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과 티벳의 독립운동

쇼동쇼동 작성일 08.03.16 01: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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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C 티벳 중장기병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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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벳의 상징인   포탈라 궁

중국의 동북공정과   티벳  그리고 대한민국
티벳에서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면서 내심 몇년전  "우리가 살길은 중국의 분열이다"라고 쓴 글을 떠 올렸다.  현재 중국이 발전을 하고 있지만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발전 할 수록 수면 밑에 잠재되어 있는 중국의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라고 짐작해 왔던 터이다.  앞으로 예상으로는 티벳 뿐만 아니라  신장 위그루지역과 더불어서 내몽골쪽도   반 중국의 기운이 싹틀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그런의미에서   티벳에 대해서  다시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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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번(티벳)의  중장기병 모형


1. 토번과 신라
 
티벳은  사실 우리민족에게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나라였다. 그것은  676년  신라가  당시로서는 슈퍼파워였던 당나라를  물리치고 이기는데  티벳이 아주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대당전쟁 막바지  신라가  임진강 유역 칠중성에서  당나라에게 패배하고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  당나라의 서쪽이었던  토번(오늘의 티벳)이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로서 당나라는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전쟁을 치뤄야 했던 것이다.   7세기중반 당시 토번은  오늘날의 티벳과는 달리 강대국중의 하나였다.  그 이유는 토번이  당나라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무역로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의 목줄을 압박해오는데 당나라가 신라와의 전쟁에만 몰두 할 수 없었고  이렇게 티벳, 당시 토번의  당나라 공격은 신라로 하여금 역전의 전환점을 제공해 준 그런 나라이다.

2. 티벳과 한국

오늘날   중국의  팽창은  실로 놀아울 지경이다.  과거 당나라의 재현을 이루려는 듯하다.  중국 무지막지한 팽창은  우리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중국이 강력한 통일국가로 성장할때 마다 우리는 그 화를 입었었다.  반면 과거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도  기실 그 내면엔  중국의 분열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볼때  중국대륙에서의 적당한 소란과 분열은  주변국가들 입장에선 숨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면에서  오늘 티벳에서의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준다면,  그리고 그 불길이  신장 위그루지역과 내몽골로 퍼져 준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3. 티벳의 역사
 

  가.  송첸감포라는 영웅의 등장과   당나라 문성공주


티벳의 역사를 보면 우리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음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티벳이 가장 역사적 고난을 겪었던 때가  몽골 침략때 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오고타이 칸의 둘째아들 쿠덴이  침략의 선봉에 섰었는데  동부티벳의 요충지 참도우(창도)를 함락시키고 티벳에 밀려들어왔다. 당나라에게도 짓밟히지 않았던 티벳은 처음으로 몽고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 때 티벳은 역사적 문화재 등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는데  마치 우리의 고려시대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대(漢代)에 티베트 고원에서 할거하면서 중국의 서부 지역에 출몰하던 유목민인 저강계(氐羌系) 부족들은 7세기 초 투보(吐藩.토번) 왕조의 송첸감포(松贊干布)라는 걸출한 영웅에 의해 통일되었다.   신라 문무대왕이  삼국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시기보다 약간 빠른데  송첸캄보의 위력은  당나라의 무역로를 쥐락펴락하였고  그래서 당나라 태종은 자신의 딸인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내면서까지  토번의 눈치를 봐야 했었다.

나.  공산중국의 티베트 침공


1912년 청나라가 붕괴되자,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40년 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티베트는 영국․몽골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 티베트 침공 중국군의 정치위원이 등소평이었다). 새로 수립된 공산 정권으로서는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는 티베트의 봉건적 통치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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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티벳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인민해방군(PLA)



  * 티벳트판   을사늑약인  서장화평해방조약 *

티베트는 UN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중국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한국전쟁에 여념이 없던 국제 사회는 티베트의 호소를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4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티베트는 1951년 5월, 중국군의 강점 아래서 소위 ‘서장화평해방조약’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했다.  이 때 중국의 행태는 덕수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체결을 강요하고, 이 조약을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적법하게 인준하지 않았음에도 ‘국제법상 유효한 조약’으로 우겼던 일제와 다를 바 없었다. 중국이 ‘침공’을 ‘화평해방’이라고 강변하는 것도 ‘침략’을 ‘진출’이라고 호도하는 일제와 닮았다.


다. 티벳의  독립운동 그리고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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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벳과 인도 접경지역에서  인도군과 마주선 모습

1959년 라사를 비롯한 티베트 곳곳에서 중국의 강점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8만7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봉기의 와중에 3월17일 제14대 달라이 라마(현 달라이 라마)는 수도 라싸를 탈출해 히말라야를 넘는 2600㎞의 대장정끝에 3월31일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중국 통치에 대한 평화적 저항과 세계적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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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 한국은  중국의 압력으로 달라이 라마 입국을 거절한 바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국 점령하의 티베트에서 중국에 대한 무력 투쟁, 중국 정부의 농정 실패로 인한 대규모 아사(餓死), 문화대혁명기의 종교 탄압 등으로 인해 120여만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한족(漢族)의 티베트로의 대량 이주, 중국 본토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철도 개설 등으로 티베트의 민족적 정체성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4. 중국의  동북공정
 
 앞으로  우리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도전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고 보여지는데   이 동북공정 조차도  티벳을 합병한 서남공정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티벳과  한국의 한가지 가장 큰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티벳은   내륙국이다.  바다가 없는 나라이다. 과거  티벳이 강성할때는  티벳은  실크로드라는  사막의 바닷길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반면 지금은 해양의 시대에  티벳은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티벳은   자신의 독립을 지지해 줄  우방국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반면 우리는  해양의 시대에 바다라는 길에 있고, 또한  미국등  자유진영이라는 든든한 우방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가장 큰 무기는  미국등 자유민주 해양세력의 일원으로서  든든한 연결성을 지닌  대한민국건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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