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x년 장마철, 부산 영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아내를 먼저 보내는 심정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잊지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가버린 윤삼이었다. 삶에 덧 없음이라도 느껴진 것일까, 허한 마음이 울컥하고 요동쳤다.
“숙희 엄마야, 고마 내도 따라가면 안 되겠나? 당신도 없는데 살아서 뭐하겠노?”
죽어버리려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찰나, 외동딸 숙희가 식사를 챙기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또 왜 그러는데요? 그러지 말고 여기 죽이라도 좀 드세요. 미영이 이모가 아빠 드시라고 죽을 써 왔어요.엄마가 돌아가셔서 슬프지만 아빠까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딸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숟가락을 들고 숙희가 차린 밥을 억지로 먹었다. 걱정하는 딸의 얼굴을 보니,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숙희야. 아빠가 힘내 볼게, 미안하다.”
윤삼이란 자는 아내와 딸 밖에 모르는 팔불출(八不出)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줄 하나에 의존한 채 높은 건물에도 올랐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던 것일까? 얼굴도 본 적 없는 삼촌이란 사람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 받으면서 한 순간에 돈벼락을 맞았다.
태생이 착한 윤삼은 변하지 않았다. 부자가 된 이후에도 검소하게 살았고 여전히 아내와 딸이 전부였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평소 몸이 약한 아내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좋은 약을 써보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라, 그 동안 못해준 것들이 미안하고 후회되었다. 아내가 죽은 이유가 자신의 탓 같았다. 가난 때문에 아내가 딸을 놓고 산후 조리도 못한 채 나물을 캐다가 판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졌다.
49재를 치르던 날, 윤삼은 또 다시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그런 모습을 본 숙희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나마 엄마가 살아생전에 덕을 많이 쌓았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특히 엄마랑 가장 친했던 미영이 이모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거들었기에 어렵지 않게 엄마의 장례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숙희도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처럼 수십 번 정신을 놓을 뻔 했다. 그러나 미영이모가 힘이 되어주었기에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윤삼은 몸져누웠다. 아내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누워있는 내내 아내를 잊지 못해 불러댔다. 외동딸 숙희를 비롯한 사람들은 윤삼이 실성이라도 할까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비바람을 뚫고 의사가 찾아와서 진정제를 놓았다. 이내 부르르 떨다가 잠이 들었다. 약효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강했는지, 일반 사람들 보다는 한참동안 버텼다.
요란한 바람소리와 빗소리만 들리던 밤, 어딘가에서 한 맺힌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정제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목소리에 눈을 뜬 윤삼은 귀를 기울였다.
“우리 여보,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흑흑흑...”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아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윤삼은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당신, 당신 맞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곳을 반복해서 찾았다. 죽은 아내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바로 그때, 창문 밖에서 여자로 보이는 그림자가 ‘스윽’하고 지나갔다. 당장 창을 열었다. 밖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흐릿한 불빛 뒤로 누군가가 마당 복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다... 당신 맞나? 참말로 당신 맞는기가?”
어두운 밤, 지붕 밑에 있는 흐릿한 불빛 하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내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당장 무덤에서 나온 듯 흰 소복에 긴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멀어져만 가는 모습에 윤삼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창문을 넘었다. 질퍽거리는 흙 때문에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아내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애타게 윤삼을 부르기만 할 뿐, 점점 멀어져만 갔다. 윤삼이 미끄러운 빗길을 한 걸음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내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마당을 뒤지며 큰 소리로 불렀다.
“여보, 당신 어디 있노?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봐라. 내 여기 있다. 여보, 여보.”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숙희가 뛰쳐나왔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성을 잃은 아버지가 맨발로 마당을 헤집고 다니는 광경을 보자, 마음이 무너졌다. 숙희 역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를 집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 팔을 당겼지만 소용없었다.
“숙희야, 너희 엄마를 봤다. 여기에 서서 내를 불렀다. 참말로 너희 엄마였다.”
아버지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온 힘을 다해서 아버지를 겨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제야 남은 주사의 약효가 들었는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문제는 이날을 시작으로 윤삼은 비가 오는 밤이면 죽은 아내가 나타났다며 난리를 쳤다.
숙희는 불안함과 무서움에 미영을 불렀다. 그녀도 부녀(父女)가 걱정이 되었는지, 한 걸음에 달려왔다. 안정이 될 때까지만 집에 있기로 한다니 숙희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날이 윤삼의 증세는 심각해졌다. 비가 오는 밤이면 죽은 아내가 자신을 부른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며 딱하게 여겼다.
