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귀신의 집 [단편]

잭바우어24 작성일 07.01.20 15: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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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아직도 멀었어? 너무 멀다."

고불고불한 산길을 거의 내려 왔을 때쯤 잔뜩 볼맨 목소리로 윤미가 내게
말했다.

"아니. 거의 다 와가. 훗... 모처럼 고향에 내려 오니까 기분이 묘한데?"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윤미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윤미는 여전히 화가
난 것처럼 땅바닥만 내려다 보며 내 뒤를 따라 올 뿐이었다. 나는 걷던 발
걸음을 멈춰서서 윤미를 기다리다가 내 곁에 지나칠 때쯤 와락 껴안으며
뽀뽀를 가볍게 하고는 귓속말로 얘기했다.

"우이구... 나이에 맞지 않게 투정을 부리다니. 다음달이면 부부 사이가 되
는데... 너, 결혼해서도 그렇게 애들처럼 굴거야?"

윤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살며시 밀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데 없이 고향에는 왜 가자는 거야? 더구나 오빠 고향
은 20년전에 댐건설로 수몰지역이 됐다면서..."
"바보... 그러니까 더 가보고 싶은 거야. 사람들은 누구나 신상에 커다란
변화가 오면 고향이 그리워 지는 법이고... 또 지금 내가 그렇잖아? 나중
에 태어날 내 귀여운 2세에게도 어차피 보여주어야 할 고향이고 하니..."

나는 한껏 다정스런 말투로 윤미를 달랬다. 윤미는 입을 삐쭉이 내밀었다.

"알았어. 미안해, 투정부려서. 하지만... 오빠 고향... 지금도 누가 살기는
하는 거야? 혹시 아무도 살지 않는 흉가들만 즐비하고... 강물만 넘실거리
는... 나, 그런 곳이면 무서워서 싫어."
"하. 하. 하. 걱정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일부분만 수몰됐으니 그 나머
지는 사람들이 살거라고. 걱정마."

나는 윤미의 등을 토닥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

"거봐. 내말이 맞지? 마을이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그렇
게까지 퇴락하지는 않았잖아?"

나는 어릴적 살던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윤미에게 보란 듯이 얘기했다. 하
지만 사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는 마을이 많이 퇴락해 있었다. 어릴적 다
녔던 초등학교야 수몰 지구였으니 그렇다 쳐도 제법 규모가 컸던 마을의
가옥들이 몰려 있던 곳까지 강물로 넘실거렸다. 그나마 마을 입구에 모여
있던 집들이랑 조금 떨어진 산중턱의 건물들만이 예전에 이곳에 마을이 있
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오빠. 그나저나 날이 벌써 어두워 지는데... 오늘 묵을 방부터 잡자. 응?"

나는 윤미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우선 방부터 잡으려고 했다. 버스나 기타
교통 수단이 공교로운 마을이었고 자칫하다가는 남의 집에서 새우잠 신세
를 질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애당초 화려한 여관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민박 집이나, 최소한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이 묵을 만한 곳은 있
을 줄 알았는데 마을 입구부터 띄엄띄엄 있는 집들은 한눈에도 일반 가정
집들 뿐이었다. 두리번 거리던 나는 근처 가게로 무작정 들어가 적당한 곳
을 물었다.

"저, 아주머니. 혹시 이 마을에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처음부터 잔뜩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던 가게 여주인은 생긴 것 만
큼이나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다.

"없수. 이 마을이 관광지도 아니고..."
"그건 아는 데요... 그래도 여기는 제가 태어난 고향이라... 하룻밤 묵고
싶어서요."

고향이라는 말을 들어서였는지 그 여주인은 그제서야 다소 누그러진 표정
으로 잠시 생각한 후 내게 말했다.

"흠... 한군데 있기는 한데... 그집 주인이 너무 괴팍스러워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있어요? 숙박료는 상관 않으니... 어딘데요?"

그 여주인은 손가락으로 산중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솔길 보이쇼? 거기로 한 10분 걸어 올라가면 사당이 있는데... 바
로 그 옆집이유."

