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정도 전입니다.
평소와 같이 데이트를 한 후 사귀고 있던 M군이 하숙집까지 바래다 주고 있었습니다.
M군은 자칭 영혼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으로
당시 나는 그런 것을 그다지 믿고 있지 않았달까,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으로 믿게 된 것이 이 돌아가는 길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사실은 돌아가는 길 도중에는
M군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곳이 있어
언제나 그 쪽을 우회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길에는 무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씌어 있어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의 데이트는 상당히 먼 곳까지 걸어 갔었기 때문에
나는 대단히 지쳐서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습니다.
이 길을 돌아가면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야만 집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통해 집으로 가자고 M군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반대해서 결국 말싸움을 벌여 버렸습니다.
결국 내가 혼자라도 이 길을 통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M군도 어쩔 수 없이 같이 가 주기로 했습니다.
그 길에 들어가자 M군은 눈에 띄게 두려워하고 있어서 얼굴이 새파랬습니다.
시간은 밤 11시 정도였습니다만 가로등도 있어서 그리 어둡지 않아
나에게는 그저 보통의 길일 뿐이었습니다.
나도 역시 마음에 걸려 M군에게 물어보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아]라고만 대답해주었습니다.
조금 나아가면 두 갈래로 나뉜 길이 나오고 집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이 부근에 와서는 M군도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도 안심하고 아무런 주저 없이 왼쪽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왼쪽 길로 발을 내딛은 순간 무엇인가 갑자기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습니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게 되고 주위의 빛도 어두워졌습니다.
M군의 말로는 본능적으로 눈 앞의 물건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발이 추운 곳에 계속 있었던 것 같이 저려오고 경련을 일으켜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힘도 들어가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그 경련이 일어난 발이 몸을 받치고 있어서 나는 그 자리에 내내 서 있었습니다.
갑자기 앞 쪽에서 [휙]하고 돌풍 같은 것이 불어왔습니다.
마치 옆에서 전철이나 커다란 자동차가 지나갔을 때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료쟈! 사료쟈!]라고 하는 크고 작은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퍼졌습니다.
가까운 것은 나의 귓가에서 바로 들렸습니다.
돌풍 같은 것이 지나간 후 나는 아연실색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M군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내 곁에 다가와서는 필사적으로 나의 발을 계속해서 손으로 때렸습니다.
나중에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심하게 맞았습니다만
이 때는 발에 감각이 없었고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아파지고 동시에 발에 감각이 되돌아와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옆을 보니 M군도 나쁜 안색을 한 채로 주저앉아 [이제는 괜찮아]라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M군에 의하면 왼쪽 길로 들어선 순간
앞쪽으로부터 검은 몽롱한 것이 눈사태처럼 흘러와 우리들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나의 발에는 그 검은 무언가로부터 나온 무수한 손이 달라붙어 있어 그것을 털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길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고작해야 50미터 정도의 길에
작은 사당이나 신사가 7개씩이나 밀집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향한 집 현관의 거의 전부가 소금을 뿌려놓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술이 놓여있거나 몇 장의 부적이 붙어있는 집도.
그리고 이 주변에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낡은 폐가와 빈 집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의 글에 썼던
[이 길을 우회하면 대단히 멀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구획이 잘 정비된 거리에서 단지 이 곳만 주위의 차도를 크게 우회해서 가거나
그 곳에서 막다른 골목에 막히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게 만들어 둔 것입니다.
유일하게 두 갈래로 나뉜 길과 거기에서 갈라진 모세혈관 같은 복잡한 샛길만이
그 곳의 교통 수간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빠서 그 동네 토박이인 학교 선배에게 물어보니
이 구획에는 옛날 소위 '부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꺼림칙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고 부락 자체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의 내용은 금기시되고 있는 모양이고 선배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고장 사람들은 그 곳을 싫어했고 그 후에도 쭉 그 땅에서는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20년이 지나서 드디어 외지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부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걸립니다만 선배나 M군의 충고도 있어 나는 이 이상 조사하는 것은 그만두었습니다.
여러분도 만약 효고현의 모 유명 야쿠자 본부가 있는 도시에 가시게 된다면 주의하세요.
왠지 길이 도중에 끊어졌다면 우회하도록 하고 함부로 지나가지 않도록..
이 글에 대한 리플입니다.
혹시 그 부락.. 조선인들이 살던 곳이 아닐까?
[살려줘(도와줘)]라고 하는 한국어가 있는데, [려]라는 발음은 일본어에는 없으니까 [료]로 들린 것 같다..
또 다른 리플
평소에는 괴담에 코멘트를 달지 않는 저입니다만
이 괴담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명해둬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첨언합니다.
일단 '부락'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향, 소, 부곡'과 비슷한 천민들을 수용한 특수한 마을입니다.
이들은 같은 부락 안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당했고
엄청난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락은 메이지 유신 이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차별은 여전했고,
심지어 요즘에도 부락 출신 사람들은 공직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존재할 정도로 일본 사회의 치부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괴담에 등장한 부락이 조선인 부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당시 일본에는 유학이나 생계를 위한 이민 등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있었습니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본을 휩쓸었고 이를 통해 민심은 흉흉해집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명령을 시달했고
이것이 일반인들의 귀에 들어가면서 약 6000여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관동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제 짧은 소견입니다만 아무래도 이 괴담은 관동대학살 당시 살해당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원한 어린 넋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 속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당한 우리의 넋들에게 잠시나마 조의를 표합니다.
번역 : VKR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