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를 안 보신 분들은 먼저 보고 오시길 권해 드립니다.-
음력으로 1592년 5월 15일 전란 발발 한 달이 훨씬 지난 시점. 옥포 앞바다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26척의 일본 전함들이 옥포만에서 침몰하고 4천명에 달하는 왜군들이 물귀신이 되고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숫자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음) 옥포에 주둔해 있던 도도 다카도라. 그는 그가 가졌던 전력의 90%를 삽시간에 잃어버리고 패주합니다. 조선수군은 이제 없다고 판단한 그로서는(이미 경상도의 수군은 대부분 괴멸됨)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재밌는 사실. 일본의 전투선 26척이 침몰하고 4천명이 전사할 동안 이순신의 전라 좌수군에서는 단 한척의 배도 파손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선지’ 로 알려진 병사 한 명이 팔에 화살을 맞았다는 것이 이날 전라좌수군 피해의 전부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수많은 전쟁사들을 접해봤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전투결과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4천명이 죽을 동안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죠. 모두 알다시피 이 전투가 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 입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세울 대 업적(23전 23승)의 첫 걸음이었으며, 임진왜란중 조선군의 첫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순신 장군은 어떤 전략으로 싸웠기에 이토록 압도적인 승리를 만들어 냈을까요?
2. 이순신이 보낸 1년의 시간
수많은 전투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할 만한 승전의 결과를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이지만 정작 우리는 중요한 것을 간과하곤 합니다. 각 전투 그 자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압도적 승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따지자면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순신이 보낸 1년의 시간. 전란이 발발하기 전 1년 동안 이순신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까? 무슨 전략을 세워 군사들을 훈련시켰을까? 전란이 터지고 난 이후의 승리의 근간은 모두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만큼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발발 약 1년 전에 전라좌도수군 절도사로 임명 됩니다. 당시 조선에는 여섯 개의 수군기지가 있었는데(경상 좌수영, 경상 우수영,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충청 좌수영, 충청 우수영)이 중 충청도의 수군은 거의 유명무실 했기에 사실상의 수군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는 네 수영 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원균은 경상우도수군 절도사 였죠.
1591년. 이미 일본은 전쟁 준비에 한창 이었습니다. 그들의 전쟁 준비는 매우 노골적이었고, 확실한 것이었죠. 가장 가까운 우리 조정이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통신사까지 보내 일본을 관찰했지만, 우리 어여쁘신 고관대작들께서 권력다툼을 하는 가운데 이 정보는 왜곡됩니다. 더욱 큰 문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온 왜구에 대한 무시였습니다. 체구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놈들. 그 놈들은 전쟁을 일으킬 힘이 없다. 혹 일으켜봐야 조무래기일 뿐이다. 조총이 있다한들 우리의 기마병들에게는 먹잇감일 뿐이다. 그토록 그 왜구를 무시하고 침략전쟁의 소중한 정보를 당파싸움의 도구로 활용하는 동안, 일본은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바로 이러한 사세를 정확히 판단할만한 인물이 조선에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사세를 가장 정확히 판단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냉정하게 사세를 판단했고, 일본이 일으킬 침략전쟁이 매우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 왜구는 전국통일 전쟁을 이제 막 끝냈기 때문에 20만이 넘는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다.
2. 대부분의 군사들이 실전 경험으로 다져져 있는 병사들이다.
3. 왜놈들은 대대로 칼을 잘 쓰는 놈들이었으니 육군과 수군을 막론하고 접근전을 펼치면 우리가 매우 불리하다.
4. 조총으로 무장했기에 기존의 방식으로 왜군과 싸우면 반드시 패한다.
5. 다가올 침략전쟁은 조선에 명운이 걸려있을 만큼 어려운 싸움이다.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었건만, 조선 조정과 일각의 장수들은 전쟁준비를 하는 왜놈들이 괘씸하다며 먼저 공격하자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왜놈들에 대해서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조선이 어떤 상태인지도 냉정히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웅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죠.
