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 어쩌면 그에게 천하의 삼분의 일을 날려버린 시발점이 된 작지만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서촉이라 이름하는 익주의 지도를 가지고 조조를 찾아간 촉 땅의 지식인 장송을 매몰차게 내쫓은 것이다. 고대에서 지도는 곧 일급 군사기밀었고 장송은 어리석은 군주 유장에 대하여 가진 비관론으로 인하여 백성의 이름으로 나라와 다름없는 지도를 조조에게 바치려 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구글 어스를 통해 가보지 않은 지구 반대편 도시의 사진도 볼 수 있고 GPS장치를 응용한 내비게이션으로 어디를 가든지 지도를 지참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근대 이전에 지도는 기밀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로 그렸다' 함은 현대의 언어로는 대충 그렸다는 말로 통용되지만 당시의 지도는 산을 넘고 사막을 횡단하며 바다를 건너거나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적진을 침투하여 그야 말로 발로 그려야만 하는 눈물과 시간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 들어있어 익숙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러한 발자국의 흔적이며 동서 문명 교류의 집합체이다.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나라인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만년설로 뒤덮인 산이 하나가 있다. 정식 명칭인 르웬조리산, 그곳 사람들은 산의 정상 부근에 쌓여 있는 눈으로 인하여 마치 달처럼 빛난다 하여 달의 산이라 부른다. 100여년전 영국인 탐험대에 의하여 나일강의 발원지로 증명된 이 산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동쪽끝 조선에서 만든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문명의 교류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활발한 대상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와 교역을 했고 그들은 아프리카의 사람들로부터 달의 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슬람 상인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조선으로 다시 넘어와서 하나의 지도로 완성된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도에 기록된 것에 따르면 중국에서 건너온 지도에 조선의 지도를 붙여넣은 합일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도제작에 많은 기여를 한 이슬람 상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다. 험한 바닷길인 인도양을 자유롭게 넘나 들며 아라비아 반도의 특산물인 유향을 내다 팔았고 그들의 발길이 동쪽 끝의 나라인 신라에게까지 미쳤다. 불국사 석가탑의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아라비아의 특산품 유향이 그 증거이다. 그들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당시로는 최첨단의 항법장치인 카말(Kamal)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거친 바다를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 덧붙여 아랍인들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통해 교리는 물론이고 학문도 가르쳤다. 수천년전 그리스 문명의 산물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했던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지도 또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아랍 문명을 꽃피우고 바다를 통해 이를 다른 문명에 이른 전파한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인도, 중국의 해안선들이 비교적 정밀한 것도 그들이 수없이 지나간 교류의 흔적들을 지도로 완성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호기심이 만든 탐험이라는 기억의 조각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만족하지 않고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산 혹은 바다 넘어의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과감히 내던진 까닭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던져진 곳을 향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그만 행장에 의지하여 과감히 떠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탐험이라 불리우는 이러한 인간의 활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를 낳고 이질적인 문명을 하나로 접합시켜서 더욱 숙성된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킨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많은 물건들이 이러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또한 수없이 제작 되어진 많은 지도들도 이러한 문명 교류의 기억들이 하나로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다르지 않다. 뒷 사람에게는 낯설음의 공포를 없애주고 더 먼곳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던 지도는 인간의 위대성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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