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부터 약 20년 전, 그러니까 1985년의 일이다.
우리 식구들은 오랫동안의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집을 샀다. 시가보다 훨씬 싼 값에 샀다고 부모님은 좋아하셨
다. 이사한날, 나는 제일 먼저 내 방으로 갔다. 새로 산 책상이 창가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 공부하면 공부도 잘될
것 같았다.
- 여긴 네 방이니까, 청소도 네가 하고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별것 아닌 일에도 방싯방싯 웃음이 나왔다. 하루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피곤했지만, 기분은 그만이었다.
이사온 기념으로 불고기 파티를 하기로 했다. 나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렸다.
-지영아, 간장 좀 다오 -
나는 간장을 들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와서 보니 간장이 부엌 바닥에 엎질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걸레로 닦으시며 짜증을 내셨다.
-그걸 내 발 뒤에 놔두면 어떡하니? 다 엎질렀잖아 -
나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었다고 말하려다가 더 야단맞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묵묵히 파를 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접이 어머니의 발에 떨어졌다. 어머니가 벌컥 화를 내셨다.
-너 오늘따라 왜 이러니? 일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일을 더 만 드는구나 ,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해 !-
-내가 떨어뜨린게 아니란 말야! -
어머니는 들은 채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떤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나를 볼 수 있어도 꿈속의 나는 그 여자를 볼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그 여자도 따라서 몸을 돌렸다.
그 후로 이상한일이 많이 일어났다. 물건이 원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놓여 있는 일이 많았다. 나는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탓이라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때로는 깊은 밤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무언가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긁적긁적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 식구들은 모두 아침식사를 끝내고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려더 참이었다.
- 여보 일 다녀올게 -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 아휴,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짐도 안 치워 놓았는데.....-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그냥 넘겨 버렸다.
아버지가 출근 하신 후 우리 남매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있었다.
오후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했다.
- 참 , 아까 그 여자가 사온 것 좀 가져와봐라 -
-엄마?, 그 여자라니? -
-아침에 아빠가 출근할 떄 온 손님 말이야 -
우리들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었더라. 뭘 사왔는지 불룩한 비닐봉지를 들고서는 날 보
고 웃으면서 소파에 앉던데-
-엄마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았단 말이야 !!-
-뭐? 봉지에서 뭔가 꺼내어 먹어보라는 시늉을 하더라. 그래서 받아먹으려는데 너희들이 거실로 나왔어.-
-그래서? -
-너희들을 보곤 그냥 스르르 나가 버리더라. -
우리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역시 영 기분이 이상하신 모양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하지만 혼자 있을 적에 그 여자를 여러 번 봤는데.... 올 떄마다 뭘 사가지고 와서는
나한테 권하는데, 말은 한 마디도 안 하고 날 보며 웃기만 해.-
-엄마 무서워 ..귀신인가 봐.--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점치는 집을 찾아갔다. 점쟁이는 어머니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따..
-식구가 여섯이지? -
-아니에요 우린 다섯 식구인데 .......-
-아니야 하나 더살아 . 빈 집에 문 열고 들어갈때 잘 살펴봐, 후다닥 숨는 소리가 나거든 다 고년 짓이야,
잠잘 때 잘들어봐, 어디선가 고년의 숨소리가 들릴 테니까.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어머니를 꼭 잡고 있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꼭 등뒤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지? 다 고년 짓이야, 귀신이 산 사람한테 붙어 있으면
생명이 자꾸 단축되는 법이야, 어서 이사를 해.-
어머니는 점쟁이에게 복채를 두둑이 치렀다.
우리는 당장 이사를 갔다. 이제 2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집에 혼자 있게 되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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