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깨고 아침밥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는 척 하는 날
살포시 안아 깨워주는 그녀의 목소리.
5년을 연애하다 결혼한 지 3개월쯤이 지났지만
우리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아끼고 늘 새로움으로
대하는 사이였다.
우리들은 연애할 때도 주변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싸움한번 한적 없는
잉꼬 커플로 유명했다.
알면 알수록 언제나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은 언제 어디서
보여 질지 모른 다는 걸 우린 서로에게 배우며 살게 되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영화를 볼 때에도 길을 걸어갈 때에도
난 그 사람에게 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 사람 또한 나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다.
그 생활은 간혹 우리 둘 사이의 깜짝 이벤트로도 서로를 놀래 켜기도 했다.
서로 변치 않는 모습으로 사랑하는 우리 둘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질투와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 우리 둘은 언제고 변치 않을 거라는 것만이
진실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니 나는 이 행복이 영원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날 사랑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가 조금씩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날 피해 받는 전화
퇴근했을 때 내가 온지도 모른 체 컴퓨터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채팅하던 것 같은 모습.
인기척에 후다닥하고 놀래듯 꺼버리는 컴퓨터.
누구와 통화했냐고 묻기도 누구와 채팅했느냐고 묻는 것도
우리 둘을 의심하는 거라 생각한 나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다.
집에 하루 종일 있는데 소일거리 삼아 채팅하는 것 마저
꼬투리 잡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출근을 해도 외출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와 연애할 때에도 나와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요즘 내가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오는 날이 가끔씩 생겼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친구들 만나서 커피숍에서 수다 떨다 왔다고 한다.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나.스스로 위안삼기 위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날 피해 받는 누군가인지도 모르는 전화.
누구 길래 그렇게 피하면서 받느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그저 친구라고 말할 뿐 이었다.
더 이상의 변명도 말도 늘어놓지 않는다.
다만 그냥 친구 전화라는 말로 끝을 내며 나에게 안긴다.
외출도 한 달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하던 그녀가
요새는 일주일에 한번은 꼭 외출을 하고 내가 퇴근하고서도 한두 시간
정도 뒤에 들어오게 되었다.
연애할 때부터 한 번도 전화연결이 되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요 근래 들어 한 번씩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은 그녀의 외출 날이었다.
이제 지겨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라도 생긴 것일까?
화가 난다기 보다 뭔가 허무하다는 그냥 슬프다는 느낌만 들뿐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의심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멈추고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언제나 그녀의 자상한 애인이자 남편으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이 한 달째 접어 들 무렵 간만의 주말.
등산이나 하러 가자는 나에게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좀 있다 나갔다가 늦게 들어올 거라 말했다.
난 그저 알았다고 말하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혼자 다녀오겠다며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나 보다.
조금 전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던 그녀가
누군가와는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등산도 잊은 채 난 집 앞에서 서성대기 시작했다.
두 시간여를 그러고 있다가 집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외출을 하려나 보다.
난 얼른 계단 위로 뛰어올라간 직후 그녀가 집을 나왔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내 핸드폰을 확인해봤지만 아니었다.
어디 데이트라도 가는 사람처럼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살짝 진한 화장의 그녀.
"응 어디야? 우리 집 다와가? 좀만 기다려 지금 내려가고 있어.
그 이? 왜 신경 쓰여? 호호호 농담이야 농담.
혼자 등산 간다고 그러더니 아까 전에 나갔어.
글쎄 요새 약간 눈치는 챈 것 같은데.응,…….응,…….
당연히 모르지…….음 우울해 보이긴 하던데…….
불쌍하긴…….호호호호 준비는 다 됐어? 응…….응?
안 돼 이때까지 비밀로 잘 해왔는데 그 이 절대 눈치 채면 안 돼.
응,……. 우리도 조만간 끝내야지. 그 이 몰래 이러는 것도 이제 지친다. 지쳐.
응? 호호호호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었어? 됐어 다 내려왔으니까 끊어."
뭔가 즐겁게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과 약간 오해할 만한 내용의 전화통화를 들으며
내 이성은 점점 붕괴되어 가는 걸 느꼈다.
그녀 몰래 그녀를 미행하는 나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파트 1층 현관이 보이고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타는 그녀.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친구였다.
그녀가 탄 차가 움직이자 난 얼른 주차 돼 있는 내차로 달려가 따라가
버렸다.
내가 뒤에 따라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듯 그녀의 밝게 웃으며
수다 떠는 모습이 얼핏 얼핏 보였다.