조선의 현실이라.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로 근 200년 동안 크나큰 전쟁이나 내전이 없었습니다. 남쪽바다에 가끔 왜구가 출몰해 노략질을 하거나 북쪽의 여진족이 성가시게 굴어서 두들겨 패는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평화. 전쟁을 모르는 세대. 정비되어 있지 않은 군대(군인 명부에 30년 전 죽은 사람이 여전히 올라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허다했음). 이를 적절히 관리해야할 조정은 뒷짐.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이 침략 전에 대조선 전쟁은 필승이라고 확신하고, 선조를 잡아서 최단시간 내에 전쟁을 끝내고자 한 전략이 이해가 갑니다.
이러한 판세를 정확히 읽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수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두고 고민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싸우면 우리가 매우 불리하기에.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수군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그럼 과연 기존의 수군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인류 전쟁의 역사를 아주 간단하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보자면 칼로 싸우던 시대와 총으로 싸우는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총으로 싸우던 시대가 열린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셈이죠. 칼과, 활, 창이 무기였던 시절, 전쟁을 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양 군은 반드시 맞붙어서 접근전을 펼칩니다.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활을 쏘다가, 접근전 에서는 칼과 창으로 싸웁니다. 이 원리는 그대로 바다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배라는 것은 단지 물이라고 하는 지형적 제약을 극복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적을 만나면, 역시 멀리서는 활을 쏘다가 접근전을 펼쳐 적의 목을 떨어뜨리는 것이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당대의 수군이 받는 훈련은 역시나 칼, 활 창을 다루는 연습이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배를 타고 갈 뿐이지 육군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지만 당대에는 이것이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수군에 대한 통념이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죠. 이순신 장군이 대단한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통념.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왔던 통념에서 벗어나 수군의 개념에 변화를 준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의 핵심에 함포탑재가 있었습니다.
판옥선에 총통을 탑재하여 바다에서 포격전을 감행하겠다.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이순신 장군의 이 혁명적 생각이 400여년전, 우리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입니다.
한 눈에 보아도 이순신 장군의 생각한 수군의 개념이 훨씬 진보된 수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총통 때문이었습니다. 16세기 말 당시에는 총통이라는 것이 개발되어 전쟁터에 도입된 지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운용하는 전법이나 기술에 있어서도 그리 발전해 있지 않은 때였죠. 한 마디로 칼로 싸우던 시대에서 총으로 싸우는 시대 사이의 과도기적 기간이었는데, 아직은 포 활용술이 많이 발달해 있지 않았기에, 육지 공성전에서나 쓰이던 무기였습니다. 그것을 감히 배 위에 탑재하겠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죠.
더욱이 배에서 활을 쏘는 것도 매우 훈련된 병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하물며 포를 조준하여 쏘는 훈련이라. 전라 좌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아래 매우 강한 훈련의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렇게 착실히 전쟁에 대비하던 기간에도, 원균을 비롯한 몇몇 수군장수들은 이순신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이순신의 함포사격 개념을 멀리서 돌파매질이나 하겠다는,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치부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런 생각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 온 통념에서 벗어난 생각. 그 첫 발검을 뗀 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바보 멍청이라고 욕을 먹는 광경을 우린 심심치 않게 봐 왔죠.
