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은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당장 망령의 물건을 없애기 위해 노승이 가르쳐준 길로 내려왔다.
태규의 계획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틈에 망령의 물건을 없애는 것이었다.
원래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으나,
여전히 정문 입구를 막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정원에 있는 개구멍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관리인으로부터 아버지가 구로다의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할 수 없이 2층인 자신의 방에서 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외출하기를 기다렸다.
집 밖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친일행적과 부정을 일삼았던 아버지 김주용을
나오라며 소리쳤다.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 아버지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많이 변하셨구나?
예전 같았으면 순사들이 와서 모두를 잡아가고 난리 났을 텐데...
하긴 세상이 변하긴 많이 변했으니까.”
하지만 태규가 그렇게 생각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꽤 많은 수의 경찰들이 나타났다. 태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그것을 지켜봤다.
많은 경찰들이 집 앞에 모인 몇몇을 연행하려 했다.
집 앞의 사람들이 그런 경찰을 붙잡으며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서로 얽히고설켜 소란스러웠다.
“탕!!!”
순간 총성이 울렸다.
경찰들을 지휘하는 간부로 보이는 자가 하늘에 대고 공포탄을 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총을 보자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이며 침묵했다.
연행되는 사람들의 가족들만이 안간힘으로 경찰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무자비한 공권력에 나가떨어졌다.
태규는 이것이 무슨 일인지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오는 순간,
안에서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김주용을 발견했다.
“요시, 요시... 계획대로 아주 잘 되고 있구만?
버러지 같은 새끼들... 누구 덕분에 먹고살고 있는데 말이야.
매국노? 민족의 반역자? 바카야로...
이 나라 경제를 살린 것이 누구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지...
역시 조선놈들은 일본을 따라가려면 한 참 멀었어. 쯧쯧...”
태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겨, 아버지를 더욱 지켜봤다.
김주용은 사분오열로 와해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혀끝을 차며, 비웃었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이서장.. 수고했어.
나로서는 명분이 필요했네. 그래서 녀석들을 잡아넣을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힘쓰는 경제영웅에게 민족의 반역자라니...
이건 곧 국가를 부정하는 일이지 않은가? 역시 빨갱이들이야...
오늘 잡아드린 새끼들 분명 빨갱이들이야, 단단히 조사하게.
분명 김일성이 사주한 증거들이 나올 걸세...
빨갱이들 입 벌리게 하는 방법은 물고문이 최고라지? 허허허허...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들과 연관 된다면... 가족이며 친구며 모두 잡아 드리게.
빨갱이들.. 언제까지 매국노니, 민족의 반역자이니.. 그런 소리 하나 보자고...
그리고 오늘도 한 놈 준비해놓게나, 빨갱이의 최후를 보여주지...”
태규는 순간, 꿈 속에 나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붉은 머리, 새하얀 피부, 붉은 눈 화장...
그리고 광기 서리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왠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본능적으로 지금 당장 망령의 물건을 없애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관리인이 들어왔다.
“회장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김주용은 알았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관리인이 나가자,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베는 동작을 반복했다.
“시니나사이, 시니나사이.... 시니나사이!!!!!!!”
(죽어라, 죽어라... 죽어랏!!!!!!!!!!!!!!!!!!!!!!)
허공에 있는 뭔가를 벤 김주용은
있지도 않은 칼을 곧게 치켜세워 얼굴에 가까이 댄 후,
요상하고 기괴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태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다.
빨리 아버지가 목욕하러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구로다의 물건을 빨리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요오시, 후우... 요오시, 후우...”
김주용은 숨이 가빠오는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갔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태규는 당장 망자의 방으로 향했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손에는 노승에게 받은 단검을 꼭 쥐었다.
그것은 복숭아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목검이었다.
“처사님, 분명 망령은 당신이 아버지를 이어 자신을 모시길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놈이 진정 원하는 것이지요. 세대에 세대를 이어 자신을 모시는 것,
그래야 보잘 것 없는 잡귀가 신(神)이 될 수 있기 때문이요.
그러니 처사님이 망자의 물건을 없애버린다는 걸 안다면 크게 분노하겠지요.
분명 일본의 망령이 처사님 앞에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땐 이 단검으로 망령을 찌르시오.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요...”
태규는 매우 긴장이 되었다.
이것이 성공한다고 한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겠지만
실패한다면 잔인한 역사가 반복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여기서 내가 끝내야 한다...”
당장 구로다의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날따라 문이 잠겨있었다.
“에잇 젠장...”
하는 수 없이 손잡이를 부수기로 했다.
하지만 손잡이가 어찌나 단단한지, 좀처럼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던져 문에 부딪혀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 아무래도 연장을 들고 와야겠군..”
그러나 이미 연장을 들고 왔을 때는 아버지가 목욕을 마치고
몇몇과 함께 구로다의 방에서 망령에게 제를 올리고 있었다.
태규는 매우 아쉬움에 한 숨이 나왔다.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하는 수 없이 늦은 밤이나, 새벽에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다시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긴장을 한 것 때문일까, 온 몸이 피로했다.
잠깐 침대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얼마나 잔 것일까...?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나서 서둘로 방을 내려왔다.
“어떻게 된 거람,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할 때가...
한시가 급하거늘... 아니야, 별일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마 아버지가 간밤에 헛된 짓을 할 리가...”
태규는 급한 마음에 아버지를 찾았다.
