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셨던 동필이 형(별명)이 해준 이야기가
‘장산범’이었단 사실을 말이다.
무더운 여름 날,
동필이 형이 장난삼아 이야기 해주던 그날의 희귀한 이야기...
그러니까...
2004년 여름방학이었다.
고등학교 국어선생인 동필이 형은 그날도 뿔이 났다.
“새끼들 진짜 너무하네?
이 새끼들 참말로 고3 맞나? 어째 수능 100일을 앞두고,
보충수업을 빼먹노? 하... 참... 이 새끼들 진짜 안 되겠네?”
교실에 남은 학생은 단 5명뿐이었다.
그 반의 학생 수가 37명이었으니까, 32명이 땡땡이를 깐 샘이다.
날은 덥고, 제자들은 땡땡이를 치고...
아들뻘 되는 학생들을 일일이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겠다, 고마 장산 언저리에 캔 맥주를 사들고 올라가서
죽이 잘 맞는 고쌤이랑 노가리나 까는 것이 인생의 참맛이 아니던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쌤한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술이라면 빼지도 않는 양반이
날씨가 비올 날씨네, 곧 흐릴 것 같네... 하면서 자꾸 빼는 것이었다.
“에이 고쌤, 날도 더운데 장산에 가가지고 얼음에 맥주 담가 놓고
닭 한 마리 뜯어야지? 술이면 환장하는 양반이...
와 빼노? 내 사라고 안 할게!!!”
뭔가 불안하다고 했던 고쌤이었지만 동필이 형이 산다는 말에 결국 나오기로 했다.
두 선생은 해가 지기 전에 두 손 가득히 맥주와 통닭을 사들고서
장산 아래에 있는 공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둘은 서둘러 맥주와 치킨을 뜯으며 노가리를 까기 시작했다.
둘은 워낙 친했지만 성향이 너무 달랐기에 한 가지 주제가 나오면
주거니 받거니 옥신각신 했다. 유독 그날은 학생들 체벌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남선생은 너무 오냐오냐 하니까 문제인 것이여...
고런 싸가지 없는 자식들은 싸다구를 날려서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봐.”
동필이 형은 그저 고쌤을 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크흐흐흐... 그런다고 아 새끼들이 공부할 것 같나?
고마 선생으로서 경고는 하지만... 보충학습 도망가는 걸로 때리기에는
내사 마 맹분이 없다 아이가?
공부사 할 놈은 다 알아서 하고, 안 할 놈은 지 먹고 사는 거 찾아간다.
다만, 사람 할 짓 못하는 새끼들은 고마 몽둥이 들어야지? 안 글나? 고쌤?”
고쌤은 동필이 형이 못 마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노가리를 안주 삼아 술을 퍼마셨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마시다보니 어느새 캄캄해졌다.
하늘에는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이제 없었다.
그러더니 고쌤이 주섬주섬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쌤, 이제 맥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요것만 마시고 가지?”
초빼이 동필이 형은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쪼매만 기다리라. 내 퍼떡 가서 소변 좀 누고 올게...”
그 많은 맥주를 본인이 거의 다 마셨으니, 당연지사였다.
소변 줄기가 끊길 줄 몰랐다. 한참을 일을 보고 있는데,
화장실 문 앞에서 고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동필이 형은 고쌤이 맥주를 많이 마시고 취한 줄 알았다.
“뭐라노, 고쌤? 니 많이 취했나? 니도 마이 죽었네? 술주정도 하고...”
그런데 고쌤이 또 동필이 형한테 말을 걸었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원래 고쌤 성격상 지나간 것을 말하거나, 반복해서 말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동필이 형이 고쌤을 잘 알기에 직감적으로 이것은 고쌤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고쌤이라서 의문이 갔다.
아니, 그것도 계속 들으니 분명 목소리는 고쌤이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그르르릉..”
미묘하게 말 끝에 고양이나 삵 같은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싹한 마음에 천천히 화장실 입구를 돌아봤다.
사람처럼 보였는데, 백발의 여자가 화장실 입구에서
머리만 빠끔히 내밀며 동필이 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 조명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곱고 하얗게 보였다.
혹시나 잘못 보았을까, 안경을 고쳐 썼다.
하지만 여전히 백발의 무언가가 씨익 웃으면서 동필이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선생 애새끼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
그것은 계속해서 고쌤의 말만 반복했다.
동필이형과 눈이 마주치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굴만 봐서는 분명 사람이었다.
백발을 한 평범한 40대 여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몸은 산짐승처럼 네 발로 다녔고, 온 몸이 흰 털로 덮여 있었다.
그것이 일본괴담에 나오는 요괴처럼 목만 길게 빼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필이 형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는데...
