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편회의 "조선사"가 식민사관에 입각한 책이 아니다??

쿨인생 작성일 07.10.15 19: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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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와 같이 여름님과 김형수님, 그리고 shaw님과 백승길님의 논쟁을 보고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제목과 같이 의도된 편집이 식민 사관이 들어있지 않다는 승길님과 shaw님의 말은 좀 문제가 많아 보이는군요..

 

뭐 다른것 비교 하지 않겠습니다.

 

아래 글을 읽고 얘기 좀 해주세요..

 

전 이 백과사전이 가지는 권위나 학문적 성과가 shaw님과 백승길님의  권위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만약 아래 글들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거기에 해당하는 합당한 증거를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

- 두산 백과대사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조선사가 식민사관에 바탕했다는 명백하게 나와있죠?? 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백과사전을 참조할수 밖에 없는데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 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일본·한국의 학자 몇 명을 위원 또는 고문으로 하였다. 1923년 사료수집·편찬방법 등을 심의하고, 방침에 따라 《조선사》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보다 완벽을 기하고 권위있는 기관을 설치할 필요를 느껴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었다. 이 회는 회장·고문·위원·간사로 조직하고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어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 37책,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내용들로서 한국인을 우민화(愚民化)하고 자기비하시키는 등 역사의식이 왜곡된 악서였다. 조선사편수회는 광복 후 자연 해체되었다."

- 야후 백과대사전입니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27년 동안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1].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는 데 평이 일치하고 있다."

-위키 백과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 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일본·한국의 학자 몇 명을 위원 또는 고문으로 하였다. 1923년 사료수집·편찬방법 등을 심의하고, 방침에 따라 《조선사》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보다 완벽을 기하고 권위있는 기관을 설치할 필요를 느껴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었다. 이 회는 회장·고문·위원·간사로 조직하고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어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 37책,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내용들로서 한국인을 우민화(愚民化)하고 자기비하시키는 등 역사의식이 왜곡된 악서였다. 조선사편수회는 광복 후 자연 해체되었다."

-파란 백과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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