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물 전투기, 찬밥이 된 미(美) 탑건
세월이 변하니… 전쟁이 변하고… 하늘도 변하더라
빗발치는 대공포탄(對空砲彈)을 뚫고 적진 깊숙이 날아가, 목표물을 타격하는 폭격기 조종사.
영화 '탑건'의 주인공처럼 숨 막히는 공중전 끝에 적기를 격추하는 전투기 파일럿.
그동안 '공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랬다.
미 공군이 자랑하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 F-22 '랩터'는 이런 이미지에 완벽히 부합하는 무기다.
F-22를 공중전에서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는 지구 상에 없다.
F-22는 워게임에서 단 한대의 손실 없이 F-15, F-16, F-18기 144대를 격추했다.
폭격과 정찰 능력까지 두루 갖춘 이 다목적 전투기는 한 대에 1억4260만 달러(약 1717억원).
미 공군은 현재 183대를 보유한 F-22를 200대 추가 도입하는 게 숙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F-22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인다. 미 상원이 지난 7월 추가 생산을 중단시켰기때문이다.
표면상 이유는 천문학적 생산비용. 그러나 실제로는 보다 근본적이고 시대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F-22의 개발이 시작된 1981년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때로, 최신예 전투기를 앞세운 제공권(制空權)
장악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그러나 F-22가 실전 배치된 2005년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을 애먹인 것은 정규군이 아니라, 탈레반과 알 카에다 같은 비정규
전투집단이었다. 험준한 산악에 숨어 게릴라전을 펴거나 도심 한복판에서 자폭 테러를 감행하는 적들에게
F-22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F-22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단 1차례도 출격하지 못했다.
대신 프레데터·리퍼·글로벌 호크 같은 무인 정찰·폭격기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어둠 속에 이동하는 탈레반과 알 카에다 대원을 포착해 암살하는 데는 장시간 공중에 머물고 있다가 포착
즉시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하는 무인 폭격기가 제격이었다. 또 대형 수송기들도 요긴하게 쓰였다.
지형이 험하고 반군의 준동이 거세, 병력과 물자의 지상 수송엔 제약이 많았다.
전쟁의 이런 변화는 미 공군 참모총장의 출신 특기(特技)에서도 나타난다.
1947~1982년 재임한 10명의 미 공군 참모총장은 모두 폭격기 조종사였고, 이후 2008년까지 9명은 예외없이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지만, 이 전통도 깨졌다.
작년 8월 임명된 노턴 슈워츠(Schwartz) 미 공군참모총장은 대형 수송기인 C-130 조종사 출신이다.
미 공군의 임무가 제공권 장악과 융단 폭격에서, 공수(空輸)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음을 반영한다.
공중전을 공군의 존재 이유라 믿고, 수송을 '덜 화려한' 특기로 인식해온 미 공군으로선 충격적인 인사였다.
미 공군은 올해부터 일반 폭격기 조종사보다도 더 많은 수의 무인 폭격기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앉아 조이스틱(joy stick)으로 컴퓨터 게임 하듯이 모니터를 지켜보는 무인 폭격기 조종사가
미 공군참모총장 직에 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
이용수 기자 hejsu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