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그 현장추적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세력판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몇 안되는 역사의 분수령이 관산성 전투에서의 성왕의 전사다. 성왕이 사비궁궐에서 전선의 상황을 보고 받다가 태자 여창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하러 갔다면 절대로 신라의 매복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에서 태자 여창이 진을 치고 있는 환산성(고리성)으로 갔다면 성왕의 전사지인 구천(구진벼루)근처엔 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왕이 전사(戰死)한 곳이 왜 신라군이 바로 빤히 내려다 보는 관산성인가 하는 의문이 필자를 사로잡게 되었다. 그래서 관산성전투를 현지답사로 재고찰하게 된 이유였는데 그것을 이제 사실적으로 재조명토록 하고자 한다.
흔히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총지휘는 태자인 여창이 하고 성왕은 궁궐에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지만 성왕자신도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고 마찬가지로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면서 금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림설명 : 백제군의 퇴각로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백제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과 마주보고 서화천을 경계로 하여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서산성 -> 삼양리 토성-> 삼성산성(관산성추정) -> 용봉 -> 마성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마치 휴전선의 GOP삼아 백제군과 대치상태로 접어들었다. 옥천분지에 신라군의 주력이 집중하자 금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은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추적의 단서 - 금산군 주부면 마전리(馬田里)
백제의 성왕이 하필이면 왜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는 관산성 근처에서 달랑 호위병력 50명만을 거느리고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서적이나 자료는 그 어디서도 찿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자료에서 단지 삼국사기의 자료만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곳 관산성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여러가지 단서를 찿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옥천과 금산군 추부면을 연결하는 국도에 눈길이 끌렸다. 백제성왕이 전사한 구진베루라는 곳은 분명히 금산쪽에서 옥천쪽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자동차를 제쳐두고 버스를 이용하였다. 버스를 이용하게 되면 자동차를 직접 몰고 갈 때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여러가지 사항을 지역주민들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옥천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가기 위해 버스안내판을 보니 추부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기사에게 물어보니 "마전"으로 가는 표를 끊으란다. "마전" 한글로 표시된 것을 보는 순간 뭔가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마전에 내려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어르신 여기를 왜 마전이라고 합니까? "
"외지에서 왔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
"여기가 그 옛날부터 말(馬)을 사고팔던 장터가 있었던 동네라서 마전(馬田)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렇습니까? 어르신 고맙습니다"
나의 직감이 맞아 떨어진 순간이었다. 그길로 다시 시외버스에 올라서 옥천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금산에서 옥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충남의 명산 서대산이 한눈에 보이는 가운데 추부면 마전리에서 옥천까지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을 따라 거의 평탄하게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전리는 계곡사이의 넓다란 평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말을 기르기엔 아주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이로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충북 영동의 핏골에서 신라의 결사적인 방어에 막힌 백제 성왕은 가야의 기병을 이끌고 이곳 추부면 마전리로 후퇴하였다가 태자 여창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했을 것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금산 추부면 마전리에서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엔 백제의 주요 산성인 성치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 : 옥천에서 금산으로 이어지는 37번국도. 왼쪽이 현재 공동묘지인 연화원이고 바로 말무덤터이기도 하다. 바로 이고갯길에서 신라는 금산쪽에서 공격해온 성왕의 백제군과 혈투를 벌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산군 기록
삼국사기에 보면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군마보급지인 금산지역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관산성전투는 554년 7월에 끝났는데 그로부터 딱 2달후 백제의 복수전이 있었슴이 삼국유사엔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554년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여기서 진성은 오늘날 금산군 진산면이다. 그만큼 백제로서는 패전속에서도 금산지역만큼은 신라에게 넘겨 줄수 없는 사활(死活)적 지역이었던 것이다. 백제가 패전한지 2달만에 신라에게 설욕한 동력은 백제왕가(百濟王家)가 아닌 백제귀족세력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백제귀족세력 입장에선 금산지역만큼은 경제적으로 큰이익 달려 있기 때문에 신라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었던 것으로 필자는 군사경제적으로 추론해 본다. 아무튼 추부면 마전리는 백제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의 결정적 단서였다.