여간 요망한 것이 아니었다.
“남선생은 너무 오냐오냐 하니까 문제인 것이여...
고런 싸가지 없는 자식들은... ”
술자리에서 했던 고쌤의 말을 반복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동필이 형은 뭔가 위험을 감지했다.
그것이 고쌤을 따라하며, 한 번 몸을 웅크렸다.
나이 50이 넘어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분명 사람은 아니었고, 귀신도 아닌 것 같았다.
길게 뺀 목을 360도 돌려가며 얼굴을 시계방향으로 움직였다.
눈과 입의 위치가 바뀔 때 쯤 더욱 그녀의 얼굴이 무서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남선생은 너무 오냐오냐 하니까 문제인 것이여...
고런 싸가지 없는 자식들은...”
유달리 고쌤의 그 말을 계속 따라 해서
동필이 형은 무서운 것도 무릅쓰고 그 요망한 것에게 물었다.
“그...그래서 우짤낀데?”
그것은 눈웃음을 지으며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칼칼칼... 칼칼칼칼... 칼칼칼... 칼칼칼...”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뼈와 살을 발라서 먹어야지!!!”
그것은 고쌤의 목소리가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사람의 얼굴은
흡사 사나운 맹수의 얼굴로 변해서 동필이 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필이 형은 재빨리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러나 그것이 문 위의 빈틈으로 목을 빼들어 얼굴을 내밀었다.
해괴망측한 웃음을 지으며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로
뼈와 살을 발라 먹어야 한다며 동필이 형을 희롱했다.
미친 듯이 입을 벌리며 얼굴을 들이미는데,
오로지 휴지통으로 그것을 막아댔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을까,
그것이 한참을 동필이 형을 흘겨보다가 머리를 밖으로 빼며 사라졌다.
동필이 형은 무서움에 사로잡혀 화장실 안에서 벌벌 떨었다.
바로 그때, 고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화장실 안에서 들려왔다.
“어이, 남선생... 괜찮은가? 빨리 나가세...”
동필이 형은 나갈 수 없었다. 그가 고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어디 다친 건가? 괜찮은 겐가?”
고쌤은 옆 칸에 있는 변기에 올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영락없는 고쌤이었다.
“아이 씨...펄...”
동필이 형은 그제야 나왔다.
고쌤은 동필이 형의 손을 꽉 잡고 빨리 나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급하게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이미 밖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쌤은 동필이 형의 입을 막으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어딘가 쯤에 걸어가서 손짓을 했다.
공원 한 복판에 뭔가 허연 것이 앉아서 덩실덩실 거렸다.
하체는 땅에 그대로 있었고,
상체는 춤을 추듯 빙글빙글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눈에는 라이트를 킨 것 마냥 빛나고 있었는데
동필이 형과 고쌤이 있는 곳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저.. 저게... 도대체 뭐꼬?”
고쌤은 동필이 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선생, 저것이 장산범이야...
사람목소리를 흉내 내서 먹이를 홀리게 한다는 장산범...
잡히는 순간 뼈도 못 추리고 그대로 당해버리지.
아주 요망한 것, 내 처음 부산에서 선생 되고 한 번 봐서 알아...
그런데 저것은 유독 별나네, 그려.”
고쌤은 계속해서 자신의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뽑으며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누린내를 장산범이 싫어한다면서 태웠다.
후각이 좋은 장산범이 누린내를 맡았는지,
동필이 형과 고쌤이 있는 쪽을 노려보며 요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칼칼칼... 칼칼칼칼... 칼칼칼... 칼칼칼...”
동필이 형은 괴상한 것을 경험하고 계속 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도 머리카락을 뽑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비가 와서 불이 잘 붙지 않았지만 손에 물집이 나도록 라이터 휠을 돌렸다.
냄새가 많이 역한지 그 요망한 것이 ‘칼칼칼...’거리며 산 속으로 도망갔다.
눈 깜짝할 사이였고, 순식간에 산 속으로 간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선생님은 택시를 탈 때까지 머리카락을 태웠다.
고쌤이 말하길...
장산범은 머리카락을 태우는 냄새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불붙이기 힘든 비 오는 날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술 약속을 처음에 거부를 했는데, 설마 장산범을 만날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동필이 형이 화장실에 갔을 무렵...
고쌤은 혹시나 동필이 형이 술에 취해서 넘어지지 않을까,
계속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동필이 형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웬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엉덩이를 실룩대며
남자 화장실 앞을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하게 호기심보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생김새가 자신이 총각시절에 본 장산범과 비슷했다.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동필이 형을 보고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데... 곧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서 태운 것이었다...
장산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