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가이야기 4-(2)

0225 작성일 07.06.29 14: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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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의 마을(3)

족히 백년은 더 되었을성 싶은 검게 불에 그을린 그 흉물스런 집을 아직
까지 철거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궁금할 만큼 집은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 듯 위태하게 보였다.

집 뒤쪽으로 울창한 산이 바싹 붙어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들이 발디딜 톰
도 없이 자라 있었다.

다른 스텝들이 서둘러 마당으로 들어서서 짐을 풀고 촬영 준비에 분주 했
지만 오직 김감독만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 선뜻 내키질 않는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때면 자신은 항상 그 징후를 느낄 수 있
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5년전 촬영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며, 3년전 산악등반 촬영
을 갔다가 조난 사고로 두명이 목숨을 잃은 일이며, 바로 작년에는 자신
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까지 번번히 어떤 예감을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스텝들은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지금껏 수 많은 흉가를 가
보았고 또한 그 곳에서 밤을 지새며 촬영을 했었기 때문에 이 곳이라고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진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무속 전문가인 오세창과 이정란은 집의 어떤 기운을 알아 보려는 듯
나름대로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해일은 그들에게도 일부러 테잎에 대한 것이나 이곳에서 일어난 살인사
건, 또는 김한수나 이창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귀뜸하지 않았다.

주위는 이미 칠흙같은 어둠으로 덮히기 시작했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해일은 집안을 구석 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
져 내릴 것 같은 집인데 용케 버티고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볼 때 보다 집안은 훨씬 넓었다. 방은 총 열 한개가 있었고 부엌
과 그 옆으로 넓직한 광이 딸려 있었다.

각 방안에는 먼지와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맨 끝방 한쪽 구석
엔 어떤 짐승이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듯 가운데가 움푹하게 패인 나뭇가
지들이 수복하게 쌓여 있었다.

집안에서 해일이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부엌 옆에 딸려 있는 광이
었다. 한쪽 문짝이 무너져 내려 비스듬하게 달린 그 곳은 바로 테잎 속에
서 짐승의 귀가 시퍼런 광채를 내뿜고 있던 바로 그 곳이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해일이 살짝 문을 밀치자 삐걱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무슨 냄새인지 모를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찔러 왔다. 해일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어디선가 싸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렌턴의 불빛을 구석 구석에 비추며 안을 살폈다. 바닥엔 썩어버린 짚더미
가 어지럽게 깔려 있었고 구석엔 주인을 잃은 농기구들이 붉게 녹이 슨
채로 아직도 아무렇게나 굴러 다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주위에 벽들이 온통 붉은 적토(赤土)로 발라져 있
다는 것이었다. 렌턴 불빛에 비친 벽은 마치 피 빛으로 덮인 토굴 속이라
도 들어와 있는 듯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김익재 촬영감독은 대청마루에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곤혹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보 박희철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것은 김감독
이 그런 표정을 지을때 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누구
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나 김감독은 대답 대신 먼저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곤 엉뚱한
얘기로 입을 열었다.

"얌마, 너 나보고 맨날 신기(神技)가 좀 있다고 했지? 않 좋은 일만 귀신
같이 맞춘다고...."

"예, 그랬었죠"

"근데, 바로 그 신기가 별로 조짐이 않좋다. 웬지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아까 이 집에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가슴이철렁하고 내려 앉지 뭐냐. 난
말야 평소 내 목숨은 조상님들이 지켜준다고 믿는 사람인데 꼭 내 조상님
들이 이 집안에서 빨리 나가라고 호통을 치시는 것 같더란 말이다"

"그.... 그럼, 어쩌죠? 감독님 그런 얘기할때 마다 제 가슴은 더 크게 철렁
한다니까요. 그때마다 아주 않 좋은 일이 생겼잖아요"

"젠장, 웬지 이번 촬영은 처음부터 내키지가 않더라구. 특히 그 창수놈 얘
기 듣고부턴 더더욱....."

"네?"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촬영 왔으니까 딴 생각 말고 일이나 하자구"

강은영은 집안 구석 구석을 둘러보며 쉴새없이 카메라의셔터를 눌러댔고
그때마다 어둠속에서 눈이 부실만큼 밝은 불빛이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사
라졌다.

배영환은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쭉 그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배
영환의 온 신경은 오직 스틸 사진 기사 강은영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그
녀를 처음 만난 것은 벌써 2년전의 일이었다.

어찌보면 자유분방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전형적인 현대여성의 조건
을 두루 갖춘 강은영을 처음 본 순간 배영환은 밑도 끝도 없는 묘한 질투
심을 느꼈다.