여느 때처럼 장마 때문에 비가 멈출 줄 모르는 밤이었다. 윤삼은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바라봤다. 아내의 그림자가 서있었다. 얼굴이라도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창을 열려고 했지만 귀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며 아내가 거절했다. 윤삼은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어디냐며 반가워했다. 죽은 아내는 흐느끼며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여보, 부탁이 있어요. 흑흑흑... 살아생전에 풍족하게 누리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恨)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보, 죽어서라도 마음 것 돈을 써보고 싶어요. 오십만 원을 저의 무덤 아래에 묻어주세요. 흑흑흑...”
윤삼은 당장 해주겠다고 허락했다. 죽은 아내의 부탁이었기에 금고가 있는 방에 들어가 현금을 꺼냈다. 겨우 오십만 원으로 한을 풀겠냐며, 백만 원을 꺼내어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지 않던 캄캄한 밤에 아내의 무덤 아래에 상자를 묻었다. 이후 윤삼은 아내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 날 아침, 윤삼이 멀끔한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그 동안 아내를 잃은 뒤 씻지도 않아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제법 돈 있는 집의 사장님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밥도 많이 먹고 삶에 의욕을 보이는 것이 숙희와 미영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의 부위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 했다.
하지만 그해 장마는 유독 길었다.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비에 불안한 기운이 온 동네를 감돌았다. 이번에는 무언가 심술이 났는지 천둥과 벼락까지 뿌려댔다. 숙희는 어린 시절부터 낙뢰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서 잠도 못자고 벌벌 떨고 있었다. 장마가 야속했다. 하필 이모도 본가에 일이 있어서 집에 없는데, 하늘에게 자비란 없다. 참다 참다가 결국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따라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자신의 방에서 아버지의 방까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거실바닥을 밟았다. 그리고 조심히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유리창 밖에 서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숙희는 이상한 낌새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어쩌면 비 오는 밤마다 엄마의 혼령이 찾아온다는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그림자는 목소리부터 말투까지 돌아가신 엄마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침착한 성격의 숙희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여보, 고마워요. 흑흑흑.... 그런데 이백만 원이 더 필요해요. 박복한 인생, 한(恨) 좀 풀어줘요.”
숙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살아있을 적 엄마는 돈에 미련이 없던 사람이었다. 가난하던 부자가 되던 늘 성실히 사는 것이 최고라고 강조했으며, 자신이 죽으면 가장 소박하게 상을 치르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큰돈이 생긴 뒤,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안 된다며 베풀고 나누었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가장 존경하고 잘 아는 딸이기에 그녀는 엄마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윤삼이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걸 본 숙희도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요란스런 밤하늘이었지만 왠지 여기서 멈추면 진실은 영원히 떠나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 아버지는 엄마의 산소(山所)를 찾았다. 랜턴을 들고 주위를 경계한 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엄마의 무덤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이 든 상자를 파묻었다.
“여보, 살아생전에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도 당신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뭔가 해줄 수 있어서 내한테는 천만다행이다.”
윤삼은 행여 상자가 빗물에 들어나지 않도록 돌덩이로 틀을 만든 뒤 정성스레 쌓아올렸다. 그리고 아내의 무덤에 두 번 절을 했다.
“여보, 사랑한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 내는 당신이 귀신이라도 괜찮다. 다음에 나타날 때는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참말로 보고 싶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자니 숙희는 마음이 찢어졌다. 오죽하면 저럴까, 그만하고 아버지가 내려갈 때 함께 뒤따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불빛 하나가 ‘깜박’하고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순식간의 일이지만, 이상하고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이 캄캄한 밤에 빛을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분명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아버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어떤 감각이 진실을 이끄는 것 같아서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불빛이 깜박인 곳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아버지가 엄마의 무덤에 손을 흔들고 모습을 감출 때 쯤, 다시 불빛이 켜졌다. 이번에는 깜박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랜턴을 켠 채, 저벅저벅 내려오고 있었다. 불빛이 직선으로 눈을 비춰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혹여나 모습이 들킬까, 최대한 몸을 낮추고 시선을 때지 않았다.
의문의 인물은 엄마의 무덤 아래로 내려가서 아버지가 쌓아 올린 돌을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랜턴을 땅에 놓고 정신없이 땅을 파헤쳤다. 랜턴의 빛이 모습을 조금씩 비출 때마다 숙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죽은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짐과 동시에 반가움이 밀려왔다. 당장 엄마가 있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그러나 숙희의 발은 몇 걸음을 앞두고 멈췄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엄마가 아니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반가움은 순식간에 공포로 변했다. 마치 독사에게 물린 듯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정체는 평소 자신을 챙겨주던 미영이었기 때문이다. 세워둔 랜턴의 불빛에 비친 이모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마치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게걸스러워 보였다. 눈은 심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하얀 치아를 드러낼 정도로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숙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신도 놀랐는지,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미.. 미영이.. 이모... 도대체 왜...”
