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직전, 루돌프 헤스가 영국(스코틀랜드)으로 간 의문의 망명 사건
루돌프 헤스 (rudolph hess, 1894-1987)
히틀러와의 만남
루돌프 헤스는 1894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상인 프란츠 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츠는 당시 많은 재외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생 독일제국에 더 없는 애착을 가진 애국자였다. 그의 엄한 훈육을 받으며 루돌프도 애국자로 자라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돌프 헤스는 자원입대했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전우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처음부터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고, 곧 가장 훌륭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수많은 정찰수색과 돌격을 위해 자원병을 찾을 때면, 항상 그가 그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공격 시에는 냉철함과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모범이 되었다."
사병으로 입대한 헤스는 전쟁이 끝날 무렵 중위가 되어 있었다. 전쟁 말기 그의 중대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하사가 한 명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기른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루돌프 헤스와 아돌프 히틀러.
전쟁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 패전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로 괴로워하며, 공산주의자들의 발호와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분노하고 있던 헤스는 ‘민족의 재생(再生)’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의 모임에 가담했다. 바로 독일노동당(후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으로 개칭)이었다.
1920년 5월의 어느 날 밤, 담배 연기 자욱한 뮌헨의 한 맥주홀에서 헤스는 한 ‘화가’의 연설을 들었다. 가르마를 타고 콧수염을 기른 그 연사는 “베르사이유 조약은 전선(戰線)에서 용전분투하고 있던 장병들에 대한 ‘문민정부’의 배신이며, 그 배신을 조종한 것은 유대인”이라고 절규했다.
1920년 5월, 맥주홀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그 ‘화가’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날 이후 헤스는 히틀러의 영원한 충복이 되었다. 1923년 뮌헨 쿠데타 미수사건 후 란즈베르크 감옥에 수감된 히틀러가 구술(口述)하는 「나의 투쟁」을 받아 쓴 것도 바로 헤스였다.
나치정권의 3인자
히틀러의 개인비서가 된 헤스는 구스타프 슈트라서의 좌익 추종자들이 탈당(1932)한 뒤, 권한이 중앙에 집중된 새로운 당조직을 창설하는 일을 맡았다.
1933년 1월, 드디어 히틀러가 집권했다. 이후 헤스는 무임소장관 겸 나치당 총통대리(부당수, 혹은 관방장으로 번역되기도 함)가 됐다. 히틀러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내 첫 번째 후계자가 될 사람은 괴링(공군사령관, 제국元帥) 동지다.
괴링동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다음 후계자는 헤스 동지다”라고 공언했다. 나치 제3제국의 제3인자가 된 것이다.
명실공히 나치의 제 3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
헤스는 내성적이고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치정권의 주요의사결정 과정에서 겉도는 존재였고, 그의 역할은 대개 의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나치 지도부 내에서 드물게 겸손하고 친절하며 청렴결백한 인물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다.
그는 드물게 인간미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히틀러가 군사문제와 외교정책에 몰두하고 있던 1930년대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헤스의 권력은 차츰 줄어들었고, 마르틴 보르만을 비롯한 나치 고위지도자들은 그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군이 전유럽을 휩쓸고 있던 1941년 봄 헤스는 극적인 일격으로 독일과 영국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전투를 끝냄으로써 차츰 쇠퇴하고 있는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왼쪽이 마르틴 보르만, 다음이 루돌프 헤스와 로베르트 레이.
1941년 5월10일, 헤스는 독일 공군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 영국 관헌에게 체포된 그는 자신이 독일과 영국간의 평화교섭을 벌이기 위해 온 밀사라고 주장했다.
그가 가지고 온 평화교섭 제안이란, 영국의 현상태를 존중하고 영국이 갖고 있던 식민지를 모두 돌려주기로 약속하는 대신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자유재량권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요구였다.
루돌프 헤스가 타고왔던 비행기 잔해를 수거하는 모습(1941년).
