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마. 너 미국에 가면 나는 어떡해…….”
아내는 부부싸움 한 날이면 어김없이 잠꼬대합니다.
마음을 풀려고 해도 아내의 잠꼬대를 들으면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무슨 남자가 있었다고 그래?”
아내는 자신이 잠꼬대한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옛사랑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감정의 골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잠꼬대 내용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이었습니다.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아내와 같은 나이로, 조만간 미국 시카고로 유학 간다는 것과 학창 시절 주로 밤늦은 시간에 데이트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아내가 잠든 동안 과거를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휴대 전화를 열어 의심나는 번호가 있는지, 이메일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주고받은 편지가 있는지 확인해 봤습니다. 그러나 단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사람 같은데…….’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작은 방 책상으로 달려가 오래된 일기장을 찾아냈습니다. 아내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로,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쓴 일기였습니다. 아내의 추억과 사생활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지금까지 열어 보지 않았는데, 의심의 악마에 사로잡힌 나는 어느새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요. 나는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일기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펜팔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늦은 밤 아내 집 앞에서 잠깐만 나는 것이 우리의 건전한(?) 교제 원칙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연락처도 모른 채 살았지만 인연이었는지 다시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 꿈속에 등장한 동갑내기 남자는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사실 나는 유학을 간 적이 없습니다. 일기장을 보고서야 떠올랐지만, 당시 이유 모를 장난기가 발동해 2학년 때부터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아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놀리려고 한 말인데 아내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며칠에 걸쳐 내 유학 이야기를 일기장에 썼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헤어진 사실도 알았습니다.
부부싸움 한 날이면, 아내는 꿈속에서 고등학생인 나를 만나 마음의 상처를 달랬나 봅니다. 그것도 모른 채, 나는 아내를 의심했습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옹졸함, 그리고 아내를 향한 애틋함이 뒤섞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준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 주기 위해 내일부터는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아내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내도 유학 가지 말라던 순수한 여학생이 되어 나를 용서해 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