수복
박의의 때는 고려군의 병력은 2천, 반란군의 병력은 파악 안됨
개경 수복때 고려군의 병력이 20만, 홍건적의 병력은 10만 이상
1362년 - 나하추 격퇴 28세
나하추의 병력은 '수만' 이라고만 확인 가능. 선봉이 1천명.
고려군의 병력은 파악 안됨.
1364년 -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 격파 30세
여진족 삼선, 삼개의 난 격파
원나라 장수 조무를 항복시킴
덕흥군과 최유의 병력은 1만.
고려군 중 다수는 최영이 이끌고 이성계가 이끄는 병력은 정예 기병 1천.
나머지는 병력 파악 안됨.
1370년 - 압록강을 건너 이오르티무르를 무찌르고 우라산성 점령 36세
고려군의 병력은 보병 1만, 기병 5천. 상대편의 병력은 파악 안됨.
1377년 - 지리산에서 왜구 격파 43세
서해도에서 왜구 격파
정확한 병력을 알 수 없음.
1378년 - 승천부 전투에서 왜구 격파 44세
정확한 병력을 알 수 없음.
1380년 - 황산대첩 46세
고려군의 병력을 알 수 없음. 왜구의 병력은 고려군의 10배라고 기록됨.
포획한 말이 1천 6백필. 당초에 상륙핸 왜구의 배는 500여척(이 배들은 최무선이 모두 격침시킴)
1388년 - 함주 전투에서 왜구 격파 54세
정확한 병력을 알 수 없음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293578
전에 한국사 무인열전?인가하는 게시물에서 어떤 분이 이성계는 왕이라서 뻥이 좀 심하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정도면 역대급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성계빠라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