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랑과 무생님아 보세요~ 쪽지에 대한 답글.

흑태자만세 작성일 07.09.27 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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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저에 인생담이란 머 크게 내세울것도 없고 자랑할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활랑님과 무생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적겠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리시니 아래글 부터 말 놓을게요...

 

인생이다보니 글이 좀 길어 이해해줘~

 

음 난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아서.. 5살때 아버지 어머니 이혼하셔서 아버지와 단둘이 자라왔어..

 

사연은 아버지께서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셔서 어머니와 헤어지신거고.. 아버지는 돈을 잘 버셨지만 어머니는

 

생활 벌이가 없으셔서 난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왓어. ㅎㅎ 그 당시 바람난 직장동료를 새엄마로 맞아들이고.

 

각종 핏박과 아동폭력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잠들기전에 항상 이불속에 들어가 울곤했지.

 

그와중에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배다른 남동생이 태어낫지만, 새엄마는 집을 팽겨치고 밖으로 나돌고

 

난 초등학교때 내 남동생 기저기와 밥을 챙겨 먹이고 업고 학교를 다녔어 ㅡ,ㅡ;; 그래서 그런지 배다른 동생이라도.

 

나에게는 친동생이상으로 소중했어. 동생역시 나를 무척 따랐지. 그러다 이번에는 새엄마가 바람이나서 내동생 5살때

 

이혼하게 된거야. 정말 그땐 동생이 보고 싶어서 죽고 싶을 정도 였지... 결국에는 전라도 쪽으로 새엄마와 동생은 내려가서

 

더이상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는 일때문에 지방에 자주 다니셨고, 나를 보살필 사람으로 고모랑 살게 되었지...

 

근데 이 고모께서 놀음을 너무 좋아해서 사람들 불러다 화투치고 이사실 아버지가 알게되면 날 죽도록 팼지..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곳곳에 그당시 학대 당한 흉터들이 여기저기 있어. 결국 고모의 그런 꼬라지를 보기 싫은 나는

 

고등학교때 머리크다고 고모한테 대들다고 아버지한테 죽도록 얻어 맞아봣어.. 결국 진실을 아신 아버지와 고모와 bye~

 

이런 가정환경 탓에 공부좀 할려고 해도 핑계이기는 하지만 공부를 못했어.. 아니 너무 내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저서

 

하지를 않았지.. 근데 그래도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나의 친어머니 때문이야. 같이 살지는 못해도 나 자라오면서.

 

내 주위를 지켜주시고 챙겨주셨거든. 나에게는 의지할 곳이란 엄마 뿐이 었거든 나의 이런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시면서

 

내 앞에서는 눈물을 안보이시는 강한 어머니 였지만.. 엄마 주무시는 이부자리는 항상 젖어 있었거든..

 

그럼 아버지를 원망하시나요? 이런 말 듣는다면. 난 절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어. 물론 상황을 이렇게 만드신 분이지만.

 

그래도 나를 끝까지 챙기신분이고 나를 키워주신분이거든 그 당시 강하고 감히 고개를 들지를 못햇던 아버지이시지만.

 

지금은 하염없이 흰머리와 주름은 기본이고 내 앞에서 큰소리치시던 모습은 사라지신게 너무 안타까운 마음뿐이야.

 

덕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미래에 내 모습을 이때서야 설계하기 시작했지. 

 

자라온 과정도 독특하고, 집안도 어려웠으니가...

 

그 당시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상황들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지거든.

 

암튼 나한테는 5살때 부터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힘들면서도 추억이 되기도 해. 그와중에도

 

나에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생기더라. 그 여자가 지금 만나는 여자가 되서 너무 행복하지만 말야.

 

지금도 애인한테 고맙다고 그래. 이여잔 전화 끝날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냐고 하는데.

 

한번 나를 차줘서 고맙다고 내 곁에서 내가 너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지 어제저녁에 후후후.

 

근데 그때는 여자친구한테 한번 거절당했을때 워낙 냉정했거든. ㅜㅜ

 

그 이후 역시 아무리 맘만 있어도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해도 내 현재 위치에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4개월간 패인생활 하고 그녀를 잊으려고 오히려 인생을 즐기기로 했어. 힘들고 괴롭다는 감정 예전에는

 

더했다. 지금 이런 상황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삶이 나를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게 하여도

나 스스로 이겨내어 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삶을 즐기자고 군대에서 쓰는말(피할수 없으면 즐기자)

 

거울 보며 스스로에게 마인드 컨르롤 하고 다짐했지.