그 혁명적 생각에 한 가지 소재가 더 담겨 있습니다. 바로 진법훈련.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이 진법을 이뤄 전투하기를 바랬습니다. 처음 진법훈련을 시도했을 때,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 조차도 극히 반발했다고 전해집니다. 왜일까요? 육지에서도 진을 갖춰 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00명의 병사들을 생각했을 때, 그들 모두가 약속된 위치로, 약속된 속도로 움직여야 합니다. 수많은 훈련이 거듭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바다에서 배가 진을 갖춘다는 것은 당대의 통념과 상식으로는 필요치도 않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키보드의 숫자자판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두 다리가 있기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걸을 수 있습니다. 숫자판의 7,9,1,3,4,6 위치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배는 그것이 불가능하죠. 진행방향이 있고, 조류와 바람이 있기 때문에 지정된 위치로 이동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진법훈련을 강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포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함이었습니다. 함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적의 함대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려면 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도조차 하지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군으로 하여금 진법에 있어 능통한 군대로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그 ‘진법’이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중에 살펴볼 한산도 대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 학익진에 대한 기술적인 이야기는 그 때를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더불어, 천자총통들을 비롯한 여러 화포를 운영함에 있어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에는 <일시집중타>라 부르는 화포운영술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3부에서 살펴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은 새로운 수군을 위한 새로운 전투선을 놓고 고민합니다. 그 유명한 나대용과 거북선이 이제 등장할 시간입니다. 당시 조선의 주력 전투함은 판옥선 이었습니다. 판옥선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전투선이었고, 전란이 끝날 때 까지도 맹활약을 하는 강력한 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왜 새로운 전투선에 대해 고민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을 보면 볼수록 이순신 장군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조선함대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
이순신 장군은 왜군에 대한 압도적 승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10배가 넘는 적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여 일본 수군이 가지고 있는 전략을 간파하여 일본이 가진 전략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최종병기를 고안해 내고자 합니다. 여기서도 이순신 장군은 일본이 펼칠 전략을 꿰뚫어 봅니다.
1. 일본은 무엇보다도 칼을 잘 다루기에 항시, 무조건 도선을(접근전) 시도 할 것이다.
2. 도선을 시도하기 위해 빠른 속력으로 접근할 것이고 떨어진 거리에서는 조총과 활을 쏠 것이다.
3. 도선이 시작되면 칼로써 아군의 갑판을 제압하려 들 것이고 여차하면 불을 지를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세 가지 사항은 사실 아까 전에 언급한 <수 천년동안 지속외어 온 수군의 전투방식> 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바로 위의 세 가지 전략으로는 절대 침몰 시킬 수 없는 함선 그것이 바로 거북선입니다.
왜군이 가용한 어떤 전술로도 격파가 불가능한 최종병기를 만들어 낸 셈입니다. 사천해전에서 첫 선을 보인 거북선. 판옥선단은 왜군 함대와 철저히 거리를 벌리며 포격전을 감행하는 동안, 거북선 2척이 왜군 선단 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왜군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지붕 있는 배도 처음 보거니와, 도선도 불가능하고, 불에 타지도 않는 배가 자신들 진영 깊숙이 들어와서는 전후좌우로 함포를 쏴 대고 여차하면 들이 받아버립니다.
이토록 대단한, 시대의 전함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역사의 장난이라고나 할까요? 판옥선 두 척 값에 달하는 이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전라도 여수에서 진수됩니다. 중앙정부의 고관대작들이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어 민생이 뒷전이던 시절, 다른 장수들조차도 무시하며 조롱하던 그 시절, 전란이 발발하기 전 1년의 시간동안, 저 전라도 여수에서 이순신 장군은 새로운 전략과 전술, 대안을 가지고 완벽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란 발발 전 1년 동안 이순신 장군이 훈련시킨 전라좌도수군은 당대 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전략과 전술로 무장한, 적에 대한 대비와 그에 따른 훈련이 완벽하게 진행된 군대였습니다. 그 수준의 차이라는 것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매우 큰 것이었고, 동시대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격차가 큰 전략과 전술이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서론에서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언급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전술, 전략이 얼마나 옳았으며 진보한 것인지 앞서 말한 옥포해전의 결과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4천명을 사살할 동안 1명의 부상자만 낸 그 압도적 결과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한산도 대첩에 접근해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한산도 대첩 그 서막이 이제 펼쳐질 것입니다. 3부도 기대해 주세요.
- 3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