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공원의 바람은 김장고추처럼 매웠어. 나는 옷깃을 여미고 햇빛이 부챗살처럼 쫘악 펼쳐진 양지 쪽에서 그를 기다렸어. 아주 오래된 나의 연인 용주씨 말이야. 대학교 일학년때 부터였으니까 그를 안지 햇수로 칠 년째야. 안다는 것이 곧 사랑한다는 건 아닐테지만 그가 나의 삶의 울타리에 뛰어들어와 유행가 가사처럼 날 울리고 웃기고 한 건 꽤 됐어. - 왜 아직 안오지? 약속시간이 벌써 이십 분이 지났는데. 나는 달랑 투피스 차림이라 매서운 겨울바람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는 셈이야. 이 추운 겨울에 두툼한 스웨터나 오리털 파카로 단단히 무장할 일이지 웬 멋이냐구? 삼청공원 한가운데서 만나는데 그 모양으로 나왔으니 센스가 영 무디다고? 천만에, 센스가 통통 튀기 때문에 이렇게 입고 나온 거야. 코롤 핑크빛 투피스에 살짝 맨 실크 스카프, 아주 로맨틱한 옷차림이야. 사실 오늘 내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거야. "유경아, 우리 오늘 삼청공원에서 만나자." "왜 거기서 만나?" "그냥, 찻집은 답답할 거 같아서, 오늘 너한테 꼭 할 이야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그 이야기를 위해선 나무와 바람과 햇빛과 발 밑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필요해. 아 참, 시냇물은 안되겠다. 꽁꽁 얼었을테니까." 오늘 아침 용주 씨와 내가 통화한 내용이야.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나는 '야호'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방 안을 빙그르르 돌았어. 용주 씨가 내게 할 아주 중요한 이야기, 그게 뭔지 난 담박에 알아챘거든. 바로 나에게 프로포즈 하려는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가? "열녀 났다. 열녀 났어. 맞선 보래도 싫다고 하고, 너 지금 노처녀야, 이것아. 솔직히 용주 걔가 뭐 볼 거 있니? 눈도 작지, 키도 작지, 신발 문수도 작지. 거기다 돈주머니도 작지... 걔가 큰 게 뭐 있니?" 시집간 큰언니는 친정에 다니러 올 때마다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어. "언닌 몰라. 용주 씨 가슴이 얼마나 넓고 크다구... 태평양 저리 가라야. 거기다 나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크고 높은데." "옴마, 옴마, 얘 좀 봐..네가 지금 몇살인데 그런 한심한 소릴 하고 있는 거니? 모든 사물은 가슴, 사랑, 그런 추상적인 단어로 아리송하게 표현하는 게 아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거, 숫자로 셀 수 있는 것, 이런 확실한 걸로 측정하는 거야. 용주 걔 한 달 월급이 얼마니? 저금통장은 몇 개나 있니?" 깍쟁이 작은 언니 역시 내 편이 아니었어.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막내 남동생은 히죽거리며 나를 놀려댔어. "용주 형이 누나한테 질린 거 아니야? 아무리 맛있는 반찬도 맨날 먹어봐. 지겹지." "연인을 위해 밤새워 편지 한 장 써본 적 없고, 사랑 때문에 가슴저리게 울어보지 않은 네가 뭘 안다고 까부니? 사랑이란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물고기 같고, 암탉이 방금 낳은 달걀 같은 거야. 언제나, 늘, 항상 신선하고 따끈따끈하다 그 말이야." "그럼 왜 용주 형이 누나한테 결혼하자고 안 그래? 같이 보낸 세월이 얼만데. 죽을 때까지 친구처럼 지낼 거야?" 남동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맞아" 하는 듯 식구들의 시선이 나한테 꽂혔어. 아이고, 나는 이럴 때 할 말이 없는 거야. 나도 그점이 이상했거든. 그런데 드디어 오늘 용주 씨가 나한테 프로포즈를 하겠다니 내가 영하의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를 돋보이게 보일 빛깔 고운 투피스 차림으로 나옹 수밖에. 용주 씨도 분명히 양복 쫙 빼입고 나올 꺼야... 방송국 사진기자인 그는 늘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다르겠지. "유경아." 용주 씨가 손을 흔들며 나한테로 달려오고 있었더. "늦었지? 미안해." 그러나 내가 실망한 건 용주 씨가 약속시간보다 무려 삼십오 분이나 늦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옷차림 때문이야. 그는 여전히 작업복 차림에다 털목도리를 칭칭 감아 둘렀고, 털모자까지 덮어쓰고 있었어. 영락없이 친구하고 썰매타러 가는 개구쟁이 차림이야. 허긴, 옷차림이 무슨 소용이람. 알맹이가 중요하지. 하지만 알맹이 역시 나오지 않았어. 도무지 용주 씨는 달라진 게 없었어... 오히려 다른 날보다 말이 많았고, "감기 걸렸나봐" 하면서 아무 데서나 코를 팽팽 풀었고,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입가에 온통 묻혀가며 맛있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먹었고, 내가 춥다고 해서 들어간 찻집에서 기차 떠나기 전에 국수를 먹어치워야 되는 사람처럼 커피를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단번에 마셨어. 아, 도무지 우아한 프로포즈와는 거리가 먼 행동만 보일 뿐이었어.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다고 안했어?" 자존심을 지그시 누르고 참다 못해 내가 물었어. "무슨 말?" 어머나, 세상에. "왜 삼청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어?"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고 상냥한 표정으로 물었어. "아 그거? 커피값 좀 아끼려고." "그으래?" 내가 끝까지 참을 수 있었던 건 우리들이 함께 한 세월 때문이었어.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이 뭔지 그 때문이었어. "나 다시 방송국에 들어가 봐야 돼. 편집이 잘못 돼서 오늘밤 꼬박 새워야 해. 잘 가." 용주 씨는 나를 차갑고 어두운 밤거리에 홀로 내팽개쳐 두고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섰어.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거야. 더 못 참겠다. 아무리 사랑을 할 때면 검은 안경을 쓴 거 같이 눈에 뵈는 게 없다지만 이건 너무한다. 나는 입술을 앙 다물고 절교선언을 하리라 마음먹었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토큰을 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는 순간 뭐가 잡히는 게 있었어. 우선 토큰을 내고 빈 자리에 가서 앉았어. 주머니에 든 걸 꺼내보니 편지봉투가 반으로 접혀 있었어. 스커트에 내용물을 쏟아보니 십 원짜리 동전 네 개와 소금 약간,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어. 유경아, 아무래도 나는 말로 못 할 것 같애. 물론 노력은 해보겠지만 자신없어. 네가 들으면 까르르 웃겠지만 가슴이 떨려서 말이야.. 만일 말로 못하면 이걸로 대신하려고 준비해 갖고 나온 거야. 아무리 급해도 동전 넥 개 없으면 공중전화 못 걸고, 지상에서 제일 좋은 재료와 뚜이난 음식솜씨라도 소금 없으면 무슨 맛이니? 유경아, 너는 내게 동전 네 개와 소금 같은 존재야. 우리 같은 집에서 살자. 침대도 같이 쓰고, 아침밥도 같이 먹고, TV 도 같이 보고, 디게 행복할 거야. 순간 나는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아, 사랑은 정말로 따뜻해. 달걀처럼 호떡처럼 군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