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안경처럼 꼇다 벗었다 할 수 있을까?

까만신사 작성일 08.01.09 16: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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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안경처럼 꼈다 벗었다 할 수 있을까?


나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옷소매로 닦아가며 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어.
조금 있으면 남동생 형우가 들이닥칠 시간이야.
"누나, 신혼 재미가 어때? 내 친구들 중에 결혼한 녀석들이 제법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결혼에 대한 정의가 극과 극이야.
한 녀석은 결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한 녀석은 결혼이야말로 사랑을 가장 빨리 없애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꽂히는 윌리안 텔의 화살 같은 거라고 한단 말이야.
누나 사는 모습을 보고 결정을 내려야겠어.
결혼, 할것인가 말것인가.
그러니까 누나와 매형의 사는 모습이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잊지 말라구.
참, 또 잊지 말아야 될게 있어.
누나, 내가 해파리 냉채 좋아하는 것 알지?"
형우는 무대 위에서 독백하는 배우처럼 일방적으로 좔좔좔 말을 쏟아놓더니 쿡 전화를 끊었어.
나는 형우가 좋아하는 해파리냉채를 무치면서 결혼이란 절대 피할 수 없는 신이 만들어 놓은 각본이 아닐까? 생각했어.
나는 원래 운명을 믿지 않는 여자였어.
"다 팔자 소관이지 뭐."
나는 일이 뜻대로 안 될 때마다 그런 핑계를 대며 발뺌을 하려는 친구들을 향해 눈을 흘기곤 했어.
나는 운명은 흰 도화지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
자기의 의지대로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여백의 장.
그때마다 나는 스타트라인에 서 있을 때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곤 했어.
가장 멋진 그림을 그리리라.
그래서 운명론자인 친구 지현이한테 텔레비전 납량특집에 나올 만한 그 괴상한 얘기를 듣고도 픽픽 코웃음을 칠 수 있었어.
"어떤 가난한 청년이 있었어.
가난한 것 빼고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청년이었어.
그 청년에겐 역시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착한 여자가 있었고, 두 사람은 새끼 손가락 꼭꼭 걸어 장래를 약속한 시아였고 말이야.
그런데 운명이란 태풍 같은 거야.
예고도 없이 뒤통수를 치거든.
그 청년이 다니는 회사 사장딸이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
부유하게 자란 사장딸은 청년의 낡은 코트까지 매력적으로 느껴진 거지.
왜 그런 거있잖니?
자기가 소유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향수 같은거 말이야.
사장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매달리니까 그 청년을 불러 자기 딸과 결혼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지.
오, 예.
이건 완전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횡재지.
사장에게 자식이라곤 오직 그 딸 하나밖에 없는데 그 큰 회사가 청년 것이 되는 건 시간 문제지.
거기다 사장 딸은 아름다운 용모까지 지니고 있으니 청년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니?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은 풍요로운 식탁이 주는 기막힌 행복감을 매일 아침 풍요로운 식탁에 앉아본 사람보다 더 잘 알거든.
동물적인 육감, 본능으로 말이야.
본능처럼 정확한게 어디 있니?
그런데 목의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었던 거야.
바로 자신의 여자.
어제까지만 해도 소중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여자가 방해물로 등장한 거지.
청년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했지만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행운의 찬스를 어린 시절 놓친 풍선처럼 그대로 하늘로 날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기엔 청년은 그 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했거든.
안델센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따뜻한 실내를 바라보기만 한 거지.
청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자신이 동경하는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어.
그래서 여자를 살해하기로 맘 먹었어.
뭐라고? 그토록 사라한 여자를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얘, 사랑처럼 이기적인 감정이 어디 또 있는 줄 아니?
사랑할 때 우린 얼마나 행복하니?
만일 사랑할 때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콱콱 찌르는 것 같은 통증만 느낀다면 누가 사랑을 하겠니>
사랑이 우리에게 기막힌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우린 사랑하는 거야.
어머?
내 정신 좀 봐.
얘기가 빗나갔어. 어디까지 했니?
그래, 그 청년은 여자를 살해하기로 맘먹고 기회를 엿보았고 주스에 탈 독약도 준비했지.
그런데 도저히 자기를 향해 방긋방긋 미소짓는 천진스러운 여자를 죽일 수가 없었어.
또 여자가 살해 당했을 경우 당장 자기가 의심받을 건 뻔하고.
그렇다고 사장딸과 결혼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와 명예를 포기할 수는 더욱 없고.
환장할 노릇이지.
그런데 그때 마법사가 나타난 거야.
그 청년에게 타음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라고 일러준 거야.
그러니까 여자가 어렸을 때 죽여버리라는 거지.
그러면 의심도 받지 않고 손쉽다고 꼬득인 거야.
청년은 마법사가 구해온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갔어.
청년은 10세, 청년의 여자는 8세.
소년이 되어 버린 청년은 역시 소녀가 되어 버린 여자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았어.
어느 날 소녀가 혼자 강에서 배를 타고 있었지.
옳지 기회구나. 소년은 슬금슬금 강가로 다가갔어.
소년은 기가 막히게 수영을 잘했지만 소녀는 수영을 못했거든.
물 속에서 배를 뒤집어 버리려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강 건너 산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
