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해안소초와 할매스님 이야기 2

소주정예 작성일 08.11.02 2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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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지방에 다녀오느라 이제서야 자리에 앉았네요.

 

밑에 1편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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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스님은 판자 문을 등지고 암자의 뒤뜰에 소변을 보러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 . . .

그런데, 할머니스님이 선 채로 바지춤을 내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오줌발을 내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분명히 할머니 스님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 스님은 할머니가 아니었다. 명치끝이 답답해지며 목젖이 근질근질 해졌다.

쌓여있던 메스꺼움이 목 울대를 넘어오는 것 같았다. 

두꺼비 놈은 의외로 담담한 것이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 스님, 아니 저 사내와 막내의 탈영과는 뭔가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심증을 굳힌 채

우리는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소초 입구까지 와서 눈치를 보다가 두꺼비에게 입 단속을 시킨 후 근무 철수자들에 섞여 내무실로 들어갔다.

기합기간 중 암암리에 조달된 술을 심야에 마시는 것은(물론 소량이었지만) 초급 분대장 이하 사병들 사이에

암묵적인 특권이었기에 아무도 우리가 소초를 이탈했었다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밤은 지쳐서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색작전은 연일 계속 되었고 그 넓이를 더욱 넓혀 갔다.

오히려 소초 근처는 조용해졌다.

그 다음날 저녁 구보까지 마치고 나서 두꺼비와 나는 서로를 보며 깜짝 놀랐다.

눈 밑이 쑥 들어가고 안색이 새까맣게 변했다. ibs 교육 2주차쯤 지났을 때 같았다.

몸은 늘어지는데 머리 속이 자꾸만 암자로 향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 말을 꺼내자 두꺼비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으며 구보의 고통이 끝나기 전에

암자의 의혹을 풀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젊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우리는 일단 전번에 엎드렸던 곳에 자리를 정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암자 가까이 붙어보기로 했다.

만약 들키면 얼굴만 조심하고 무조건 사라져 개별적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굴뚝 옆에 붙어선 우리는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머니 스님으로 알고 있던 그 사내는 암자 안에 여인을 감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내의 목소리는 4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었고

알 수 없는 메스꺼움의 정체도 풀리는 순간이었다.

삭발에 특이한 외모를 가진 40대 중반 남자가 할머니 목소리로 말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매우 어리게 들렸는데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문제는 둘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둘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동거관계는 분명한데 사내의 말투는 여인을 핍박하는 분위기였고

여인은 기가 죽어 있음이 역력히 드러남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그저 어린 여인을 데려다 감추어 놓고 애정 행각을 벌이며

중생을 우롱하는 돌팔이 까까중 정도로 일단락 지으려고 했었다.

적어도 두꺼비 녀석이 막내의 소초 이탈 사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두꺼비의 말에 따르면 막내는 암자에 처음 구보갔던 뒤로 자꾸만 암자에 가보고 싶어했으며

마음 좋은 일병 오장이었던 두꺼비는 아무도 몰래 막내의 암자행을 방조했었다는 것이다.

두꺼비도 처음에는 어린 막내가 할머니 스님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것쯤으로 여기고

일병 오장으로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 구보가 있기 전날

막내는 매우 초조해했고 다음날 암자에서 말다툼을 직접 목격한 후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다고 했다.

암자의 쪽문 안쪽은 가마솥과 양은냄비가 아궁이 위에 걸려있는 부엌이었는데

막내는 부뚜막에 앉은 자세였고 할머니 스님은 구부리고 서서 막내의 옷섶을 움켜쥐고 욕설을 내뱉다가

두꺼비가 뛰어들어갔을 때 황급히 놓았었다는 것이다. 그 때 할머니 스님이

부엌에서 방 쪽으로 난 조그만 창호지 문 쪽을 흘낏거리며 뭔가 들킨 듯이 놀라던 것도

방안에 있던 여인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했다.

막내에 대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두꺼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막내의 탈영 이유를 알 수 없어 고민하다가

생각이 암자에 미치자 나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게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여인의 존재를 연결고리에 끼워넣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다음날 우리가 나흘째 구보를 끝내고 복귀했을 때 분대장은 탈영자 수색작전이 잠정 중단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이미 위수지역을 벗어났거나 실종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부대 이동문제도 맞물려 있어 오래 끌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중대장님께 보고해서 암자를 수색해 보자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데다가 우선 수색하자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가짜 땡중이 여인과 사는 것을 군대서 상관할 일도 못될 것이고

중대장을 대동하고 가서 할머니 스님의 아랫도리를 까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조사가 진행된다면 한밤중에 전방에서 소초를 이탈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영창에 갈 것이다.