나는 여주인의 손가락을 따라 잠시 쳐다 보다가 다소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 집이 아직 있어요? 말씀하신 곳이 혹시 예전에..."

어느새 곁에 윤미가 와 있는 것을 눈치채고 끝내 다 묻지 못하고 입을 다
물었다. 가게 여주인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훑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그 집'이라니? 예전부터 있던 집인가 보구만. 하지만 난 이 동네로 이사
온지 얼마 안돼서. 아무튼 그 집은 빈방이 많으니 한번 가보기나 하슈."
"예? 아... 예. 아무튼 감사합니다."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인사도 대충하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윤미는 내 행
동이 조금 이상한 것을 눈치 챘는지 곁에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오빠, 왜 그래? 뭐... 잘못된 거 있어?"
"아... 아니. 훗. 윤미야 오늘 묵을데가 있을 것 같다. 그쪽으로 가자."

나는 애써 웃음을 띠며 윤미의 손을 잡고 아까 가게 주인이 얘기하던 그
집으로 향했다.


"계세요? 누구 안계세요?"

산중턱에 위치한 그 집 대문에 서서 한참을 불러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윤미는 다시 기분이 언짢아 진 듯 집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이야, 건물 참 오래됐다. 생긴 건 별장 같은데... 다 쓰러져가도 3층집
이네?"

윤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삐꺽' 열리며 할머니 한 분이 힘
든 걸음을 옮기며 나왔다. 그 할머니의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허리도
몹시 굽어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 할머니. 방 있어요? 하루만 묵어 갈려고요."

할머니는 흐릿한 시선으로 나와 윤미를 번갈아 보다가 한참 후에 힘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걸걸한 쇳소리를 냈다.

"있긴... 있는데... 흠..."
"저... 숙박료는 상관하지 마시고요... 얼마든지 드릴테니..."

할머니는 물끄러미 윤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빠
둘 사이를 가로 막으며 다시 얘기했다.

"하루만 묵을 께요. 아까 저 아래 가게 주인의 말로는 이 동네에서 묵을 수
있는 곳이 여기 밖에는 없다고..."

할머니는 여전히 윤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할머니에게서 2층의 구석방을 얻어 들어온 후 대충 짐을 정리하고 방바닥
에 벌렁 드러 누웠다. 윤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은
한동안 바라 보다가 지나가는 말로 내게 말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밤하늘에 별들이 꽤 많이 보이네? 그나저나 오빠... 이
집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있던 거야? 낡은 걸 보니 아마 그랬을 것 같은데?"

나는 담배를 한대 꺼내 입에 문 채로 대답했다.

"응. 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가정집이 아니었어. 그냥 별장이었는데..."
"그래? 그렇다면 이 집 주인 꽤 부자였나보다. 그 당시에 3층 건물을 가지
고 있을 정도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모금 빤 후 윤미를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아니지, 재미있다기 보다는 좀 섬뜩
한..."

윤미는 뒤로 돌아 내게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나... 무서움 많이 타는 거 알잖아. 섬뜩한 얘기라면 하지마."
"아냐, 뭐 그렇게 무서운 얘기는 아니고...그냥 나 어릴적 있었던 얘기야."
"그렇다면야..."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윤미는 턱짓을 한번 가볍게 하고 얘기하라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도 대충 알겠지만 난 중학교 입학할 때쯤 이 마을에서 떠났잖아? 그 무렵
얘기인데... 사실 이 집은 그때 당시 흉가로 소문났던 곳이었어."
"뭐? 뭐라고?"

윤미가 내 품으로 안기며 조금 놀란 듯 물었다. 나는 윤미의 등을 두어번
두드려 주며 말을 계속했다.

