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혹한의 겨울에도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기타를 메고 다녔다.
영락없는 불량소녀였다.
구구단에 절절매던 초등학생 때부터 주특기는 꼴찌, 취미는 기타 치기.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쯧쯧.”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지.”
어른들의 근심 어린 눈빛이 편할 리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기를 꼴찌로 사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꼴찌라는 꼬리표는 청소년의 미래나 삶에 대한 파산 선고나 다름없다.
안타깝게도 참 많은 청소년이 이러한 속단에 넘어가, 자신의 재능과 삶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나는 오히려 공부를
더 열심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뭐래도 나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나만이 잘하는 것, 나다운 일을 찾아 기웃거렸다.
기타를 열심히 쳐 봤다. 나다웠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즐거웠다. 글씨 연습을 했다. 잘 썼다. 생각을 했다. 독특한 발상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성적으로 인정받는 곳만 제외하면, 그나마 기를 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같이 삶의 신대륙이 열렸다.
힘들 때마다 문학은 모성의 바다처럼 나를 따스하게 품어
주었다. 그 포근함이 정말 좋아서, 하지도 않던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국문학과에 자랑스럽게 입성했다.
지금 나는 40대 후반이다. 사실 요즘은 일이 너무 많다. 시인이자 작가고, 대학 선생이며 문학 치료사다. 라디오 방송에도 나간다.
십 대 내내 꼴찌였던 사람에게 가능한 이야기냐고 의아해할 수 있다. 감히 말하지만, 그런 청소년기를 거쳤기에 문학을 가지고 대중과 잘 소통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결핍이나 상처가 이렇게 멋진 삶의 주특기가 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 주특기는 자신에게만 주어진 삶의
선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선물을 잘만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이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멋진 삶의 때깔이 나온다.
그러니 제발 사소한 결핍이나 상처를 가지고 삶을 통째로 파산시키는 거인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만 허락된 삶의 선물을 폐기하지 말고, 나답게 하는 기적의 달란트를 찾아내자.
세상 전부가 나를 포기할지라도 자신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상처는 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