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귀

늑대의눈빛v 작성일 14.06.12 18: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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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승려인 무소 선사는 어느 날 혼자 미노를 여행하다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가르쳐줄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 그는 오랫동안 어쩔 줄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밤은 묵을 곳을 못 찾겠거니 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저물녘 언덕 꼭대기에서 '암자'라 불리는 작은 초막 하나를 발견했다. 암자는 홀로 산에 묵으면서 기도하는 승려를 위해 마련한 오두막을 말한다. 오두막은 이미 완전히 썩을 대로 썩은 상태였지만, 그나마라도 매달리는 기분으로 무소 선사는 암자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안에는 나이가 꽤 많은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무소 선사는 노승에게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노승은 그 청을 매몰차게 거절하고는, 대신 가까운 골짜기에 있는 어느 마을까지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곳에 가면 요기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무소 선사가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가니 열한두어 채 될까 말까 한 농가가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 있었다. 촌장의 집을 찾아가자 촌장은 그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선사가 도착했을 때 안쪽 큰 방에는 오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선사만은 작은 별실로 안내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부자리도 바로 준비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선사는 곧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한밤중이 다 되어 옆방에서 한탄의 소리가 들려왔고, 선사는 잠에서 깼다. 이윽고 장지문이 살짝 좌우로 열리더니, 초롱을 손에 든 젊은 남자가  방에 들어와 정중하게 절하고 나서 선사에게 말했다.


"스님, 참으로 말씀드리기도 괴로운 일입니다만, 실은 어제까지는 그저 장남일 뿐이었던 제가 이제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의 모든 것을 도맡아 관리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오셨을 때는 너무나도 피로하신 듯하여 불편하시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버님이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옆방에서 보신 이들은 모두 이 마을사람들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두들 이제부터 십 리쯤 떨어진 옆 마을로 갈 것입니다. 이 지방 관습에 따르면 누군가 죽은 밤에는 저희들 중 그 누구도 마을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올리고 경을 왼 후, 저희들은 고인만 여기에 두고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면 시신이 홀로 남겨진 집에서 반드시 극히 기괴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정이오니, 스님도 저희들과 함께 물러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쪽 마을에서도 스님이 묵을 곳은 확실히 마련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만일 스님께서 귀신이건 악귀건 두렵지 않다. 시신과 단 둘이 남아있어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때는 이 집을 자유로이 써주십시오. 다만 오늘밤 이 집에 묵으려는 이는 스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점을 부디 유념해두십시오."


무소 선사는 대답했다.


"친절하게 마음 써주시고 따뜻하게 대접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댁에 도착했을 때 아버님께서 임종했다고 말씀해주셨다면, 다소 지쳐 있었다고는 하나 변변찮은 이 몸도 승려이니 할 일은 다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 만일 한마디 해주셨더라면 여러분들이 출발하시기 전에 경이라도 욀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유감스럽습니다. 이리 된 이상 여러분들이 물러가신 후에라도 경을 외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시신 옆에서 독경을 하겠습니다. 여기에 혼자 남으면 뒤숭숭한 일을 당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저도 승려이니 귀신이건 악마건 두렵지 않습니다. 제 몸은 부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젊은 가장은 무소 선사의 이 말에 어지간히 기뻤는지, 온갖 감사의 말로 정중히 인사했다. 이어서 선사의 배려 깊은 약속을 전해들은 친천과 옆방에 모여 있던 마을사람들이 차례차례 선사 앞에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인사가 끝나자 젊은 가장은 말했다.


"그러면 스님, 스님을 혼자 남겨두는 게 몹시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희들은 물러가야겠습니다. 이 마을 법도로는 저희들은 누구 하나, 오늘밤 여기서 한밤중이 지날 때까지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는 없지만, 친절하신 스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또한 혹시라도 저희들이 없는 동안 뭔가 기묘한 일을 겪으시면, 아침에 돌아왔을 때 부디 일어난 일을 들려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무소 선사를 남겨두고 모두 그 집을 떠났다. 선사는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갔다. 정해진 대로 시신 앞에는 공물이 바쳐지고, 등불도 밝혀져 있었다. 선사는 경을 외고 홀로 법요를 치른 뒤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고요히 좌선했다. 인기척이 끊긴 마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깊어 주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질 즈음, 어렴풋이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이와 동시에 무소 선사는 소리지를 힘은 물론, 몸을 움직일 힘도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길을 돌리니 그림자는 양손으로 고인을 안아 들어올려, 시체를 우걱우걱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보다도 빨랐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머리카락과 뼈는 물론이고 수의까지도 먹어치웠다. 이 수상한 원령은 이렇게 시체를 다 먹어치우고 나자 이번에는 공물을 향하더니 이것도 다 먹어버렸다. 그러고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괴이하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무소 선사는 이들을 촌장 집 대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었아. 모두 차례차례 선사에게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 하나 시신이나 공물이 없어진 데 놀라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가장이 무소 선사에게 말했다.