"아니, 오빠. 그러면 아까부터 알고도 이런 집에 들어 오자고 한 거였어?
나... 그런 얘기 듣고 여기서 못 잔단 말이야."
"하. 하. 하. 괜찮아 옛날 일이니 끝까지 들어 보기나 해. 이 집은 원래 이
마을 국회의원의 별장이었어. 그래서 평소에는 이 집을 지키는 관리인 부부
만이 살고 있었지. 그 국회의원은 1년에 두, 세번 올까 말까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사건 하나가 일어 났는
데... 이 집의 관리인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거야. 조그만 동네라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모두들 관리인이 왜 없어졌는가에 관심이 몰렸
지. 그 중 제일 지배적인 의견은... 관리인의 부인이... 자기 남편을 어떻
게 했다는 얘기였는데...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동네에서 알아 주는 원수 지간이었거든? 매일같이
계속되는 부부 싸움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밤잠을 설칠 정도였지. 그래서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어. 저렇게 사이가 안 좋은데 왜 같이 살까
하고... 뭐 그거야 그들 부부만의 일이니... 상관없기도 했지만...

관리인이 사라지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은 쑥덕대기 시작한 거야. 대충 무슨 소
문이 퍼졌는지 알겠지? 부인이 남편을 죽이고... 어디다가 버렸다는 그런 내용
이었어. 처음에 부인은 마을 사람들의 의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심해지니까 못견뎌서였는지 그녀도
어느날인가부터 보이지 않더라고.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더욱 확신이
가고 있었지. 분명히 관리인 부인이 뭔가가 캥기는 게 있다고 말이야.
하여간 관리인 부인까지 없어져 버린 빈 별장에 당연하게도 새 관리인이
왔지.그는... 음... 어릴적 기억이라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체격만은
무척 컸다고 생각되. 당시 마을 사람들 보다 머리가 한 개정도 더 있었거든? 키도
크고 몸집도 거대한 설흔살 정도의 총각이었는데...

그가 온 지 삼일만에 바로 이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된 거야. 그것도 아무런
외상없이 몹시 뭐에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빤히 응시한 채로 누워서
말이야. 아마 심장마비 같은 거였나봐. 어쨌든... 그뒤로 이 집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지. 그렇게 건강해 보이는 청년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니 마을
사람들이 믿겠어? 분명 밤에 무슨 일이... 그러니까 귀신 같은 걸 보고 놀라
죽었다던가...

결국은 그 전 관리인의 부인이 남편을 죽이고 이 집 어딘가에 묻어 놨다는 둥
하여간 온갖 소문들이 또 무성하게 퍼지기 시작했지. 국회의원도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 체면 때문에 한동안 관리인을 이 집에 두지 않더라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 집은 점점 흉가로 변하고 말았지.

어릴 적이야... 이렇게 큰 빈집이 좋은 놀이터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나와
내 고향 친구들은 그런 귀신 얘기들을 즐기며 이곳에서 뛰어 놀곤 했지.
자, 이제부터 진짜 오싹한 얘기가 시작되는 거야. 그러던 어느날이었어..."

내 얘기를 큰 눈망울만 굴리며 듣고 있던 윤미는 조금 무서웠는지 침까지
꼴딱 삼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빠... 그만해. 무섭다고 했잖아?"
"에이... 바보... 무섭긴 뭐가 무서워? 다 옛날 얘기인데..."
"그래도..."

내 얘기가 계속되자 윤미는 나를 더욱 끌어 안으며 물기가 어린 촉촉한 얼
굴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흉가라고 소문만 무성하고... 사실 이 집에서 확실히 죽은 사람은 새로 온
관리인 한명 뿐이잖아? 마을 사람들 생각 속에만 확증도 없이 전 관리인이 죽은
거였으니.. 아무튼 그런데 한달 쯤 지난 뒤에 건장한 청년들이 이집으로 오게 됐지.
그들이 누군가 알고 보니.. 몇년 전부터 이 고장에 댐이 지어진다고 말이
나돌았었는데 바로 그 댐 건설 작업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 거였지.

이 집에 온 사람들은 댐 건설을 위해 사전 조사를 나온 사람들이었어. 딱히
이마을에 머무를 곳이 없던 그 사람들은 국회의원의 배려로 이 집에 묵게 된거
야. 물론 댐 건설에 이 집 주인인 국회의원도 주도적인 인물이었으니 당연하기도
했지.
그들이 여기서 머무르게 된 후 귀신 얘기는 한동안 주춤했어. 그들이 일주일 동안
머물러도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거든? 그런데... 정확히 열흘째가 되던 날...
그들 중 한명이 머리가 깨져 죽은 채로 강가 근처 갈대 숲에서 발견이 된거야.