 

마음이 약해질때마다. 말야 초심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리고 현실을 직시했지 지금 대학 나온다고 해서 그런저런 직장 다니는건 비전이 없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눈 앞에 공간이 아닌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주변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1년간 알바와 워킹비자

 

준비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ㄱㄱ싱. 꾸준히 언어공부에 매진한 형이지만. 정말 언어적차이 외국인과의 대화가 내 귀에는

 

외계 생명체와 대화하는거로 느껴젔거든 근데.. 한국에서는 외국인 나오면 피하고 그랬는데. 이젠 주변엔 미국인 천지야.

 

동양인(중국,일본)을 보고 한국사람인줄알고 반가워서 말걸어봤던게 수백번은되거든 ㅎㅎ.

 

활랑이 같은경우 호주에서 언어적으로 많이 힘들다고 했지? 넌 어쩌면 주변에 좋은 조건들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활용을 안하는거 같아. 자신감을 가지고 외국인이 자기 죽이려 달려들지 않으니까 걱정말고 먼저 대화해.. 대화중에

 

못알아 듣거나 모르는건 메모하고 그날 당일 숙지해서 다음에 대화할때 자연스럽게 하도록 노력해야해.

 

형 같은 경우. 처음 미국에 아는사람도 아무도 없고 여관 생활을 몇일 하다가 여관비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일자리 역시 구하지 못하고 물론 언어가 자연스럽지 못해서.. 거기도 외국인을 특히 동양인을 쉽게 받아 들이지

 

못했지. 밥값하랴 차비하랴 일자리 구하랴 알바에서 모은돈 순식간에 사라지던군 아낀다고 아꼇는데. 결국 최후에 수단

 

집에 전화 걸 수 있는 최소한의 달러만  은행에 저축하고 노숙생활이 된거지 한마디로 쌩그지 된거야 ㅎㅎ

 

무료 급식소를 찾아 배회하고 여기저기 전철 및 공원에서 잠을 청하고 문전박대 당하고... ㅎㅎ 근데 나 그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더라고. 주위에서 * 소리까지 들었으니가 ㅋㅋ 더럽지는 않아서 공중화장실에서 새벽에 사람 없을 시간에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살았거든 겉은 멀쩡했지. ㅎㅎ 그게 도움이되서.. 미국에도 외국인에 도움을 주는 기관이 있었던거야. 이미 내 수첩에는 샌프란시스코 지도나 다를 바가 없어서 찾는데는 어렵지가 않았는데 돈이 한푼도 없는 관계로

무임승차버스를 타고 갔지만 ㅎㅎ;

거기서 노숙자 생활로 익힌 생활영어로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하고 겨우 거지생활에서 벗어 나는데 11개월이나 걸렸어

 ㅜㅜ

 

그와중에 아는사람도 생기고 지인을 통해서 조그마한 커피숍에서 매장관리도 하고 룸메이트를 얻어서 생활했지..

이제 한숨 돌리면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공부에 다시 전념할 수 있게 되면서. 미현지 뉴욕에 현대자동차판매사원으로

취업성공 v-,-v

그 이후는 순탄대로 직선코스 였어.. 노숙자 시절때와 커피숍에서 손님을 상대한 경험을 가진 나에게는 딱인 직업이었고..

기대에 맞게 한달에 4대에서 6대 판매로 영업판매실적이 탑에 걸릴정도로 급성장한기시작... 그담은 더 이상 이야기 않할게

별볼일 없거든 ㅎㅎ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렵고 괴로운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말라고.. 죽고싶더라도 죽는게 사는거 보다 더 어려워.

오히려 어려운 일들이 너에게는 좋은 경험으로 나중에 너의 성공에 밑거름이 된다는거야.

누구의 말보다도 자신의 직접경험하고 느껴서 얻는 성취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니 활랑과 무생이도 나와 같은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맞보기를 바래.

이만 나 퇴근 시간이라 궁금한거는 쪽지로 시간날때마다 분활로 답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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