기합을 받고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날 밤 발바닥의 물집을 손보고 있는데 초번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이

내일은 마무리를 하고 모레 예비대로 이동하기로 결정 났다고 전해주었다.

이왕 갈거면 구보기간 채우기 전에 이동할 것이지 꽉 채우고 갈건 뭐냐며 너스레를 떠는데

내일은 인근 마을 이장님과 부대와 협조가 필요한 어촌계장님, 부녀회장님 등이

먹거리를 준비해 와서 일종의 부대 위문을 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실 이같은 일은 관례화 되어있어서 해마다 이삿짐을 쌓아놓은 조그만 연병장에서

주계(취사)의 테이블을 꺼내 늘어놓고 작은 파티(꼭 파티라고 불렀었다. 소대파티. 중대파티, 대대파티 등)를 여는 것이다.

 


다음날 닷새째 구보를 시작하려고 나설 때 내빈 자격으로 오신 중대장님께서 부대 이동이 너희를 살렸다며

이틀 더 남은 구보를 면제해 준다고 하셨다. 뛸 듯이 기뻐하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텐데

구보를 마감하는 중대장신고를 하면서도 뒤끝이 찌부둥한 것이 영 시원치 않았다.

초가을 햇살이 소초 뒷덜미를 나른하게 만들 때쯤 위문단이 왁자하게 들이닥쳤다.

우리는 차광커튼을 걷고 아이들처럼 창에 매달려 그들 손에 들린 음식에 광분했다.

나와 두꺼비가 소란스런 대원들 겨드랑이 사이로 동시에 눈길이 마주친 것은

위문단 속에 끼어 자애로운 할머니 스님의 표정으로 나타난 그 사내를 본 직후였다.

 


우리는 곧바로 소대장 벙커(전방에선 소대장실을 그렇게 불렀다)로 뛰었다. 마음이 다급했다.

행사 절차를 메모하고 있던 소대장님께 우리 발바닥을 들어 보여주었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움푹 들어간 눈, 된장국 끓는 모습의 물집이 겹쳐 굳은 발바닥.

소대장님은 군말 없이 우리를 위문 행사에서 열외시켜 주었다.

대신 옥상이든 뒤쪽 논이든 싸이드(짱박히다와 비슷)까고 있으라고 했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생겼다. 절호의 기회였다!

말을 안 해도 두꺼비는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좀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이동하면 그만이라고 애써 다짐했다.

 

우리의 두 다리는 기합주간을 거치면서 이미 예비대의 다리가 되어 있었다.

암자까지 순식간에 갔다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악기충천으로 뛰었다.

암자 근처에서 잠시 동정을 살피다가 두꺼비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두꺼비를 들여보낸 것은 여러 가지를 감안한 나의 판단이었다.

적당한 곳을 골라 사주경계를 하며 두꺼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약 막내의 실종이 이 암자와 관련 있다면

두꺼비가 가져올 일말의 단서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내의 정체를 눈치챈 막내와의 다툼 중 우발적 살인?

여인의 존재가 알려지는 게 두려운 나머지 계획적 살인?

아니면 막내 놈이 너무나 고달픈 나머지(우리부대의 졸병생활은 정말 힘들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암자의 사내에게 은닉을 부탁?.....

어쨌든 여인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열쇠를 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도 안되어 두꺼비가 암자 뒤의 쪽문으로 살며시 나오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여유 있는 복귀 시간을 확인하고 숲 속에 녀석을 끌어 앉혔다.

궁금해서 조급증이 날 정도였다.

 

" 야. 야 뭐라고 물어 봤냐?. 뭐 건진 건 있냐?"

"그게.... 말임다..."

 

녀석은 대답대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야! 이거?.. 그 때 그거 아냐?"

 

녀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넵, 그렇슴다. 기념으로 받았담다."

 

두꺼비가 내민 것은 우리가 얼마 전 구보할 때 머리에 둘렀던 머리띠였다.

녀석이 여인에게서 들은 것을 조합해 분석해 보았다.

우연히 앳된 여인을 보게된 막내는 어린 마음에 끌렸던 모양이었다.

상황이 끝까지 할머니인척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가 부엌에서의 욕설이 있던 날이었다.