작은 마을에 살인 사건이니 엄청난 구경거리기도 했지. 나도 학교가 파하기도 전에
친구들이랑 현장으로 달려가 구경을 했거든? 죽은 그 사람 시체를 처음 본 순간,
정말 충격이었어. 얼굴은 무엇에 놀란 듯 핏발선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었는데...
무척 힘이 센 사람이 무거운 둔기로 내려쳤는지 죽은 그의 머리는 반 정도 깨지고
찌그러져서 한쪽 눈알이 터져 나와 있었고 주위의 갈대들은검붉은 피로
흥건했는데...

경찰들이 이 집에 같이 묵던 사람들을 모두 하나씩 조사해 봤지만 범인은
찾지못했지. 그러는 동안 또 살인 사건이 벌어졌어. 이번에는 이 집 뒷꼍에 있는
낡은 창고였는데...
그 사람들 중 한명이 목에 밧줄이 감긴 채 천장에 매달려 죽은 거야. 물론 그는
자살할 이유도 없고... 또 자살했다면 죽을 때 그렇게 반항한 흔적을 남길리
없었겠지.

마을이 이젠 아예 난리가 났어. 범인도 못잡는 경찰들의 무능함을 욕했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예전 관리인들의 얘기가 겹쳐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지. 종국에는 여기서 묵던 나머지 사람들도 윗쪽 마을로 묵을 장소를
옮기고...
이 집에 죽은 사람들의 넋이 떠돈다는 귀신 소문 때문에... 그 뒤로 우리같이
철없는 어린 아이들도 이 집에서 노는 것이 끔찍했지. 괜히 등골이 오싹하잖
아?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어때 재미있지?"

나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윤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재미있다기 보다는 궁금하다. 그 사람들이 죽은 이유하며... 관리인들 얘기
도 그렇고..."

윤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지? 헌데, 나는 그 뒤 얼마 안돼 이사를 해서 이 집에 관한 얘기를더
알지 못하지. 서울로 이사간 후 한동안은 꽤나 궁금했었는데... 훗~"

나는 윤미의 볼을 가볍게 '툭, 툭' 치고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 보았다.

"우와... 밤공기가 참 시원하다. 역시... 고향은... 음... 어? 저거 뭐야?"

다소 놀란 내 목소리에 윤미가 방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오빠? 뭔데?"
"저... 저기..."

나는 손을 들어 창문에서 보이는 넘실대는 강물 쪽을 가리켰다. 강 주위에는 갈대가
빼빽히 자라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흰 물체가 왔다 갔다하는 것이었다.

"오... 빠... 저... 게 뭐야?"
"그... 글쎄..."

주위가 너무 어두워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한참동안 움직이던 그 흰물체
가 강에서 제일 가까운 갈대 숲에 멈추더니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안돼겠어. 나가서 확인해 봐야지."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방을 나서려고 하자 윤미가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지마. 나만 이곳에 놔두고 가면..."
"괜찮아. 금방 올께. 이, 방에 꼭 붙어 있어. 어디 나가지 말고..."

윤미가 두려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호기심에 재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뛰듯이 강물 주위에 갈대 숲으로 가보니 멀리서 볼때 그냥 희게만 보였던 그 물체가
사람이 쭈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잔뜩 긴장 한 채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희뿌연 달빛아래 보이는 그 사람은 나이가 쉰은
넘은 듯한 한 남자였다.

그는 갈대 숲에 앉아 멍청히 강물만 바라보며 미동도 않은 채 한숨만 길게
쉴 뿐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다소 안심이 되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 아저씨... 이 한밤중에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내 말을 들었는 지 못들었는 지 여전히 그 남자는 강물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돋우어 물었다.

"아저씨...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그제서야 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낯익은 그 남자의 얼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강물 속에... 내 아내가 있지. 내... 아내가..."
"예? 뭐라고요?"
"타지 사람인가? 아니면..."
"아... 예. 어릴적에 이 마을에서 살았었었죠. 오늘... 고향도 다시 볼 겸..
온 거고요. 그런데... 아까 무슨 말씀이세요? 아내... 라뇨?"

