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했던 수시 발표날이 다가왔다. 이 날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왜 평범히 수능을 치루지 않고 수시를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낮은 퍼센테이지에 뭔갈 걸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우리 학교의 특성상 수시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 뭔갈 해내고 싶은 약간의 반항심도 한 몫 했다.
애초에 난 실전에 강한 타입이 아니다. 지난 3년간의 공을 들여 한번의 수능으로 모든걸 걸기엔 내가 많이 부족했다. 요행? 그래 요행이라고 하면 되겠다. 우연히 담임에게서 들은건데 이번에 수시 지원률이 꽤 낮아서 난 할만할 거라고 했다. 게다가 난 상업고등학교다. 일반적인 인문계 아이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아닌..
“인한아. 겜방가자.”
어느새 다가온 창수가 앵겨 붙었다. 세상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의 걱정이 모두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야. 너 공부는 하고 있냐? 그러다가 재수한다.”
“공부는 무슨. 나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할건데? 선생님이 연계시켜줄 기업이 있다고 했어.”
창수는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대체 저런 여유만만한 태도는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건지 원.. 가끔 녀석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긍정적인 것과 낙천적인 것은 꽤 다르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에휴. 그것도 어느정도 성적이 커버되어야 적당한 기업에 들어갈거 아니야. 너 같이 바닥을 치면 말야 골라갈 기업도 없다고. 그리고 면접 준비는 했어?”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야, 겜방 갈거야 말거야. 그것만 말해.”
애석하게도 창수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다. 나와는 정반대로.. 나쁘게 말하면 입을 잘턴다는 건데 그게 사회에 살아감에 있어서 꽤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고 담임에게 듣곤 했었다. 담임은 나와 절친한 창수를 두고 비교 설명을 잘 해주곤 한다.
[인한이 같은 경우에는 이런 부분을 조금만 고치면 될 것 같아. 그래. 예를 들어 창수의 그런 부분 있잖니.]
비교 대상이 바로 지척이 있는지라 이해가 쉽게 되기는 한다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쁜건 사실이다. 솔직히 난 녀석과 동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앞서면 앞섰지..
“야 너네 겜방가냐?”
어느새 다가온 상훈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상훈이는 여러면에서 우등생이기 때문에 담임에게 기대를 받고 있는 놈이다.
“응. 왜?”
“같이 가자.”
“엥? 네가?”
“어. 스트레스 쌓인다.”
그 말에 창수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우리를 이끌었다. 서둘러 교문을 나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상훈이가 진중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너네 그 소문 들었냐?”
“뭐?”
“우리학교 밤 12시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더라.”
전형적인 옛날 귀신 등장 패턴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창수도 마찬가지었는지 듣는둥 마는둥 하며 걸었다. 하지만 상훈이는 아니었나보다.
“진짜라니까. 근데 특이한게 뭔지 아냐?”
“뭔데?”
“1층 중앙 복도에 큰 거울 있잖아.”
상훈이의 말에 나와 창수는 몇 번 고개를 까딱거려야했다. 평소 잘 드나들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1층..이라. 그래. 아주 가끔 교무실로 드나들 때 커다랗고 빛나는 거울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밤 12시가 되는 순간 그 거울 앞에 서면 귀신들이 보인대.”
그 말에 창수는 코웃음을 쳤다.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상훈아. 너 아직도 그런거 믿냐? 대학은 붙었나보지?”
“아, 그거랑은 상관 없잖아. 가뜩이나 심난해 죽겠구만..”
“그래서 최근 괴담에 대해 공부하고 다녔냐? 어휴 화상아.”
창수는 듣는척 마는척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상훈이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곧 내게 다가왔다.
“인한아. 오늘 같이 가보자.”
“..뭐?”
태생이 집돌이인 나의 일과는 하교후 모든게 끝이 난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정말 특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나가는 일이 없는 내게 상훈이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더군다나 밤 12시? 가당치도 않는 소리지.
“그렇게 궁금하면 너가 가서 확인하면 될거 아니야. 괜히 엄한 사람 붙잡고 있어.”
“아, 무서우니까 그렇지.”
“무서우면 안가면 되지. 임마.”