▽그림설명 : 백제의 보급로와 주요 산성
(현재의 주요 국도와 백제의 보급로는 정확히 일치한다) ↓
신라군이 옥천을 장악했어도 신라의 최전선은 삼성산(관산성)에서 용봉 마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성치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환산성과 노고산성으로 이어지는 보급루트는 백제가 관할하고 있었다. 이 보급로를 통해서 태자 여창의 백제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백제군은 서로 유기적 지원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이러한 백제군의 연결고리를 끊어야만 신라군의 작전이 용이해 짐을 신라 지휘부는 판단했다. 그 근거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은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다.
"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신라 지휘부는 태자 여창의 백제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연결로를 끊고자 했던 것이다. 일종의 차단을 통한 각개격파를 위한 작전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삼년산군의 비장인 고간 도도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말먹이꾼 고간도도는 삼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정예 기병이라 봄이 합당하다. 즉 기병이 주축이 된 성왕의 백제군에 맞서기 위해선 역시 기병이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군은 일종의 GOP격인 관산성과 이어지는 돌출부 바깥쪽에 삼년산성 소속의 기병부대를 주둔시키고 관산성까지 연결되는 방어 차단막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서기엔 " 길을 끊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설명 : 관산성과 구천의 구글지도 - 관산성에서 구천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신라는 차단막을 설치한다.
구천(구진베루)의 끝 서화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을 이곳에선 염장(殮場)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옛날 관산성 전투당시 전사자를 염을 하던곳이라서 염장터라 불리우는 곳이다. 그 말은 바로 이 염장터가 백제 성왕 일행이 신라 매복군에 걸려 들었던 바로 그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서화천이 휘돌아 나가는 그곳을 백제 성왕 일행이 지나는 순간 그 뒤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이 습격했을 것이다.
사진설명 :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구천(狗川), 구천이라 함은 흔히 말하는 실개천의 개천을 한자로 적을때 개구(狗)자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는 서화천으로 불리고 있다. 성왕은 굽은벼랑의 현지방언인 (구즌벼루, 구진베루) 밑에서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구진베루의 끝자락 돌아가는 부분이 전사자를 염(殮)했다는 염장터이다.
이곳 구천에서 신라복병에 사로잡힌 백제성왕의 죽음에 대해선 앞서 다룬바 있듯이 우리 역사서보다 일본서기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중 상당수가 백제엘리트 출신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서 백제 멸망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배층이 백제 역사서를 함께 가져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 이미 백제는 멸망하였기에 백제 지배층은 일본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면서 일본서기 편찬과정에서 백제의 역사를 함께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미 멸망한 백제보다는 새롭게 몸담게 된 왜의 입장에서 서술하다 보니 왜왕인 천황중심으로 기술했을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는 백제의 신라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기에 신라에 대한 서술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백제 성왕을 참수하게 되는 신라의 비장 고간도도를 말먹이 노비인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일본서기내용이 전혀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우리역사서가 전해주지 못하는 일정부분을 일본서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구천에서 신라복병에 참수되는 백제 성왕의 모습을 다시한번 보자.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이름은 곡지이다.
“고도는 천한 노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 다른 기록에는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수는 없다.”
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 다른 기록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추어 백제에 보냈다 한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백제성왕이 참수된 구진베루는 현재 지명이 옥천군 군북면 월전리이다. 월전리는 달골(月谷)과 군전리(軍田里)가 합쳐지면서 월전리(月田里)로 개칭되었다. 군전리(軍田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옛날 이곳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군전리라고 이름지어졌다 한다.
성왕 戰死후 신라 백제 전쟁의 급반전
성왕이 신라군의 매복으로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 주둔 성왕 휘하의 백제군은 필사적으로 신라 관산성을 총공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신라군의 방어막을 백제는 돌파하지 못하고 만다. 백제 기마군이 돌격을 감행하다가 저지된 그 자리는 말무덤고개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왜, 가야 혼성군으로 편성된 성왕휘하의 백제군은 아무래도 성왕의 전사로 말미암아 구심점을 상실한 가운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결과도 말무덤터가 전하는 그대로 백제의 패배로 이어진다.
