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들이 참 많군요.
일단 그 유명한 명량대첩을 이야기 할려면, 원균이라는 인물을 무시할수가 없죠.
왜 13척뿐이 안되었는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안써놨더군요.
일단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조선군은 모든것이 불리하게 전쟁을 하여야 했었죠.
일본군은 절대적 우세에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고, 상황역시 그러하였죠.
한편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선군은 역시 옥포, 한산도, 사천, 부산 해전에서
절대적으로 일본군에 밀리고 있었으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서 원균의 지원요청을 받아
휘하의 장병 700여명을 소집하고, 정비를 한후 전라우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고
징계를 올렸습니다.
그 후 첫승을 하게된 옥포 해전에서 옥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26척의 배를 침몰시켰고,
같은날 큰 함선 한척을 만나서 이 또한 격퇴하였으며, 기세를 몰아서 적진포에서 13척의 배를 침몰 시켰죠.
이때 이미 조선 조정은 한양에서 후퇴를 하게 되어서 절대 불리한 전세는 여전하였지요.
그 결정적 요인은 임진강 방어에 조선군이 실패를 하게 되어서 입니다.
이후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투입되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게됩니다.
그 후 한산도 대첩에서 원균과 합세하여 육상전에서 사용되는 학익진을 해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여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르게 되었고, 학익진을 사용하기 위해 처음에 후퇴하는 척하며 큰바다로 적을 유인해 학이 날개를 펴듯이
학익진을 펼쳐서 적을 괴멸하게 되었죠. 일본군은 거의 전멸하다 싶이 하였고, 제일 후방에 있던 6척의 배만이 후퇴에
성공하였고, 육지로 도망간 일본군까지 잡아서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부산대첩에서 일본군 배 400척중 100척을 격퇴하였고, 더이상 격퇴하지 못한 이유는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순신이 관련된 4차례의 전투 결과 일본군의 기세가 크게 꺽이게 되었다. 서해쪽의 공격을 포기하고 전라도를
포기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에 원균은 이순신과 연명으로 징계를 올리려 했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먼저 징계를 올렸고, 이로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안좋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을 비하하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처리에도 불만이 일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원균이 고의로 어기고, 이순신은 이 사건을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 시켜달라고 청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원균은 이후에도 이순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며,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수색하였으나 이순신의 충성심만 증명할
증거들만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웅포해전에서 이미 이순신에 기세가 꺽이고,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일본해군은 후퇴와 숨기를 반복하게 되
었고, 이순신과 원균과의 마찰로 인해 해전자체가 지체되고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와중에도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게하고 곡식을 비축해 탄탄한 진을 만들었고,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더이상 자만하지 않고, 거점에 튼튼히 하고, 총집결하여 방어진을 구축하였고,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순신을 원균등 조정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며 공격하라고 강요를 하였으며,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할려던 이순신을 결국 해임시키고, 대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시키게 되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게되어 대패하고 거의 전멸하게 되었
으며, 원균은 전사하게 됩니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 병력으로는
도저히 일본대군을 상대하긴 무리라고 판단하여 수군을 패하라고 명하였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의 반대에 수군을 패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순신은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서 전열을 가다듬었고, 명량해전에서
지형적 특성인 밀물과 썰물때 급류로 변하는 특성을 전략으로 삼아 새로이 배한척을 만들어 13척으로 일본 배를 유인하여
스스로 배들이 좌초하게 하였고, 333척의 일본 함대를 31척 전선을 격파하였고, 또 91척의 배를 파손 및 대파 하게되었죠.
이순신이 세계적으로.. 아니 세계의 모든 해군의 우상이 되는 이유
읽어 보셨다면 아실거라 생각되지만, 언제나 절대적 열세에 있었으며, 이미 남이 패전하여 후퇴한 병사들만으로 대승을
거두었던 휼륭한 전략가 입니다. 일본군에 이순신의 전략을 예측할수 있는 인물이 없을뿐더러... 당시 세계어디에도
이정도의 전략을 알아차릴수 있는 인물은 없습니다.
다른 분들이 착각하고 계신건, 당시 조선군의 배는 세계최고니까 이기는건 쉬운 일이였다. 라고 생각하시는데...
명량대첩때 13척의 배와 이순신이라는 장군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이순신에게 몇번이나 패전을 했던 일본 장군까지도
비웃으며 처들어올정도의 약한..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전세였습니다. 만일 다른 분들의 생각처럼 조선함선
한대로 일본함선을 몇십척씩 괴멸할수 있다고 해도, 그건 물량이 무한으로 지원되야지만 가능합니다. 333척대 13척이니
한대당 25척은 기본으로 무너뜨릴만한 함포를 장비해야만 하죠. 그렇게 포와 포탄이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실어서
움직인다면 배는 가라앉던지, 기동력이 거의 없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죠. 즉, 능력이 되지만 능력을 살릴 무기가 없다
입니다. 권투로 예를 들면, A라는 선수가 펀치력만으로 B라는 선수를 충분히 이길수 있다. 만으로만 평가를 하는
것이죠. 이 전투는 A라는 선수 1명과 B라는 선수 25명의 승부입니다.
이걸 잘알고 있는 일본군이기에 비웃으며 처들어 오게 된것이죠. 그게 아니라 정말 님들이 생각하듯이 비슷한 조건이였
다면, 일본군은 신중을 기하며 공격하다 숨고, 퇴각하는가 싶으면 공격하고, 이런 소극적인 방법을 택했겠죠.
이순신이라는 존재만으로도요.
이걸 지형을 이용해 극복하고, 밀물과 썰물이 없던 태양이 뜨겁게
뜨던 낮전투에서는 초승달 형식의 지형을 이용해 큰거울을 초승달 형식으로 달아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의 배를 태우던지,
눈부셔서 앞을 잘 못보게 하고, 반대로 앞이 훤하게 비쳐져서 아군에게는 큰도움을 주는 전략도 이순신을 유명하게 만든
전략입니다.
영국해군이 우리나라오면 이순신 동상에 경례를 하는 이유가 다 있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