“그래도 궁금하잖아. 괜히 괴담이겠어? 뭔가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괴담이 생긴거라고. 너네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동안 학교 다니면서 여기저기 소문을 모은게 있단 말야.”
상훈이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이거 좋지 않은 징조다. 이대로 겜방에 가는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태가 일어날수도 있다. 물론 아쉬운건 어디까지나 창수겠지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겜 좀 하면서 얘기하자.”
묘하게 나와 창수의 마음이 통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상훈이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인생의 단 한번 뿐인 고3의 시간을 이런 미신을 흘려듣는거로 보내기엔 내 자신이 너무나 아까웠다. 물론 게임을 하는건 그와는 별개지만.
***
오늘은 운이 좋다. 특별히 창수와 게임을 해서가 아니라. 묘한 괴담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은근히 기대했던 수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나름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합격한 난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합격 통보 문자를 훑어 보며 내 앞에 깔려진 치킨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남들에게는 평범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경사에 속한다. 애석하게도 대학 출신이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최초로 대학교 진학에 성공한 아들이 나왔으니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기뻐하셨다.
“인한아. 이제 가서 열심히 해야 돼. 아, 용돈 올려줘야겠네. 그리고 옷도 좀 사야겠다.”
“당신도 참.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해도 돼.”
눈 앞에서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부모님을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효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좋은 기분 상훈이에게 베풀어주기로 했다. 적당히 치킨으로 배를 채운 뒤 집 앞 공터로 나와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낮의 일 때문인지 목소리가 축 가라 앉아 있다.
[상훈아. 나 붙었다.]
[그래? 축하한다.]
놈의 목소리에서 영혼이 없다. 아마 조금 삐친것 같다.
[가자.]
[어디.]
[학교.]
내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활기찬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뒤흔들었다.
[진짜지? 진짜 가는거지? 너 거기서 기다려. 지금 갈테니까. 야 택시타고 가자. 내가 낼게.]
[빨리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 상훈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 변하면 안된다는 당부 아닌 당부의 말을 끝까지 했다. 이렇게 된거 창수도 불러보는건 어떨까. 아마 내켜하지 않겠지만..
[인한이~]
창수 목소리 너머로 게임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녀석은 항상 게임에 빠져 살곤 한다. 뭐 게임은 자기 인생에 전부라나 뭐라나.
[나 붙었다.]
[어? 진짜?]
[응. 상훈이랑 학교 가기로 했다.]
[엥? 너무 급전개잖아. 합격한거랑 학교가는거랑 뭔 상관이야.]
[이럴 때에 기분이라도 써야지.]
내 말에 창수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녀석의 심기를 건드린건가?
[같이 갈래?]
[아, 나는 괴담 같은거 안키우는데..]
[뭐 어때 달밤에 운동하는 셈치지.]
[알았으. 갈테니까 기다려.]
이건 의외다. 창수가 게임을 마다하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마 상훈이 녀석 꽤나 좋아할거다.
공터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도 잠시 헐레벌떡 뛰어오는 상훈이와 곧 이어 도착한 창수가 눈에 보였다. 상훈이는 의외의 창수 모습에 꽤 기뻐했다. ‘역시 넌 내 친구들이야.’ 하고 우리들에게 강한 포옹을 한 뒤 택시에 올랐다.
“00고등학교요.”
“00고등학교?”
운전 기사 아저씨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거기에 우린 적당히 답했다. 곧 택시는 출발하기 시작했고, 상훈이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웃어댔다.
“그나저나 의외다. 무슨 과랬지?”
“정보처리과.”
“너 그거 할 수 있어?”
“몰라. 되는대로 넣은거라.”
그 말에 상훈이가 말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 배워가면서 하는거지. 인한이는 잘할거야.”
그게 눈에 보이는 칭찬임을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 왔어요. 학생들.”
곧 도착한 학교 앞. 느릿하게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진득하고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곧 이어 대금을 치룬 상훈이가 우리들에게 다가와 들뜬 얼굴로 말했다.
“다들 준비는 됐지?”
그 말에 우린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거로 답했다. 그게 잘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시간 여유는 있긴 한데. 어쩔래?”
상훈이의 말에 우린 ‘들어가자’ 라고 답했다. 남은 시간 동안 여기에 있어 봤자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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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작 [녹색도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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