배신감
차라리 모르는 놈이랑 만날 것이지.
어찌 해야 될지도 모른 체 난 그저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교외로 빠지는 그녀와 내 친구.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연애 한때 한 번씩 가던 펜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니길 바랬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내 친구와 그녀를 태운 차는
너무 정직하게도 펜션으로 가는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뒤에서 본 그 둘의 모습은 다정한 연인처럼 가깝게 때론 입맞춤이라도 하듯
가까이 붙어 있었다.
운전을 한지 40여분이 지났을 무렵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는 질문에 커피숍이라고 답하는 그녀.
오늘따라 기분이 우울하다고 나중에 전화하겠다며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깔깔대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뒤에서 따라 가는 줄도 모른 체.
이미 난 분노와 배신감으로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펜션이 가까워질수록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조차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질문에 이제 집에 다와 간다고 답했다.
밥해놨으니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서 먹고 쉬고 있으라고 했다.
한두 시간 정도 연락 안 될 테니까 일 다 보고 전화하겠다며 말하고 끊는 그녀.
왜 한두 시간 정도 연락이 안 되는지 알 것 같다.
내 분노를 숨긴 체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점점 가까워지는
펜션 가까이에 차를 주차시켜놓은 후 숨어있었다.
다른 펜션도 있는데 만약 다른 곳으로 간다면 모른 척 하겠다고 그렇게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를 태운 내 친구의 차는 그녀와 내가 가던 그 펜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주차를 하고 미리 예약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둘은 망설임 없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 둘을 쫓아갔고 펜션 정원에 놓여있던 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둘을 쫓아가 손에 쥐어진 삽으로 그 둘의 머리를 내리쳤다.
미친 듯이 그 둘을 내리치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펜션에서 나와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꺼지라고 소리치며 삽을 휘두르던 내가 본건
날 말리려는 사람들이 모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이었다.
아직도 꿈틀대는 친구와 그녀
그런 나와 그 모습을 보며 경악해하는 내 친구들. 그녀의 친구들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경찰차 소리인지 아니면 응급차량 소리인지
피범벅이 된 그녀와 내 친구.
나 또한 그들의 피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체 서있었다.
삽을 떨어뜨렸다.
무릎을 꿇고 나와 그들을 죽 훑어보았다.
우리를 둘러 싼 또 다른 친구들의 모습.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모습.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있는 녀석의 모습.
그 중의 한 녀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 멱살을 잡고 펜션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열린 방문 사이로 내가 본건
풍선들. 선물 꾸러미들. 그리고 현수막.
현수막에 적힌 것을 읽어보고 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내 이름이 적혀있는 그 뒤에 축 임신 이라는 단어.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나의 아이를 가졌다는걸 나에게 놀래 주려고 했나보다.
깜짝 이벤트였나 보다.
단지 나 하나 놀래 켜 주기 위해 내가 놀래고 기뻐할 이 순간을 위해
내 어깨를 잡은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며 멈춰있던 시간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밖에 피범벅이 된 그녀가 생각이 났다.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달려 나갔고 구급차에 실리는 그녀의
발끝만 보였다.
난 끝내 오열했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떠올리고 나서
맨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그런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일으켜
세우고 수갑을 채웠다.
날 알던 사람들은 어느새 각자의 차량으로 구급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모두 떠나고 없었다.
이제 속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단 한순간의 의심으로 행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죄였다.
친구는 그때 즉사였고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죽어버렸다.
재판도중 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고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사는 임신한 그녀와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나는 항소를 포기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지 얼마 안됐을 때 면회 온 친구의 얘기였다.
그녀는 임신3개월쯤 됐을 때 병원에서 그 사실을 알았고
외출과 안 받았던 전화는 산부인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깜짝 이벤트로 그날 다 모인 후 펜션으로 날 부르려고 했었다고 했다.
연애 때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면회 온
친구는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가 돌아가고 난 한 달 뒤 변호사가 찾아왔다.
변호 하는데 비협조적이고 모든 걸 체념하고 자기변호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이 딱해보였던 것일까?
그는 다시 항소 하자고 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내 저었다.
진실이야 무엇이든.
완벽한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겐 나밖에 몰랐던 그녀를 위해.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해야 된다.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으로 기억되더라도 그녀는
언제나 깨끗한 존재여야 하고 나밖에 몰랐던 불쌍한 여자였다고
기억 돼야 한다.
그녀도 죽은 친구도 나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의 비밀…….
내가 무정자증으로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