어제는 아버지가 없기를 원했지만, 오늘은 아버지가 집에 있기를 바랐다.
어머니와 동생은 병원에서 열리는 자선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나갔고,
그것을 알려준 관리인도 인부들과 황토를 구하기 위해 산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방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태규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혹시 자고 있으면 당장 망령의 물건을 없애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웠지만 걸음이 빨라졌다.
문 앞에 당도하여 문을 열려는 순간, 진득한 뭔가가 손에 묻어 있었다.
이상한 마음에 천천히 손을 올려 보았다. 피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였다.
놀란 마음을 진정 할 수 없어 떨리는 손으로 여닫이문을 열었다.
아버지 김용주가 곤히 자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벗어놓은 옷을 보았다.
기모노에 검붉은 핏자국들이 물들어 있었다.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태규는 자신도 모르게 망령의 방으로 향했다. 예감이 이상했다. 문이 쉽게 열렸다.
“철커덕...”
고약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마자 태규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단 위에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 머리 서너 개가 접시에 담겨 있었고
누군가가 제단 중앙에 앉아서 뭔가를 먹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 같았다.
태규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외투 속주머니에서 노승에게 받은 단검을 꺼냈다.
“아나타가 구로다가?”
(당신이 구로다인가?)
구로다는 인간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은 듯 씹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태규를 조롱하려는 듯 어린 아이 표정을 지으며 ‘쩝쩝’댔다.
척추를 다쳐서 등이 심하게 굽어 있었지만
쉽게 공격할 수 없을 만큼 빈틈이 없었다.
구로다는 계속해서 태규를 조롱했다.
얼간이의 표정을 지었다가, 눈을 모았다가, 눈동자를 흰자만 보이게 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인육을 ‘쩝쩝’대며 씹었다.
그럴수록 입 안에서 터진 핏물이 입 주위에 묻었다.
“그만해!!!”
태규는 분노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제 당장 구로다의 물건들을 태우고 없앴어야 하는데 뒤늦게 후회가 됐다.
노승이 하는 말을 지금에 와서야 이해했다. 어리석었다.
재단 위에 있는 시신들은 어제 집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친일파인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다가 빨갱이로 몰려 죽은 것이었다.
태규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모든 분노를 단검에 담아 구로다에게 달려들었다.
구로다는 단검을 보자, 그제야 힘겹게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태규의 약을 올리듯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히히히히히...”
구로다는 태규의 검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도 일본도를 뽑아 들었다.
순간 겁이 났지만, 태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분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게 죽어간 수많은 동포들과 자신의 아버지를 짐승으로 만든 것을 생각하며
피가 거꾸로 솟았다. 더 이상 구로다의 장난은 통하지 않았다.
태규의 적극적인 공격에 구로다는 당황했다. 그리고 결국 빈틈을 보였다.
“푸슉!!!!!”
정확히 단검이 구로다의 왼쪽 가슴 위를 찔렀다.
구로다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태규의 꿈에서 본 것처럼
검은 눈물과 검은 토사물이 흘렀다. 구로다는 요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지 마라.
방금 것은 우리 아버지를 짐승만도 못한 자로 만든 것...”
태규는 한 번 더 단검을 들어 구로다의 가슴팍에 사정없이 꽂았다.
단검이 거침없이 파고들어간 자리에 유전이 터지듯 검은 피가 솟구쳤다.
“이것은 죄 없이 죽어간 조선의 동포의 것...”
구로다는 검은 토사물이 역류하듯 입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 이것은...”
태규가 마지막으로 구로다를 향해서 단검을 꽂으려는 찰나,
날카로운 장검이 태규의 얼굴로 날아왔다.
운이 좋아서 순간적으로 피했지만, 얼굴을 살짝 베였다.
처음에는 붉은 핏방울이 꽃처럼 피어오르다, 이내 폭포수처럼 흘렀다.
당황한 태규는 피를 닦으며 자신을 공격한 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아버지 김주용이었다. 아니, 이미 망령에게 영혼을 판 친일파 구로다였다.
이미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붉은 귀신처럼 보였다.
망령 구로다는 바닥에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구로자를 보자,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제단 뒤로 숨어버렸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저 아들 태규입니다.
아버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태규라고요.”
아픈 마음을 부여잡으며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김주용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칼을 치켜세웠다.
마치 살인에 굶주린 살인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태규는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쓰러트려서라도 망령을 없애야만 했다.
하지만 김주용은 망령 구로다와 달랐다.
움직임이 매우 빨랐고 힘이 너무 강했다. 단검으로 맞서기에는 무리였다.
“와따시와다이니뽄테국노 무시다, 시니나사이!!!”
(나는 대일본제국의 무사다, 죽어라!!!)
붉은 살인귀 김주용의 일격에 태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김주용의 칼이 아들의 어깨부터 아랫배까지 갈라버린 것이다.
순식간 피가 뿜어져 나왔고, 태규는 서서히 눈이 감겼다.
그제야 숨어있던 망령 구로다가 튀어나와 죽어가는 태규를 보며 비웃었다...
끝나지 않는 지배 6부에서 계속....
PS : 혹시라도 기다리셨는지요. 오늘도 조금 늦었네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조금 전에 끝냈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저의 이야기를 좋아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글 쓸 맛이 생깁니다. 더욱 빨리, 더욱 재밌게 못 써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끝나지 않는 지배는 꽤 길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써보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