"스님, 스님은 분명 한밤중에 불쾌한 광경을 보셨을 겁니다. 저희들은 모두 스님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상처도 없고 무사하시니 무엇보다 기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희들도 함께 이 집에 남고 싶었습니다만, 어젯밤에도 말씀드렸듯이 마을 법도에는 사람이 죽은 날 밤, 저희들은 시시만 남기고 이 마을에서 물러가야 한다고 엄격히 정해져 있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때는 늘 커다란 불행이 잇달아 생깁니다. 그리고 법도를 지켰을 때는 언제나 시신과 공물이 저희들이 없는 사이 사라집니다. 혹시 스님은 그 연유를 보신 게 아닙니까?"


그래서 무소 선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원령이 시신을 안치해둔 방에 들어와 시신과 공물을 먹어치워버렸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마을사람들은 누구 하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가장이 말했다.


"스님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꼭 같습니다."


그래서 선사가 물었다.


"언덕 위에 사는 그 스님은 여러분들 댁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를 올려주지 않습니까?"


"어떤 스님 말씀이십니까?"


가장이 물었다.


"어젯밤 이 마을에 묵으라고 저에게 길을 가르쳐준 스님입니다." 무소 선사가 대답했다. "저는 저쪽 언덕 위에 있는 노승의 암자를 찾아갔습니다만, 묵게 해달라는 청은 거절당하고 대신 여기로 오는 길을 들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의아하다는 듯이 서로 마주보더니, 순간 입을 다물었다. 가장이 말했다.


"스님, 저쪽 언덕 위에는 스님이라고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암자도 없습니다. 몇 대 동안 이 근처에 사신 스님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소 선사는 이 이상 아무 말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친절하게 맞아준 마을사람들이 그가 오는 길에 귀신이나 요괴에 홀렸다고 믿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동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길을 알려달라고 한 선사는 한 번 더 그 언덕 위의 암자를 찾아가 자신이 정말 홀렸던 것인지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암자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승이 무소 선사를 오두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선사가 안에 들어서자 노승은 선사 앞에 머뭇머뭇 엎드려 절하고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진정 부끄럽고, 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라고 하며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 제가 하룻밤 묵어가는 것을 거절하셨다고 그렇게 송구스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무소 선사가 상대방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스님께서 저쪽 마을에 가는 길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친절한 응대를 받았지요. 그러니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실은 저는 누구에게도 방을 빌려드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암자 주인이 대답했다. "제가 부끄러워한 것은 방을 빌려드리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볼 낯이 없는 것은 스님께서 이놈의 진짜 모습을 틀림없이 보셨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어젯밤 스님 눈앞에서 고인의 시신과 공물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스님, 이놈은 인육을 먹는 식인귀... 부디 가엾게 여겨주십시오. 대체 왜 이런 몸이 되었는지, 숨겨올 수밖에 없었던 죄를 말씀드리고 참회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주,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만, 저는 이 인적 드문 지방의 승려였습니다. 주위 몇십 리 안에 저 말고 승려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산 부근의 주민이 죽으면 다들 죽은 이의 시신을 여기까지, 때로는 몇십 리 길을 산을 넘어 떠메오곤 했습니다. 그것도 다 경을 올리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저는 경을 외는 것도, 법사를 거행하는 것도, 그저 먹고 사는 방편으로 해왔을 뿐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승직 덕에 먹고 입는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습지요. 천벌 받을 이 불신이 화근이 돼서 죽자마자 식인귀로 다시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는 이 근방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먹어치우면서 살아가는 업보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어젯밤 보셨듯이 먹어치워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님, 부디 이놈을 가엾게 여기셔서 아귀를 공양하는 법회를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입니다. 아무쪼록 스님의 기도의 힘으로 지금 이 무시무시한 모습에서 이놈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하더니 어느새 노승의 모습은 사라지고, 동시에 암자도 모습을 감추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무소 선사는 높다란 수풀 속 이끼로 덮인 오래된 무덤 곁에 홀로 꿇어 앉아 있었다. 무덤은 오륜탑 모양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어떤 스님의 무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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