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여탕거울 작성일 10.04.05 17: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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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년 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
(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
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될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재판이 심상치 않게 나가자
재판장이 3개월 동안 재판을 중단하고
몸저 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다른 종교로 바꾸었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 )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국내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
(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 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 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 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 (알로에추출물)(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죽지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 하고 있다.


출처 : 르 지라시(미디어몹)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빌라도에 정치적 사기극..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의 제사장 적인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빌라도(유대총독으로 로마인)가 예수를 탄압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와는 정반대로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를 유대의 왕으로 세워 이용하려 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설득하여
예수를 무죄 석방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빌라도)는
그(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한복음 18:39)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유대인)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19:4)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유대인)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유대인 법)로 하면
저(예수)가 당연히 죽을 것은(것이니)
저(예수)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라(함이기 때문이니라). "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요한복음 19:6∼9)
이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예수)을 놓아 주면 가이사(유대인이 왕)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내가 너희(유대인) 왕(예수를 지칭)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유대인)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한복음 19:12∼15 )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써 달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나라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썼다(쓰겠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

빌라도는
자칭 구세주인 예수와 결탁하여
예수를 유대인이 기다리는 구세주로써
또 다윗 왕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유다 지파의 사람 요셉의 아들(마태복음1:1~17)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를 유대의 제사장적인 왕으로 세워
유대인을 통치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예수는 로마 병사인 판델라의 아들이라고
유대의 경전 탈무드에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위장이지만) 빌라도는
예수에 대해 십자가 처형의 판결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은
유대인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치 않으면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키고
또한 예수를 유대인의 율법대로 돌팔매질 등으로
즉결 처형할 것이기에
빌라도는 이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예수에게) " 어찜이뇨(어찌하여)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저희(유대인들)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예수를 살리려 했으나 반대가 너무 심하고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빌라도)는 무죄하니
너희(빌라도 부하)가 당하라."

백성(유대인들)이 다 대답하여 가로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태복음 27:2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의 율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을 ∼ "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요한복음19:7∼9)

그래서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를 살리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처럼
예수와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등
일부 에세네파의 예수의 제자들과 각본을 짜고
병사들로 하여금
예수를 핍박하며 처형하는 것같이 연극을 하게 하고는
예수 대신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성경에는 로마 병사들이 예수를 핍박하는 것같이 연극하였으나
오히려 예수를 위해 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웠더라.(마태복음 27:32)

그리고 예수를 빼돌리고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예수 대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도 각본에 따라
학대하고 처형하는 것 같이 연극하면서
반대로 배려를 하여 살려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위장을 한 대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죄수들은 빨리 죽게 하기 위해
무릎 뼈를 꺾었으나
십자가에 매달린지 6시간 밖에 되지 않은 예수(마태복음27:45)를
이미 죽었다고 하면서
무릎 뼈를 일부러 꺾지 않았으며(요한복음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시체로 생각케 하기 위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히브리성경 원전에는 가볍게 찔렸다는 뜻으로 찔린 상처로 기록되어 있다)
죽은 시체에서는 피가 굳어서 나오지 않음에도
산 사람처럼 피가 찔린 상처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도
죽었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한복음19:34))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대역자의 시체(실은 시체가 아니다)는
직계가족이 아닌 빌라도의 친구이자
공의회 의원인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에게 주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한복음19:38)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결코 장사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실제로 보초들은
친척이나 친구가 죽은 자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켰다.
그렇지만 절차를 크게 무시하고
빌라도는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선뜻 내주었다.
이것은 빌라도 측과 공모가 있었음을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다.
─ 성혈과 성배 373페이지, 행림 출판사 ]

그리고 역시 공의회 의원인 니고데모라는 예수의 제자가
예수 대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여러 상처들을 치료하기 위해
죽은 시체에는 전혀 필요가 없는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 (알로에추출물)을
100근(40kg)이나 준비하였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한복음19:39)고 하였으며

또한 붕대를 감거나 옷을 입히게 되어 있는
유대의 장례법과는 달리
몸을 세마포로 덮어 쌌으며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한복음19:40)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아 두었다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태복음 27:60) 고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로마법 상 공개된 장소에서 하게 되어 있는 십자가 처형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리마대의 요셉의 개인 동산에서 하게 하여
아래와 같이 약속된 몇 사람 외에는
동산 아래 멀리서 바라 보게 하였다.
당시 유대의 풍습에는
개인의 동산에는 허락 없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태복음 27 : 55)

4세기 초 초기 신약 성서들이 모두 불태워진 적이 있었다.
이는 교황이 된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부제의 명령에 따라
신약성경이 재편집되면서
고쳐진 새로운 성경에 위배되는
4세기 이전의 성서들을 모두 몰수하여 불 태워 없애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없어진
초기 신약 성서 내용들 중에 일부가
1945년에 이짚트 남부의 나그함마디 마을의 동굴에서
밀봉된 항아리 속에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발견되었는데

그 나그함마디 문서의 위대한 세트의 대속론 제2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쓸개즙과 식초를 마셨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어깨에 십자가를 졌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이 가시관을 씌웠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높은 곳에서…
그들의 실수를…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무지에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부활의 연극을 완벽하게 해낸 예수는
배를 타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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