미영은 랜턴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일어났다. 마치 일부러 겁을 주려는 것처럼 숙희를 노려보며 웃었다.
“숙희야, 숙희야...”
숙희는 미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구역질이 났다. 죽은 엄마와 목소리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살가웠던 미영이 이모는 이제 없다. 그저 돈에 미친 무서운 여자만이 눈앞에 서 있을 뿐이다.
“숙희야 많이 놀랐지? 내가 너한테 들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으히히히...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니? 너희 집 돈도 많은데, 내가 좀 가져가면 안 되니?”
미영은 일부러 숙희에게 겁을 주려는 듯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가슴팍 어딘가에서 날카롭고 예리한 칼을 꺼내었다. 그 모습이 흡사 어릴 적에 듣던 처녀귀신처럼 보였다. 위기를 감지한 숙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쏟아지는 장맛비 때문에 도망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흙이 가지마라며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반면에 미영은 살기(殺氣)를 가져서 그런지 집요하게 숙희의 등 뒤까지 따라왔다.
숙희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온힘을 다해서 뛰었지만 도착한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더 이상 도망 갈 곳이 없었다. 미영은 숙희에게 랜턴을 비추며 서서히 걸어왔다.
“숙희야, 왜 도망가? 나 이모야, 미영이 이모...”
숙희는 무서움이 온 몸을 뒤덮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려달라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쏟아지는 빗소리에 소리는 멀리 퍼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곳은 인가(人家)와 매우 떨어져 있었다.
“이모, 왜 그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또 다시 랜턴을 스스로의 얼굴에 비추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미영이었다.
“내가 왜 그러겠니? 돈 때문이지. 너 죽이기 전에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 해줄까? 너희 엄마가 진짜 병 때문에 죽었을 것 같니?”
평소 숙희 엄마를 친언니처럼 따랐던 미영은 윤삼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 받은 사실을 알자, 탐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숙희 엄마에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아프다느니, 동생 육성회비를 내야 한다느니 거짓말을 하며 만 원, 이만 원씩 빌렸다. 숙희 엄마도 지병 때문에 매일 찾아와서 수발을 드는 미영이 고맙고 미안해서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돈의 액수가 미영이 갚을 능력을 넘어서자,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 말에 이성을 잃은 미영은 결국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저질렀다. 숙희 엄마가 먹는 죽에 복어 독을 탄 것이다. 하필 지병의 증세가 심해 진 날, 그것을 먹고 고통스럽게 죽어버렸다. 모두들 의심하지 않고 지병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윤삼이 의사를 불러서 살려보려 했지만, 미영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며 살리지 못 한다며 말렸다. 물론 동네에서 꽤 유명한 의사까지 매수한 미영은 지병으로 죽은 것처럼 꾸몄다. 다시 말해서 치밀하게 숙희 엄마의 살인을 준비 한 것이었다.
어쩌면 숙희 엄마는 윤삼의 정성스런 보살핌에 완치도 가능했다. 물론 컨디션에 따른 증상이 좋지 않은 날이 있었지만, 차도를 보이면서 회복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알량한 자격지심이 죽인 것이다.
이후 그녀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 졌다. 돈에 욕심이 멀어 살아생전 숙희 엄마의 목소리나, 행동을 따라하며 윤삼에게 그녀의 원혼인 척을 했다. 오로지 목적은 돈이었다. 윤삼이 가진 큰 돈을 빼앗을 생각에 걱정보다는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희를 돌본다는 핑계로 윤삼의 집 안에 들어와서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시킨 것이었다.
“너희 아빠는 착한거니, 미련하니? 덕분에 손쉽게 큰돈을 손에 넣었지만 말이야...”
미영이 모든 진실을 말하자, 숙희는 이성을 잃었다. 미영이 흉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려들었다. 숙희는 미영의 머리를 잡아 뜯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다. 미영도 이에 질세라 날카로운 칼로 숙희의 팔을 찔렀다.뒤늦게 위협을 느낀 숙희는 아픈 팔을 움켜잡으며 미영의 곁을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영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땅에는 랜턴만 떨어져 있을 뿐 사방이 캄캄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공터 구석에서 숙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이 밀려왔다. 떨어진 랜턴을 주우며 사방을 둘러봤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 겁에 질린 승희를 보니 미영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것을 들은 숙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 있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탓에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모든 감각이 미영을 찾기에 곤두섰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사방에서 들리는 빗소리 때문에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랜턴으로 이곳저곳을 저으며 광기에 휩싸인 미영을 찾았다.