그는 강은영에 비하면 여전히 19세말의 조선시대에나 맞을 법한 사고와
생활방식을 가진 사내였다. 강은영의 주변에는 언제나 젊고 활기 찬 남자
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고개를 한껏 제처가며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
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몸을 기대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했다.
배영환은 그런 그녀가 웬지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에게 특별히 밉게 보일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
는데. 자연 그녀 앞에서 배영환의 심사는 뒤틀릴 수 밖에 없었고 둘은 만
나기만 하면 툭닥거렸다.

배영환은 처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이유없는 미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바로 흔히 남들이 말하는 사랑이
라는 치명적인 질병임을 알아차리고 그는 몹시 당황했고 극구 자신을 부
인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을만큼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투덜거리기만 할 순 없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여동안 미움이라고 여겨왔던 자신의 감정을 한순간에 사랑이라
고 그녀에게 드러내기에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말과 행동은 번번히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삐져나왔다. 어둠속에서 한참을 셔터를 눌러대던 강은영이 손을 멈추고
돌아섰다.

"배선배, 언제까지 제 뒤만 쫓아 다닐 거예요?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요? 아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그녀의 갑작스런 공격에 배영환은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듯
당황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또다시 후회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착각하지마, 내가 뭐 널 좋아하기라도 해서 따라다니는줄 알아? 아까 정
PD가 나한테 붙어 다니라고 그러더라. 집도 으시시한데 괜히 헛것보고
기절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깐!"

"이봐요, 배선배, 제가보기엔 선배가 더 으시시 하네요. 거, 얼굴 밑에 렌
턴 좀 치우고 얘기할 수 없어요?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론데 거기 그렇게
귀신 같은 얼굴로 따라 다니니까 더 신경이 쓰이잖아요"

강은영이 핀잔주듯 한마디 쏘아 붙이고 다음 방으로 건너가자 배영환은
맥이 빠지는듯 렌턴을 한대 후려치곤 중얼거렸다.

"젠장, 별게 다 훼방을 놓는다니깐!"


4.. 죽음의 마을(4)

해일이 광에서 나와 대청마루까지 뛰어가는 사이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
의 시퍼런 섬광과 함께 엄청난 천둥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산중에서 듣는
천둥소리는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절로 서늘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청마루까지 뛰어가는 단 몇 초간 해일의 온몸은 순식간에 흠뻑 젖어 버
렸다. 대청마루엔 김감독과 박희철이 렌턴 불빛에 의지해 장비를 점검하
고 있었다.

"김감독님, 카메라를 이쪽 광에다 셋팅해 주셔야 겠는데요?"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요. 그건 그렇고 광에는 뭐 이상한거 없어요?"

"예, 지금봐선 별로 특별한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동안 해 왔던대로
전체적인 스케치부터 해주세요. 그리고 포인트를 잡아서 집중적으로 좀
잡아 주시고.... 근데 다른 스텝들은 다들 어디 갔죠?"

그때 어둠속에서 스크립터 김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PD님, 이리 좀 와 보세요"

김혜진은 이영우, 그리고 기공 전문가 오세창, 무속인 이정란과 함께 왼편
끝방에 있었다. 오세창은 손에 나침반 같은 쇠붙이를 들고 집 주변의 수
맥(水脈)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이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곳은 집이 들어설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집은 호수에 떠 있는 것
과 마찬가지 형상을 하고 있어요"

"호수에 집이 떠 있다구요?"

"네, 대부분의 흉가나 터가 좋지 않은 집을 가 보면 흔히 물이 흐르는 위
에 집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수맥이 인체
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사람이 기(氣)를 제대로 펴고 살기가 힘들죠.
그래서 병에도 걸리고 마음이 심약해져 헛것을 보기도 하는데 이곳은 물
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넓이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
의 물이 이 집터 아래에 가득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집이라면 아마
그동안 액운이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엔 이정란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긴장되고 상기되어 있
었다.

"저기를 좀 보세요"

그녀는 렌턴으로 방문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거기엔 대나무 가지가
기묘한 모양으로 꽂혀 있었다.

"대나무 아닙니까?"

"그래요, 대나무죠. 저건 귀신을 쫓을때 주로 사용하던 비법입니다. 그 뿐
이 아닙니다. 이 집안 전체가 온통 귀신을 쫓기 위한 비방들로 가득합니
다. 대청마루 쪽에 다듬이 돌을 엎어 놓은 것 하며, 광에 적토로 벽을 발
라 놓은 것, 그리고 이리 나와 보세요"

그녀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해일을 방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는
렌턴을 빗줄기가 내리치는 마당에 비추었다.