헤스는 낙하산을 타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으며 빈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러나 헤스는 자신이 독일정부의 사절임을 입증할 어떠한 증빙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정신상태마저 불안정해 보였다. 항전(抗戰)의 의지에 불타던 영국의 처칠 정부는 헤스의 제안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를 고위급 전쟁포로로 간주해 감옥에 수감해 버렸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억류했다.
헤스의 영국행에 경악한 나치정권도 그를 정신병자라고 발표했다. 히틀러도 헤스의 돈 키호테 같은 행동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헤스가 평화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영국의 감옥에서 끌려나온 헤스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됐다. 최후진술에서 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정에서 진술하는 루돌프 헤스.
“우리 민족이 수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아들 밑에서 나의 수많은 날들을 바칠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소. 내가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대한 기억을 없애려 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소. 언젠가 나는 영원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서 나 자신을 변호할 것이오. 나는 내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소."
이 나치 확신범에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헤스는 슈판다우 전범교도소에 수감됐다.
슈판다우 감옥.
감옥에서 보낸 46년
세월이 흐르면서 함께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됐던 전범들은 하나 둘 석방됐다.
1966년 헤스는 슈판다우 교도소의 유일한 수인(囚人)이 됐다. 헤스의 가족들의 탄원을 받은 서독정부는 몇 번인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헤스의 석방을 전승(戰勝) 4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요청했지만, 소련의 거부로 번번이 무산됐다.
헤스라는 한 사람의 죄수를 위해 전승4대국에서 파견된 수십 명의 교도소 직원들이 한 해에 수백만 달러를 써 가며 슈판다우 교도소를 운영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승국들이 감옥경비병으로 배치한 교도관들의 근무교대식.
말년의 헤스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마도 고독이었으리라. 1987년 8월17일, 헤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것도 아마 고독이었을 것이다.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41년, 1941년부터 시작하면 46년간에 걸친 기나긴 수형(受刑)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스판다우 감옥의 규칙에 따라 산책하는 헤스.
홀로인 고독감을 엿볼수 있다.
헤스의 유해는 그가 청년시절을 보낸 라이히홀츠그륀 인근 분지델에 묻혔다. 마지막까지도 “다시 태어나도 아돌프 히틀러를 따를 것”이라고 말하곤 했던 그의 무덤은 지금 * 나치들의 성소(聖所)가 되어 있다.
루돌프 헤스는 청년기의 기억을 간직한 라이히홀츠그륀 인근 분지델에 묻혔다.
‘사상과 양심'
루돌프 헤스가 히틀러 밑에서 명목상의 고위직을 맡아 영화(榮華)를 누린 것은 불과 8년 남짓이었다. 그에 대한 댓가로 그는 무려 46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복역한 정치범’이라든가, ‘세계 최장 양심수’ 따위의 칭호는 따라붙지 않았다. 헤스는 훌륭한 군인이고, 청렴결백한 공직자였고, 적국과의 평화교섭을 위해 자신을 던진 인물이었지만, * 나치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 그가 토해 냈던 열변을 두고 ‘아름다운 소신’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히틀러를 향한 그의 일편단심을 기리는 사람도 없다.
‘잘못된 신념’으로 긴 생을 암울하게 보내야 했던 루돌프 헤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히틀러의 공범(共犯)’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나치라는 사악한 집단을 옹호하는 ‘잘못된 신념’이었고, 그의 지조는 히틀러를 향한 ‘맹목’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수 십 년 간 영어의 몸이었다고 해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행적이 ‘신념’이니 ‘양심수’니 하는 말로 포장되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신념’과 ‘지조’가 존경의 대상이 되려면, 그것이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와 인도주의에 반하지 않는, ‘올바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http://www.cfe.org/opinion/index.asp?cid=110700&idx=1187&pid=2&pn=1&sp=1&key=&si=
[출처] 루돌프 헤스는 왜 히틀러를 버렸나 – 의문의 비행기 망명 사건|작성자 햇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