석양 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 같았지.
소년은 '왜 이런 기분이 든담.'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기 시작했어.
그때 바람이 불더니 배가 뒤집혔고 소녀는 물에 빠져 허우적러렸어.
소년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럼 소녀는 죽을테고 자신은 살인자가 되지 않아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짧은 순간 요동치는 갈등을 느꼈지만 소년은 몸을 날려 강물로 뛰어 들었어.
결국 소녀를 죽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 소년은 소녀를 살리고 만 거지.
소년은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돌아와 청년이 되었어.
청년의 여자는 청년의 팔짱을 끼고 이런 말을 했지.
'어렸을 때 어떤 오빠가 물에 빠진 절 구해줘썽요.
아주 좋은 오빠였어요.
전 그때 생각했지요.
당신이 꼭 그 오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당신한테 잘 할게요.'
그때 청년은 결심했어. 내일 회사에 가서 사표를 내리라.
그 청년은 사랑을 택한 거지.
이게 바로 운명이야. 너 운명 앞에 붙는 수식어 중에 가장 어울리는 게 뭔지 아니?
거역할 수 없는 운명."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어.
지현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던 거야.
운명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외모처럼 타고 나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긴 거야.
그걸 내 주변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냉큼 결론 짓고 박수를 보냈고, 나 역시 운명이라는 것에 승복하고 만 사건이었어.
우리 회사에서는 매년 12월에 신입사원을 뽑았어.
우리부서인 홍보실에도 김용수라는 신입사원이 한 명 배치되었어.
용수 씨는 작은 키에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말수가 적은 남자였어.
"우리 홍보실에 처녀, 총각 한명인데 잘 해보라구.
잘되면 홍보실 경사 아니야? 원래 가까운 데서 찾아야 제대로 찾는 법이야.
잘 보이거든."
홍보실장이 농담처럼 얘기할 때마다 나는 작년에 먹은 떡국이 다 올라올 판이었어.
내가 처녀로 죽으면 죽었지 저런 위인하고.
아이고,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한마디로 용수 씨는 내가 꿈꾸는 백마 탄 왕자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는 거야.
내가 오렌지색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면 용수 씨는 오렌지색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거야.
내가 하늘색 투피스를 입고 출근하면 용수 씨는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츨근하는 거야.
"어? 두사람 짰어? 왜 매일 동시 패션이야? 수상한데?"
이런 식으로 홍보실 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나와 용수 씨는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어.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신토불이를 부르짖는 요즘 사회 분위기에 어울리게 혀꼬부라지는 팝송보다는 조용필의 노래를 무척 좋아해서 조용필의 디너쇼를 한번 가보는 게 꿈이었어.
하지만 호텔에서 하는 디너쇼가 얼마나 비싼지 나로서는 엄두를 낼수 없었어.
그런데 용수 씨가 조용필 디너쇼 티켓을 갖고 있는게 아니야?
"전 조용필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뜨거운 심장으로 부르는 노래거든요.
표가 두 장 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군요. 신 대리님 같이 가실래요?"
"마누라가 입덧이 심해서 일찍 들어가 봐야돼. 설진희 씨하고 같이 가지 그래."
갑자기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
"진희 씨가 어디 색동저고리 같은 유치한 가요를 좋아하겠습니까?
비발디나 모짜르트를 좋아할 것 같은데요."
용수 씨가 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어.
"아니에요. 저, 가요 좋아해요."
나와 용수 씨의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됐어.
나는 점점 용수 씨에게 끌리기 시작했어.
사람을 겉만 보고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용수 씨가 내 반쪽이라고 굳게 믿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입맛도 똑같으며 버릇도 똑같으며 취미도 똑같을 수 있을까?
나의 괴상한 취미, 가끔 구두를 벗어 들고 맨발로 잔디밭을 걸으면서 잔디의 까실까실한 감촉을 즐기는 것.
용수 씨 역시 그 괴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어.
어느 날 나는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 저녁준비를 하다가 그만 드거운 국을 쏟아 손등을 데었어.
그날 밤 용수 씨에게 전화가 왔어.
"혹시 무슨 일 없었어? 기분이 이상해. 진희에게 무슨 나쁜일이 생긱 거 같아."
이 기막힌 텔레파시. 나는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어.
"그게 다 천생연분이라는 거야.
두 사람은 부부가 될 운명을 타고난 거야."
동생 형우는 명쾌한 결론을 내려 주었어.
나와 용수 씨는 결혼을 했고, 나는 좋은 품성을 가진 남편으로 인해 행복해.
그리고 나 역시 운명론자가 되어 버렸어.

"딩동 딩동."
차임벨이 경쾌하게 울려썽.
형우가 온 모양이야.
내가 문을 열자 형우가 등뒤에 감춰 둔 장미다발을 불쑥 내밀었어.
"너도 여자를 즐겁게 해줄 줄 아는구나. 제법인데."
"누나, 난 여잘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콧대 높은 노처녀를 시집 보낼 줄도 안다고."
형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어.
"무슨 소리니? 누구 중매 섰니?"
"누나 행복하지?"
"그래, 왜?"
"이젠 고백해도 되겠지. 매형 말이야. 우리 서클 선배야.
내가 아주 존경하고 좋아하는 형이라구."
"그, 그래서?"
나는 다급하게 물었어.
"그 동안 내가 정보를 준거야.
문명의 이기, 저화를 이용해서 말이야."
"뭐, 뭐야?"
"누나, 너무 놀라지 마. 그런 좋은 남자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
운명? 그거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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