"저기 마당에 흥건한 물들이 보이죠? 모두 붉은색이예요"

"그럼, 마당의 흙들도 광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적토란 말입니까?"

"그래요, 마당의 흙도 광과 마찬가지로 온통 적토로 되어 있어요. 예전부
터 귀신을 쫓기 위한 대표적인 비방이 대문에 피를 칠하거나 아니면 저렇
게 적토를 발라 놓는 것인데 이 집은 온통 적토로 가득 차 있어요. 그리
고 이 집이 온통 검게 그을린 것도 제가 보기엔 단순한 화재때문이 아닙
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계속되는 이정란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이 집안엔 온통 악한 기운이 가득해요. 집안 전체가 악귀들로 둘러 쌓인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험한 곳을 많이 다녔지만 이번처럼 기운이 강
한 곳은 처음이예요. 이따 자정이 지나면 제가 이 집안에 있는 귀신들을
한번 불러내 보도록 하죠. 도대체 이 집안에 가득한 귀신들이 어떤 원귀
들인지"

이정란은 그 어느 때보다 힘주어 말했고 해일은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흉
가에 가지 말라던 김한수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때 어둠속에서 또 하나의 렌턴 불빛이 더듬거리며 일행들을 향해 다가
왔다. 배영환과 강은영이었다. 배영환이 말했다.

"이거 도대체 전기가 없으니까 여간 불편한게 아닌데요? 정PD님 카메라
를 어디에 셋팅하죠?"

"적외선 카메라는 저기 마당쪽에 좀 셋팅해 주세요?"

그러자 배영환이 무슨 소리냐는듯 마당쪽으로 렌턴을 비추었다. 앞도 제
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마당에는 아무
리 살펴도 카메라와 몸을 숨길만한 엄페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 저 마당에 카메라를 셋팅하란 말씀이세요?"

"좀 무리긴 하겠지만 그렇게 좀 해주세요. 마당쪽에서 이 집안 전경과 내
부를 잡아 주셔야 합니다"

"우와 난 죽었네. 저런 빗속에선 우의를 입어도 아무 소용 없는데...."

배영환은 울상을 지으며 렌턴으로 연신 마당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그런
데 렌턴을 비추던 배영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 저게 뭐죠?"

모두의 시선이 배영환이 가리키는 마당으로 쏠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내리쏟는 빗줄기 속에서 분명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긴
장한채 그 곳을 주시했다.

어둠속인데다 비까지 퍼부어서 렌턴 불빛만으로는 언뜻 무엇인지 쉽게 분
간하기 어려웠다. 잠시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영우가 먼저 소리
쳤다.

"사..... 사람 아니예요?"

"뭐, 사람?"

이영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그만 우산으로 가까스로 비를 피하며 마당
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모두 세명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마당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이쪽을 노려보며 유령처
럼 꼼짝않고 서 있었다.

"저 사람들 뭐하는거야? 우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본데?"

이영우의 말에 이정란이 덧붙였다.

"우리한테 별로 좋은 얘길하러 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배영환이 소리쳤다.

"거기 누구요? 무슨 일이요?"

그러나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예상대로 다가온 그들은 모두 나이가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
들이었고 하나같이 얼굴에 핏기라곤 없어 보이는 창백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불빛에 드러난 그들의 얼굴엔 이유를 짐작키 어려운 적개심까지
드러나 있었다. 노인들은 대청마루 바로 밑에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스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을때 노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얘기
였다.

"당장 여기서들 나가!"

스텝들이 모두 노인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질 못해 어리둥절 하는 사이 노
인의 두번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두번째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크고 분명했다.

"여기서들 당장 나가라니까!"

4.. 죽음의 마을(5)

구반장은 혜경에게 호되게 당한 그날 이후 혜경이 하는 일에 거의 간섭하
지 않았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법도 없었
다.

구반장의 그런 태도가 혜경에게 다소 부담이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 해결이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한 두사람의 보이지 않는 신
경전 사이에서 오히려 가장 불편한 사람은 바로 박호철 순경이었다.

하루종일 두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그가 크게 기지개를 키곤 자리에서 일
어나며 말했다.

"그만 퇴근들 않하세요?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러나 두사람중 누구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이 없자 그는
머쓱하게 창문을 내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징그럽게 오는구만. 비가 이런 식으로 몇 일만 더 내리면 우리 군
은 아주 물바다가 되겠는데요? 아참, 그나저나 오늘 서울에서 방송국 다
큐맨터리 제작팀이 목촌리 332번지에서 무슨 촬영을 한다고 하던데 비가
이렇게 와서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자 그의 말에 혜경과 구반장 두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반장이었다.

