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억 속에나 남아있을 법한 이발관이 서울 한복판에 있습니다.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옆 ‘화개 이발관’. ‘이용원’이나 ‘이발소’로 이름이 바뀐 지 오랜데 아직 ‘이발관’이라니요. 낮은 기와지붕과 알루미늄 여닫이 문, 그리고 색바랜 유리창. 창문을 뚫고 툭 튀어나온 에어컨 등짝엔 ‘금성’이란 글자가 눈에 띕니다. 20년은 됐나 보다 하고 문을 열자 더 생경한 과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1956년부터 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다는 일흔다섯 이발사를 만나게 됩니다. 인근 헌법재판소부터 국립민속박물관까지 나라의 높은 분들이 이분에게 머리를 맡기러 온답니다. 세련된 미술관 옆에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 그 봉인된 풍경 속에 새겨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사각사각. 하얀 가운을 입은 최 할아버지(75)가 한 손에 가위, 한 손엔 빗을 들고 손님의 머리 숱을 훑습니다. 하루 12시간, 손님이 없어 텔레비전 보며 소일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단골 손님 세분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습니다. 손이 바빠질 만도 한데 최 할아버지 가위질은 빨라지지 않습니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 이발 인생 50년 간 지켜온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싹둑 싹둑’ 과감하지 않고 ‘사각사각’ 섬세합니다. 이발을 끝낸 손님은 타일 사이사이 시멘트가 다 떨어져 나간 세발대(洗髮臺) 앞에 앉아 고개를 숙입니다. 최 할아버지는 손으로 세 번 시원하게 머리를 감겨줍니다.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긴 물을 물뿌리개로 뿌려 헹궈주죠. 마무리까지 하고 나면 한시간이 훌쩍 넘습니다.
여기는 최 할아버지가 50년째 30년 된 가위를 잡고 있는 서울 소격동 화개이발관. 할아버지만 그대로인게 아니라 이발소도 그대로입니다. 아이보리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제 지지대가 있고 그 위에 버티고 있는 닳고 헤진 밤색 가죽 이발의자는 50년 전 그대로입니다. 연탄 때는 난로와 110볼트를 꽂는 단칸냉장고는 30년 전인지 35년 전인지 가물가물합니다. 거울 아래 튀어나온 좁은 나무선반 위엔 먼지 쌓인 나무수건함과 은색 소독기, 일자면도기와 손바리캉, 머리카락 분첩까지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쓸기담’, ‘맨담’ 같은 오래된 상표가 적힌 도구함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변한 것이 있다면 빨랫줄에 널린 분홍빛 수건들과 면도용 비누 같은 소모품입니다. 흑백사진으로나 남아있을 법한 이곳은 영화 ‘효자동이발사’의 포스터 촬영 배경이 되기도 했고, 국립민속박물관은 이발관 전체를 사후(事後) 기증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최 할아버지는 1956년부터 여섯평 남짓한 이 과거의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그저 손님이 거울 보고 웃는 모습에 기뻐하며 한 자리만 지켰습니다. 바깥 나들이도 익숙치 않습니다. 일요일이 아니면 쉬지 않는 최 할아버지는 해외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 중심가에 살고 있지만 잘 아는 길은 딱 네 군데 뿐입니다. 성당, 시장, 삼청공원, 그리고 아내 묘소 가는 길. 장성한 자식들이 여행 한번 다녀오시라 떠밀어도 최 할아버지는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게를 비우느냐”고 고집을 세웁니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의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이 곳 손님들은 할아버지의 가위맛을 잊지 못하고 이사 간 다음에도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대부분입니다. 가장 오래된 단골은 40년, 가장 멀리서 오는 손님은 홍콩이랍니다. 손님들도 쟁쟁합니다. 전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해 국무총리실·감사원·국립민속박물관 등 이발관 지척에 있는 국가기관 간부들이 이 곳을 찾습니다. “잘라도 자르지 않은 것처럼, 그 사람 얼굴에 어울리게 잘라주고 오면 편안해진다”는 게 손님들 말입니다. 아무래도 60년대 풍경 속으로 들어와 있는 묘한 기분에 매료되나 봅니다.
윤보선 전(前) 대통령이 5·16쿠데타로 하야한1962년 이후, 할아버지는 윤 전 대통령의 자택에 10년 이상 출장이발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윤 전 대통령 비서의 추천으로 맺어진 연이었지요. 그런데 손님들과의 추억 한 토막 들려주는 게 그렇게 힘드시답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얘기들이어서 안 돼. 고객하고 나눈 사적인 얘기를 어떻게 함부로 하겠나.” 재차 채근하자 한 조각 들려주셨습니다. “그 분이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평소 집에서 거실가운을 입고 계셨는데 목부분이 다 헤져서 기워 입으셨더라고. 구두도 악어가죽으로 만든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다 떨어지고 갈라져 그래 보인거였지.”
못 먹고 못 배우던 해방직후 중학교를 다닌 최 할아버지는 세무공무원의 기회를 버리고 이발사를 택했습니다. “남한테 좋은 소리, 싫은 소리 해야 하는 게 싫었어. 그냥 내 기술로 떳떳하게 벌고 싶어서.” 반 백년이 흐른 지금, 늙마에 혼자 살 번듯한 집도 있고 자식들에게 의지 하지 않을 수 있어 할아버지는 뿌듯합니다. 하지만 돈 쓰는 법은 잘 모릅니다. 산해진미를 찾아다닐 여유가 충분한데도 꼬박꼬박 근처 집에 들러 밥을 해 드십니다. 반찬은 연일 된장찌개. “먼저 간 처가 그렇게 아껴서 그나마 마련한 건데 나 혼자 이 돈을 어떻게 써. 그게 의리지.”
아트선재센터를 시작으로 예쁜 카페가 줄 지어 있는 그 좋은 터에 이발 말고 다른 업을 한다면 벌이가 갑절은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발을 그만 둘 생각이 없습니다. 기본 요금 7000원.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편하다는 할아버지는 두 발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가위를 잡겠다고 합니다. “세월 보내는데 좋아. 시간이 빨리 가거든. 강태공이 낚시로 세월을 낚았다지? 나도 그래.”
이쯤해서 최 할아버지의 이름이 궁금하실겁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최 할아버지에겐 이름을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을 말할 수 없는 사정도 있습니다. 최할아버지가 이발사임이 알려지면 상처받게 될 사람이 있어서랍니다. 처음엔 기사조차 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두번, 세번 설득을 위해 찾아가 초고를 보여드렸을 때 할아버지 눈가에는 물기가 고였습니다. “난로 옆에 있으니까 콧물이 나네.” 화석같은 이발관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 모든 걸 다 말할 수 없음에 잠시 코가 먹먹해지셨나봅니다. 기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때 삐이익.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들어왔습니다. “여기가 그렇게 잘 자른다면서요? 저는 머리 자르러 대전까지 내려가는 사람이거든요.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아이고. 앞으론 대전까지 가실 필요 없으실겁니다. 이리 앉으세요.” 할아버지에게 또 한명의 단골이 생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