그 남자는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자네 어릴 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면... 저 집에서 일어난 귀신 얘기며...
살인 사건 얘기며... 다 알겠군. 훗..."

나는 그제서야 그 남자의 얼굴이 낯익은 이유를 알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관리인 부부의 남편... 바로 그였다.

"아저씨는 혹시..."
"훗... 알아 보는군. 자네는.. 혹시.. 빨간 벽돌 집 큰 손자... 형민이 맞지?"
"예? 아... 예... 아저씨는 저 별장을 관리 하셨던..."
"맞아. 바로... 내가... 별장 관리인 아저씨야. 잘 지냈어? 그동안?"

그동안의 일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 남자의 곁에 천천히 앉으며 물었다.

"아니.. 그럼... 돌아 가셨던게 아니었군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그때
그 일들이..."

그 남자는 내 얼굴을 아무 말없이 바라보다가 주름진 얼굴을 떨구며 말했다.

"왜? 궁금한가?"
"당연히... 궁금하죠."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멀리서 밤새의 구슬픈 지저귐만이
간혹 들려올 뿐... 이윽고 그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오늘 그때 얘기를 하면... 자네가 처음 듣는 셈이 되는군.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니요?"
"훗... 끝까지 내 얘기를 듣고 물어보게나."

나는 그 남자의 왠지 거역할 수 없는 말투에 기가 눌려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남자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어머니가 한 분 계시지. 젊었을 때 과부가 되고 홀로 나를 키워
주신... 그런데... 내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를 못했어. 불의의 사고로 남편
을 잃고 그 후로 조금씩 머리가 이상해 지시더니... 결국 내가 이 별장에
관리인으로 올 때쯤에는 완전히 미쳐버리셨거든?

내 아내도 그런 어머니를 달갑게 생각지 않았지. 나는 정신병원 같은 곳에
불쌍한 내 어머니를 모시는 게 싫었고... 결국 생각해 낸 것이 이 별장에
어머니를 모시는 거였지. 이곳은 공기도 좋고... 또 별장 주인도 일년에 한,
두번 올까 말까하는 곳이었으니... 나로서는 안성마춤인 곳이었거든?

하지만... 마을 사람들 귀에 그런 미친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 들어가는 건
싫었지. 폐쇄된 이 작은 마을에 미친 여자가 있다는 건... 그들의 낡은 사고
방식에 맞지 않은 거였으니 말이야. 그래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함부로
못 나다니시게... 지하실에 방 한칸을 마련해 거기 모셨지.

사실 어머니는 내가 결혼 후 병세가 더 심해 지셨어. 아마도 당신이 과부로
힘들게 키운 나를 아내에게 빼앗겼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 어머니의 미친 행동이 심해질수록 우리들의 부부 싸움은 더해갈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나는 둘다 버릴 수가 없었어. 불쌍한 어머니는 물론
그토록 사랑했던 내 아내도 말이야.

그러다가 또 한번 어머니 때문에 대판 싸운 어느날 나는 침울한 심정으로
가출을 했지.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
무것도 없더라고... 그렇게 한달 동안을 사라졌다가 어느날 밤 다시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없는 거야.

황급히 어머니를 찾았지. 아까도 말했듯이 평소에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
게 낮에는 지하실 방에 모셨었거든? 물론 방문을 밖에서 잠구었다가 밤에
는 윗층으로 모시곤 했는데...

어머니가 머무시는 지하실 방으로 가보니... 거기에 아내가 있는 거야. 피투
성이가 된 채... 죽어서 말이야. 며칠은 된 듯 꽤 썩어 있었는데... 그 곁에
는 어머니가 아내의 살을 뜯어 먹으며 히죽거리고 있었어. 난 거의 제정신
이 아니었지.

어머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다그쳐 물었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
냐고... 어머니는... 나를 알아본 듯 두 손을 꼭 잡으며 얘기하더군. '네가 하
도 안 보이기에 이 년이 너를 어떻게 한 줄 알고... 죽여버렸다' 고... 어이
가 없더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는지.