"이봐, 박순경, 방금 뭐라고 했어?"

뜻하지 않은 구반장의 반문에 박호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 슨 소리요?"

"방금 무슨 다큐맨터리팀이 어쩌고 그랬잖아!"

"아...예, 그 얘기요? 아까 낮에 행정과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서울에서
온 방송국 사람들이 오늘밤 이번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332번지에서 촬영
을 하기 위해 허가를 내달라고 해서 내 주었다고. 뭐라더라? 그 곳에 귀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힌데나? 하여간 방송 만드는 놈들......"

그러나 박호철의 얘기는 더이상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구반장이 갑자
기 책상을 내리치며 소릴 질렀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박호철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구반장
이 다시 소리쳤다.

"이런 미친놈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모두 몇 명이래?"

"그.... 그건 잘....."

박호철의 말에 구반장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
하게 굳어졌다. 돌연한 구반장의 행동에 어리둥절 하기로 치자면 박호철
보단 혜경쪽이 더 했다.

다큐맨터리 팀이 332번지에서 촬영을 한다는 박호철의 얘기를 듣고 놀란
것은 오히려 혜경이었다.

아직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곳을 취재했던 기자
들이 모두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만 해도 이번 살인사건 취재를 했던 기자와 카메라맨이 모두 같
은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시경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녀였다.

그런데 구반장이 저렇게 펄쩍 뛰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
는 일이었다. 332번지 일이라면 무조건 빠지려고만 하던 구반장이 아니던
가. 그녀는 구반장의 진의를 파악하려는듯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이 곳 H군에 배치를 받은 이후 처음 보는 구
반장의 모습이기도 했다. 갑자기 구반장이 소리쳤다.

"지금 출동할 수 있는 인원이 우리 셋 뿐인가?"

박호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는 다시 실내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시종 손을 마주 비벼대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질 못하던 구반장이 마침내 어떤 결심이 선 듯 박호철과 혜경
을 보곤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혜경은 지금 그의 표정이 몹시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 다 당장 나하고 같이 목촌리로 출동할 준비해. 그리고 무기고에
서 M16 소총, 권총, 실탄.... 또 뭐가 있지? 하옇튼 있는대로 모두 챙겨,
어서!"

구반장의 말에 혜경과 박호철 두사람은 동시에 놀라서 입을 벌였다.

"네? 반장님 방금...."

"내말 안들려? 어서 서두르란 말야, 시간이 없어! 어서!"

갑자기 목촌리로 출동하자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데 무기까지 챙
기라니. 혜경은 구반장이 지금 어떻게 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였다. 그러나 구반장의 표정은 긴지하고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구반장의 지시대로 세사람이 무기를 챙겨 목촌리로 출발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세사람 모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한 자루씩 차
고 있었고 구반장은 M16 소총까지 곧추세워 들고 있었다.

박호철은 운전하는데 여간 애를 먹는 눈치가 아니었다. 칠흙같은 어둠에
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때문에 승용차의 시야는 불과 10미터도 채 되
지 않았다. 윈도 부러쉬를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빗물을 감당하진 못했다.

차안에서 구반장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은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호철이 운전을 하며 연신 룸미러로 구반장의 안색을 살피곤 혜경과 눈
이 마추졌지만 영문을 모르긴 두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을 먼
저 깨뜨린 것은 혜경이었다.

"저기, 반장님! 저희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나 알고 가야죠. 이렇게 무작정
갈 순 없잖아요"

그러나 구반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한 혜경
이 다시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구반장이 눈을 떴다.

"윤형사, 332번지 흉가에 대한 수사는 잘 진행되나?"

"네?"

"수사에 진전이 있냐고...."

"뭐, 아직은..... 하지만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내긴 했어요. 그 흉가를 중심
으로한 목촌리 마을의 내력에 대한 것들인데....."

"그럼, 이번 같은 살인사건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알아냈겠구만!"

"그럼, 반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윤형사는 귀신의 존재를 믿어?"

"귀.... 귀신요?"

"그래, 귀신!"

"그.... 글쎄요"

"우린 지금 귀신과 싸우러 가는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혜경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틀림
없는 구반장이었지만 그의 눈은 평소 그의 눈빛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광기와 형언키 어려운 공포, 그리고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그런 것들이 그의 눈엔 진하게 베어 있었다.

혜경은 지금 구반장의 눈빛과 비슷한 눈빛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것을 기
억해 냈다. 그건 바로 목촌리 주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눈빛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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