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아침.

노골적신사 작성일 08.12.16 10: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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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첫 번째 일요일

토요일 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들어와 아내가 들어오기 전에 저녁 준비를 한다.
말이 좋아 저녁 준비이지 내가 한 거라곤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얹어두고,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우리동네 최고의 치킨집에 전화를 걸어 프라이드 치킨을 한 마리 주문하고,
들어오는 길에 수퍼에서 사온 맥주를 냉장고 안에 넣어두는 일이 전부이다.
... 아 ... 그리고 또 한가지... 아내가 들어올 때까지 배에서 쪼로록 소리가 나도 밥 한 숟갈 퍼 먹지 않고 기다리는 아주 힘든 일도 한다.
아내가 들어오면서 밥을 해 놓았다는 나의 말에 기특하다며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준다.
치킨을 배달오신 통닭집 아저씨가 우리의 변태적(?) 장면을 목격하시곤 허허 웃으신다.
개걸스럽게 밥 한그릇씩과 통닭 한 마리를 뚝딱 해치운 아내와 나는 가위 바위 보로 설거지 할 사람을 정한다.
오늘은 내가 하겠다는 표시로 가위를 내었고, 아내는 하는 김에 끝까지 해 보라며 주먹을 내었다.
우리 부부는 귀찮은 일을 가위 바위 보로 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보자기"는 내지 않는다.
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가위"를 내고 하기 싫은 사람은 "바위"를 낸다.
대부분의 경우 아내는 알아서 가위를 내고 나는 습관적으로 바위를 내면서 게임은 끝이 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아내가 바위를 내는 날이면 나는 두세번 개겨 보다가 가위로 바꿔낸다.
내가 정말 하기 싫어서 계속 바위를 내면, 아내 역시 고집스럽게 바위를 내면서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나 ..(가위 바위 보)... 아무래도... (가위 바위 보)...시집 잘못 온 것 같아요 ...(가위 바위 보)"
그 한마디면 나는 더 이상 개기지 못하고 가위를 낸다.
그러면 아내는 언제 그런 슬픈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한마디 건낸다.

"흠... 쫄았죠 ..... ?"

그렇다. 나는 아내의 그 말(시집 잘못 온 것 같아요)에 언제나 쫀다.
결혼 전 ... 일곱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면서 ...
"만약 내가 너에게 시집 잘못 온 것 같다는 생각을 눈꼽만큼이라도 들게하면 그날로 혀 깨물고 자결하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했기에 ...
아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약속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명석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 똑똑한 아내가 이쁘다.

여하튼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아내는 소파에 늘어져서는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젼을 본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내 곁으로 가서는 하루종일 서 있어서 피로해져 있을 아내의 발을 주물어 준다.
이것도 결혼 전에 아내에게 한 약속이다...
이것 말고도 나는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벼라별 공약을 다 했었다.
그 공약사항은 A4용지(폰트10) 두 장에 인쇄되어 나의 손바닥 도장이 찍힌 채로 아내의 책상서랍 어디엔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나는 특별한 날(생일, 결혼기념일, 성탄절...등등)마다
그 노비문서(?)를 선물로 요구하지만,아내는 그것만은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라며 버티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심하게 아팠던 일이 있었다.
너무 아파서 밤이 깊어지도록 잠에 들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는데할머니께서 내 발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는 천천히 주물어 주셨다.
우리의 각종 토속신에게 우리 손주 잘 자게 해 달라는 기도를 자장가처럼 읊조리시면서...

신기하게도 나는 할머니의 품에 내 발이 올려지고 얼마 되지 않아 편하게 잠이 들었다.
그때의 할머니처럼, 나는 아내의 발을 나의 품에 안고는 발과 종아리를 부드럽게 맛사지 해 준다.
그러면 아내는 그때의 나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록새록 잠이든다.
아내를 안아서 침실로 옮긴다.
자는 척 하는 건지 완전히 골아 떨어진 건지...
그렇게 들었다 놓았다 해도 아내는 잘도 잔다.
아내 옆으로 조심스럽게 누워 팔을 아내의 머리 밑으로 집어넣는다.
아내는 잠결에도 몸을 돌려 내가 가장 편해하는 위치로 머리를 옮기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자동이다.

일요일 아침 ...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시간이 되어서야 창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못이긴 듯 눈을 뜬 나는예쁘게 튀어나온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아내를 깨운다.
공주처럼 살게 해 주겠다는 공약사항을 지킨 것이다....킬킬....
아직 잠이 들깬 아내와 나는 보송보송한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가 못내 아쉬워 미적미적 시간을 보내다가는 아내가 어제 일찍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못다 한 사랑을 나눈다.
대충 샤워를 하고 헐렁한 추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지금 산책도 하면서 동시에 밥을 먹으로 가는 길이다.
대학 때 항상 애용하던 밥집을 아직도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들른다.
(우리는 내가 다닌 학교 근처에 산다.)

"아줌마, 우리 밥 주세요."

대학 때와 달라진 점은 내가 무지 좋아하는 두 메뉴(삼치정식과 된장찌개)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둘이 되었으므로...
"밥 주세요"라는 한 마디 만으로 우리의 식탁에는 삼치정식과 된장찌개가 올려진다.
밥집 아줌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텔레비젼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아침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는 밥집을 나와 학교로 간다.
일요일 아침(?)이라 아직은 사람이 거의 없는 학교를 거닌다.
아내와 잡은 손을 애들처럼 떨래떨래 흔들면서...
상큼한 공기가 아내와 나의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온다.
내가 언제나 꿈꾸어 왔던 아침.
내가 만약 이 여자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면 나는 이런 아침을 맞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난 8년 동안 매일매일 꿈꾸어 왔던 아침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 바로 내 아내 와 함께 맞는 이런 아침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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