나는 서둘러 아내의 시신을 옮겼지. 잘못했다가는 어머니가 살인범으로 몰
려... 아니 그것보다 그 상황에 처하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마침 밤이었
으니 보는 사람도 없겠다 싶어 지금은 강물에 잠긴 저 물속 갈대 숲에 임
시로 묻었지.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겠지 생각하며 난 그길로 어머니를 모
시고 달아났던 거야.

그후 거의 매일 밤만 되면 이 마을에 몰래 들어와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지
나 않았을까 살펴봤지. 마음 속으로는... 불쌍하고도 불쌍한 아내였지만 현실은...
어쩔수 없었거든. 이미 아내는 죽은 후고... 내게는 어머니도 소중했
으니까."

그 남자의 얘기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더듬거렸다.

"세... 상에. 그럴수가... 그... 그러면... 그 뒤에 온 관리인과 또 댐 건설
관계자들은... 왜 죽은 거예요?"
"후우~ 새로온 관리인은... 내 아내 귀신을 봤는지... 훗~ 정말로 심장마비로
죽은 거고... 댐 건설 관계자들은..."
"관계자들은요?"
"내가... 죽였어."
"예? 아...니... 왜요?"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 났지만 그 남자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만 계속
했다.

"그날도 내 아내를 만나러 이곳에 왔지. 그런데... 그들이 댐 건설 때문에
아내의 시신이 있는 갈대 숲사이를 측량하고 다니는 거였어. 나는 다급했지.
저러다가 혹시라도 죽은 아내 시신이 발견되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내의 시체를
은닉한 나한테 까지...

그런데... 그날 밤, 술에 취해 갈대 숲에 산책을 나와 거닐던 그들 중 한명
이 아내의 시신을 발견한 거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숨이 막혀왔지.
어떻게 할까... 어떻게... 그런데...

마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엉겹결에 곁에 놓인 돌을 집어 달아나는 그의
머리통을 내려쳤지. 그리고는 다시 아내를 깊숙히 묻고는 도망갔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니... 어차피 귀신 소문이 퍼져있던 거... 한 명만 더
어떻게 하면... 그들이 그 별장을 떠날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 남자는 점점 흥분이 되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러면... 별장 창고에서 목맨 채 죽은 사람도... 아저씨가...?"

그 남자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의 어머니와
같이 그 남자도 점점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서글픈 얼굴이 되어 씨익 웃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자세히 하는지 몹시 궁금하겠구만."
"예... 당연하죠. 그렇게 감추던 일을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난... 조만간 아내 곁으로 갈거거든? 얼마전에야 알았어. 내가...몹쓸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시한부 인생이야. 훗... 우습지? 지금껏 나는 이름도
바꾸고 숨어지내며 돈을 모아... 두달 전에야 간신히 폐허가 되다시피한 저
별장을 샀는데...

이유야 간단하지. 아내가 바로 집앞 강물 속에 잠들어 있으니 매일같이 볼 수 있어
좋고 또 어머니의 정신병 치료에도 좋은 곳이니... 이제서야 겨우 안정을찾고
행복하다 싶었는데.... 두달밖에 못 산다니... 흑흑흑..."
"예? 아... 아니... 그러면... 저 별장의 할머니가... 서... 설마..."

내 머리는 망치로 세차게 얻어 맞은 듯 윙윙거렸다. 불길한 예감에, 흐느끼
는 그 남자를 뒤로 한 채 황급히 별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급히 별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윤... 미야. 윤미야."

그때 이층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저녁에 본 그 할머니가 온 몸
에 피를 흠뻑 묻힌 채 무엇을 씹고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걸어 내려
오더니입가에 묻은 검붉은 피를 '쓰윽' 닦고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얘기했다.

"얘야... 이제 오니? 네가 하도 안 보이기에 저 년이 너를 어떻게 한 줄 알
고... 죽여버렸다. 저년... 아주 독한 년이지? 그치? 흘흘흘..."
"아... 안돼... 세... 세상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내 뒤에는... 어느새 왔는지...횡한
눈빛을 한 아까 그 남자가 커다란 돌을 높이 쳐든 채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출처-호러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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