이상하게도 옆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랜턴으로 비췄다. 아니나 다를까, 미영이 땅 속에 든 상자를 찾을 때처럼 게걸스런 미소를 지으며 튀어나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막을 겨를이 없었다. 놀란 나머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랜턴에 비친 미영의 몰골은 영락없는 귀신이었다.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소복을 입은 모습, 숙희의 손톱에 긁힌 얼굴에는 피가 범벅이었다. 숙희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숙희야, 숙희야...”
미영은 숙희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일종의 조롱이자 숙희를 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집어 들었다. 숙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엄마를 부르며 눈을 찔끔 감았다.
“쾅”
한 차례 벼락이 치며, 숙희의 비명이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숙희가 조심히 눈을 떴을 때, 미영은 사라지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둘러보았다. 미영이 삼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갈비뼈를 잡고 웅크리고 있었고 어떤 남자가 그런 미영을 주시하며 큰 돌멩이를 쥐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보는 순간, 숙희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리며 일어났다. 숙희의 아버지인 윤삼이었다. 뒤이어 랜턴으로 추정되는 불빛 여러 개가 숙희가 있는 곳을 비췄다.
“윤삼이 행님, 숙희야? 도대체 우째 된 일이고?”
윤삼은 숙희 엄마의 무덤 아래에 돈을 묻어두고 집으로 가던 길에 누군가가 비를 맞고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고 있어서 측은한 마음에 우산을 주려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언덕 위를 향해 대뜸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녀를 쫓아가서 얼굴에 랜턴을 비췄다.
윤삼은 경악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숙희 엄마였던 것이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윤삼을 노려 본 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윤삼은 심하게 놀랐지만,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말을 걸며 따라갔다. 처음에는 그녀가 돈을 확인하려고 자신의 무덤에 가는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손가락으로 공터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윤삼을 보며 숙희 엄마가 말했다.
“어서, 어서요. 숙희가 죽어요.”
그 말에 윤삼이 눈을 찡그리며 숙희 엄마가 손짓 한 곳을 응시했다. 해괴망측하게 생긴 여자가 하나 밖에 없는 혈육(血肉)인 숙희를 해치려고 다가가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서 어깨로 여자의 갈비뼈를 심하게 밀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윤삼은 그녀가 미영인 줄도 몰랐다. 그저 다시 딸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발밑에 있던 돌멩이를 집었다. 숙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아내의 혼령을 찾았는데 그녀는 사라지고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지반이 약한 곳이 걱정되어 보러가던 도중, 뭔가에 홀린 듯 아내의 무덤으로 가는 윤삼을 발견했다. 그들이 본 윤삼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 듯 넋을 잃고 비를 맞으며 걷는데, 흡사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뒤쫓아 왔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일이 일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미영은 살인죄로 형을 살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윤삼에게 사기를 친 돈으로 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 같다. 다른 지역에 집도 사고, 차도 구입하고, 보석에 비싼 옷까지 온갖 호화로운 삶을 누리다가 결국 죗값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죄를 뉘우치기 보다는 숙희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올라서 허공에 대고 욕을 하기도 하고, 나가면 가만 안 둘 것이라며 살인계획도 세우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 화병(火病)인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인지 모르겠으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에 죽어버렸다.
윤삼과 숙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또한 숙희 엄마의 묘도 다른 곳에 이장을 했다. 그 동네에 살던 모두가 그날 이후, 윤삼과 숙희 소식을 전혀 듣지 못 했다. 그들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으나, 충분히 이해가 되는 삶기에 먼저 찾거나 연락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아직도 회자가 되는 것은 윤삼이 죽은 아내의 영혼을 보고 딸을 구했다는 것인데,정말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비 오는 장마철이면 창밖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PS : 무더운 더위 잘 보내고 계신지요. 바쁜 일에 치이고 지병에 문제가 생겨서 고생하다가 설상가상으로 슬럼프까지 얻게 되어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글자, 한 글자 억지로 꾹꾹 눌러 쓴 내용이라서... 무책임한 말이지만 재밌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봐주셔요. 다음에는 '끝나지 않는 지배'로 찾아 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무더운 더위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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