사진설명 : 성왕휘하의 백제군과 태자 여창휘하의 백제군이 서로 합하지 못하게 차단작전을 신라군은 관산성과 구천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나갔다. 구진베루 뒤쪽에 성왕휘하의 백제기병을 막기 위한 삼년산군 소속의 신라 기병이 배치되었고 이는 성왕의 일행을 참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금산,추부,마전 지역의 백제군은 관산성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죽은 백제군의 수많은 말로 인하여 현재 말무덤고개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왕휘하의 추부 마전 성치산성 주둔의 백제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할때 환산(고리산)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태자 여창의 군대는 협공을 왜 안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 방도가 없긴 하다. 그러나 군사적 추론을 한다면 백제성왕이 급히 태자 여차의 군영으로 가고자 했던 점과 태자 여창이 몸져 드러누웠다는 사실, 그리고 전쟁 초기부터 백제귀족의 반대등을 고려해 보면 태자 여창은 고리산성에 주둔한 백제의 주력군에 대한 그당시 이미 지휘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신라는 백제군을 양분하고 각개격파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한번 백제성왕이 태자 여창의 군영에 가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백제 본기엔
성왕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치상 보기 50으로는 신라를 습격하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일본서기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수세에 몰리고 있는 형국에서 사사로운 부자간의 정리를 논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좀 부자연스럽다. 물론 아들 태자의 건강이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있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성왕이 보기 50으로 이동하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그림설명 : 백제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추적 (백제성왕은 사비궁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슴을 알수 있다)
이 내용의 감춰진 이면을 다시 살펴보면 전쟁초기 백제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대한 승리를 장담한 태자였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 정신적 압박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게다가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왕 직할부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 소속의 부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게다가 왜병과 가야군까지 함께 구성되어 있으니 젊은 태자입장에선 불리한 전황속에서 군사 정치적 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백제 성왕은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봄이 더 현실적이다 하겠다.
이는 비단 태자 여창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이 다시 규합하는 사태로까지도 비화될 소지가 있는 상황임을 성왕은 직감했을지 모른다. 전황보고를 받은 성왕은 사태의 심각성에 해가 지고 있는 저녁무렵임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급히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말을 몰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거리는 성치산성에서 태자 여창의 군영인 고리산성까지는 20km가 안되는 거리다. 말로 달리면 2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기에 백제 성왕은 해가 뉘엇뉘엇 져가고 있슴에도 출발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백제성왕의 머리속엔 어서가서 태자여창 군영의 상황을 점검하고 왜와 가야군 그리고 귀족수하의 지방군에 대한 여러 정치군사적 조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꽊 차 있지나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성왕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로서 군사적 측면으로 고려한다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신라가 성왕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길을 끊기위해 집결하였다는 말로 볼땐 성왕의 주 이동루트가 신라군에 간파되었다고 판단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2차대전때 태평양 전선을 시찰하러 가던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정보를 미군이 미리 파악하고 요격한 것과 비견될 수도 있다.
즉, 성왕은 성치산성에서 태자여창의 군영인 고리산성까지는 작전회의차 늘상 다니던 이통통로였기에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측근 소규모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 여창의 고리산성으로 이동하다가 신라 기병에 요격당한 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왕의 죽음이다.
반대로 보면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백제는 신라군의 이동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성립하는데 이는 정보전에서의 성패가 전쟁의 성패를 가른다는 군사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이다.
관산성전투는 554년 전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관산성 전투이야기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워낙 성왕의 죽음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성왕이 전사한 지역인 관산성전투를 554년 백제와 신라의 전쟁인 것처럼 삼국사기에서도 묘사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그렇고 어지간한 책의 내용도 삼국사기의 원문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왕 사절지(死節地)로 알려진 구진벼루와 관산성(삼성산)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과 사졸 2만9천6백명이 죽은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의 전투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대전쟁중 관산성지역에서 성왕이 전사한 것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삼국사기내용만 본다면 신주의 김무력군이 이곳 관산성에서 성왕의 백제군을 격파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강유역의 신라군이 관산성까지 오려면 중간에 백제 태자 여창의 군대가 있기에 바로 관산성에 올 수 없다.
어디까지나 성왕 휘하의 백제군은 주력군(主力軍)이 아닌 조력(助力)이었고 주력은 고리산성(環山城)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태자 여창 휘하의 백제군이었다. 따라서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과 태자 여창의 백제군이 맞붙은 전투가 관산성 전투의 최종 라운드였다. 그곳에서 554년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관산성 전투의 최고의 하일라이트는 이곳 관산성이 아닌 백제 태자 여창의 진영에서 있었으니 그것은 백골산 전투이다. 백골산. 이름 그대로 백골이 쌓인 전투이다. 이 백골산에서 신라의 신주군주 김무력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삼국의 세력판도를 바꾸게 된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