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자료님 이거 맞나요 ..

하늘천지문 작성일 13.04.02 04: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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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 그리고 우주 창조

 2010/05/11 07:29

영혼,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당신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에 관한 개념 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신은 신 자신에 관해 오랫동안 사색해왔다. 이 세상 나이의 몇 배나 되는 이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러니 신 스스로에 관한 신의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롭겠는가!

신, 그것은 태초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인 그것은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이것이 신비론자들이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다뤄온 저 위대한 존재/부재의 등식이다.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장대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장대하다’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인 용어이기에 그런 체험은 불가능했다. 존재 전체는 비(非)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 가지는 자기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부재 , 있음-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기를 아는 쪽을 택했다.

이 에너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찰되지 않는, 따라서 다른 어떤 에너지도 파악할 수 없는 이 순수 에너지는 더 없는 장대함으로 자기를 체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기의 어떤 부분도 필연적으로 전체보다 못한 게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자기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 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들은 자기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영광스런 한 순간에 자기를 이것과 저것인 것으로 나누었다. 처음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존재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전체가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불현듯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있지 않지만 여기와 저기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건 무nothing이고, 공간을 지탱해주는 건 비공간이며, 부분을 지탱해주는 건 전체다.

좀 더 앞으로 나가보기로 하자. 지금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이 무(無)를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이 아닌 어떤 것, 곧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있다는 걸 뜻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망라한 전부이다. 그러므로 신을 이렇게 ‘위대한 보이지 않음’ , 즉 ‘무(無)’ 또는 사이공간Space Between으로 설명하는, 동양 특유의 신에 대한 신비주의 정의 역시 신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규정하는, 서양 특유의 실용주의 설명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이제 신은 ‘여기’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relativity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일찍이 신이 자기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relationship는 신이 일찍이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무’로부터 ‘모든 것’ 이 솟아났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우리 과학자들이 빅뱅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딱 들어맞는 영적인 사건이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앞으로 내달릴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니,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데 걸리는 기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저급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이 지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투쟁과 전쟁, 천사의 군대와 악마의 전사들, 선과 악의 힘, 빛과 어둠의 힘들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갖춘, 꽤 정교한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이 신화들은 인류가 그 영혼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그 정신(마음)으로는 좀처럼 인식하기 힘든 우주적 사건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생겼다.

신은 자신의 나눠진 변형으로 우주를 있게 하면서 순수 에너지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만들어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서 신은 물질 우주뿐만 아니라 형이상의 우주까지도 창조한 것이다. 존재/부재 등식 중에서 부재를 이루는 신의 부분 역시 전체보다 작은, 무한히 많은 수의 단위들로 폭발했다. 이 에너지 단위들을 우리는 영혼spirits이라 부른다.

인간의 종교 신화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을 "아버지 신"이 많은 영적 자식들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는, 인간의 체험에 견준 이 같은 비유는 현실에서 일반 대중에게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개념, 즉 "하늘 왕국" 에 무수한 영혼들이 갑작스레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 신화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궁극의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 전체를 이루는 무수한 영혼들은 우주 적인 의미에서 신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신이 자신을 나눈 것은 그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자신의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은 자신의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전체인 그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 같은 창조력을 부여해줬다.

인간의 여러 종교가 우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서로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신은 특정 목적의 위해 택하는 물질 형상이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말은 신과 인간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신과 인간)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똑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같은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신이 영적인 자식인 인간 그리고 우주의 여러 지적 생명체를 창조한 것은 그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서는 그들을 통하는 것 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신의 목적은 그들이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한 10:34-5>.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자신을 신(神)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논의를 위한 토대로 신의 자식이라는 인간의 신화 모델을 이용해보자. 그것이 우리에게 친숙한 모델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인식이라는 이 과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신이 자신의 모든 영적인 자식들에게 그들이 신의 부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그냥 그들에게 얘기해주는 것뿐이다. 신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혼이 자신을 그냥 신 또는 신의 일부, 신의 자식, 또는 하늘 왕국의 상속자(또는 인간들이 이용하는 신화가 어떤 것이든 간에)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미 설명했듯이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신이 그랬던 꼭 그대로!). 개념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영혼에게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신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여기서 합작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 모두가 신과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 하에서, 순수 영혼인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은 이제 막 창조된 물질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 이야말로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신이 맨 먼저 물질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 체계와 그 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

신의 영적 자식들인 인간(과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이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그들은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들은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그들은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지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말랐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뚱뚱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체험할 수 없다.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우리 아닌 것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자기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우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 때까지는 우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우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바로 그것(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기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우리는, 말하자면 성(城)안에서 그냥 하늘 왕국의 상속자로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신의 일부라는 얘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가 신의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잊을 수는 있다.

우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부분member 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 쪽을, 우리의 전체인 신(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우리의 일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재구성하는(기억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remind 것(즉 그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 쓰는re-mind 것)이 우리의 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의 목적이다.

인간이 신에게 던진 질문들 가운데서 가장 자주 물어왔던 건 “왜 세상이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 질문을 태초부터 던져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알고 싶어해왔다.

그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전형은 대체로 이렇다. 만일 신이 더없이 완벽하고 더없이 애정 깊은 존재라면, 왜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지진과 회오리바람과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 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깊은 신비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 속에 들어 있다.

신은 우리 주변에 우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신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게 하여 신의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우리는 사랑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우리(영혼)에게도 신에게도 충분치 못했다. 신은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우리가 나온 곳도 거기이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 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아들이 그 스스로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脫)육화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물론 우리는 신을 아버지, 우리를 아들로서 설명하는 게 성(性)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사람이다. 성서에 나오는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고방식에서는 그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아니면 ‘생기게 하는 것’과 ‘생긴 것’ 간의 관계로 보거나.

여기에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생기게 하는 것/생긴 것/존재하는 것.

이 삼중의 실체는 신의 표식이다. 그것은 신성한 패턴이다. 하나 속의 셋은 숭고한 영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든, 신과 의식이든, 혹은 그 외의 다른 모든 온전한 관계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우리는 삶의 모든 조악(粗惡)한 관계들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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