부대 이동을 앞두고 속이 탄 막내 놈이 사건이 있던 날 새벽에 소초를 이탈하여 암자를 찾았던 것 같다.

담담히 머리띠를 건네 준 것으로 보아 여인은 그 뒤의 일은 모르는 것 같았다.

돌아오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헌병대의 조사에서 암자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무슨 빌미로 종결되어가는 수사에 암자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우리가 복귀했을 때는 위문잔치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얼큰해져서 평소의 모습에서 벗어나 반말로 마구 떠들어댔고

졸병들은 파티 후의 집합에 대비해(모든 행사 후에는 항상 집합) 뒷정리를 빠르게 해 나가고 있었다.

얼렁뚱땅 뒤섞여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쪽이 시끄러워졌다. 두꺼비였다.

암자에서 돌아올 때부터 침통한 표정이었던 녀석이 좀 불안해 보이기는 했었지만

인자하게 음식을 정리하던 할머니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고 폭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선 다급해진 것은 나 자신이었다. 사건 전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창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여러 사람의 손에 짓눌려 제압당한 두꺼비와 본색을 들킨 사내가 어정쩡하게 서있는,

족구장보다 조금 더 큰 소초 앞마당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헌병대에서 득달같이 달려왔을 때 오후 한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두꺼비는 나에 대해서 일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 부분에서 나는 비겁했다.

내 인생에서 호적등록에 빨간 줄은 면했어도 양심에 붉은 줄은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암자에 대한 수사 결과, 예상대로 그 사내는 전과자였고 그 여인과는 치정관계에 있었으며

여인의 진술에 의해 막내와 그 여인 사이에 애정이 싹텄음도 밝혀졌다.

그러나 사내가 막내를 어찌했다는 법적 증거는 없었으며 현행법상 사내의 죄목은

일종의 가짜 중 행세를 한 민생사기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두꺼비는 수사 과정에 중 암자의 잿더미에서(암자는 아궁이에 불때는 부엌이었음) 발견된 워커(군화) 뭉치를 지목했고

사내는 근처에 훈련 나온 육군 병사들이 버리고 간 것들을 주워모아 화력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사실 그 워커 조각들은 모두 육군용 군화들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못한 채

두꺼비는 소초 이탈, 영내소란, 대민폭행, 무고죄 등으로 15일 영창을 갔다.

그나마 중대장님의 진정서로 감면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부대 이동을 했고 예비대 정비가 완료되고 기초체력 향상기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꼰뽕(일명 더블백)을 메고 초췌한 모습으로 두꺼비가 돌아왔다.

내가 따로 불러 위로하는 자리에서 두꺼비는 위문 잔치가 있었던 날 암자에서 돌아오면서 까발릴 결심을 굳혔으며

나에게 상의도 없이 결행한 점을 오히려 용서해 달라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 때 녀석이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암자에서 발견된 타다 남은 워커 중에서 막내의 *반짝이 워커*를 분명히 보았슴다.

 주장해 봐야 증거도 되기 어렵고 괜히 나만 더 불리해 질 것 같아서 그냥 있었슴다.

 막내 새끼만 불쌍한 검다....... 어린 새끼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 여잘 찾아 갔겠슴까?...."

 

두꺼비는 목이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했었다.

 


그 해, 유난히 커 보이는 미류나무들이 넓디넓은 예비대 연병장 가에 늘어서서 늦가을 바람에 잎을 떨구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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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 워커*

 

세무워커가 낡아서 못 신게 되면 발등과 뒤축 부분에 가죽 넓이만큼 구두약을 진하게 발라 광을 낸 후

정글화처럼 만들어 졸병 선에서 신곤 했는데 우리는 그걸 반짝이라고 불렀다.

일병 오장은 소대원 전체의 워커를 식별할 수 있는 위치였다. 매일 소대원들의 워커 손질을 책임졌으므로...

 

 

 

* 필자의 변 *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둘러 마감하다 보니 끝에 와서는 건조한 서술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기괴스런 할머니 스님의 살인 장면과 아궁이에 시체를 넣는 나레이션이 있었으나 제외했고, 

수사의 급반전 상황들 묘사와 쓸쓸하고도 멋진 뒷마무리를 못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쉽긴 합니다.

 

 


* 두꺼비는 경남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며 성공했고

  만약 그가 영창생활이 원인이 되어 현재 불우하다면

  제가 뻔뻔스럽게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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