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포로의 귀환

후장킴 작성일 09.12.05 0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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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9월 8일,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서 까다로운 얼굴을 한 장신의 인물이 비행기에서 내려섰다. 

바로 서독의 총리 아데나워였다.

그가 교활한 흐루시초프를 상대로 이뤄내야 하는 임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소련측의 접대는 예상외로 훌륭했다. 그러나 양국간의 회담은 극히 냉랭한 분위기속에 이루어졌다.


1952년 3월 10일, 스탈린은 독일에서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경계로 한 통일된 중립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물론 이 제안은 서방에 의해 거부되었다.

당시 독일의 법적인 지위는 포츠담 선언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선언은 연합국측이 주권을 가진 독일 정부와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이전의 미봉책이라 할 수 있었다.


1955년 5월 5일 서독은 연합국과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주권을 정식으로 되찾았다.

이에 소련은 서독에게 자국과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서독 내부에서는 2개로 분열된 조국, 그리고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문제를 고착화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전쟁포로기념일까지 만들 정도로 시베리아에 끌려간 동포들의 귀환에 노력하던 아데나워는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상회담에서 소련은 아무런 조건 없는 국교수립을 요구했고, 아데나워는 전쟁포로 해방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회담은 점차 경색되어갔고, 거친 발언들이 오고 갔다. 흐루시초프는 "독일군이 소련 민간인들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는 야만행위를 저질렀다!"라고 비난했다. 이에 아데나워는 "붉은 군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라고 당당히 맞섰다.

이에 소련은 생존한 독일군 포로가 없다는 오리발 전략으로 전환했지만 협상 결렬을 무릅쓰고 예정보다 일찍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겠다는 아데나워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굴복하게 된다.

9월 12일, 소련은 포로 송환을 약속하였고 양국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은 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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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손을 잡은 아데나워


양국은 서로 대사관을 개설하여 정식 외교 관계를 열 것을 합의하였다. 소련은 내심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합법화와 동독 정부의 법적 지위 인정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추가로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데나워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1955년까지 소련에는 9,626명의 포로가 남아 있었다. 그해 9월 말, 자유로 향하는 귀환 열차가 포로 수용소를 출발하였다. 이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우크라이나, 폴란드, 동독을 지나 10월 9일, 조국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지나는 역마다 '조국의 아들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으며, 수천명의 환영객들이 운집했다.

독일 각지에서는 열광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1955년 10월 9일 포로들에 대한 공식 환영 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포로 대표인 에른스트 귄터 솅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벅찬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것을 우리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우리는 울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우는 이유는 지난 십 년 동안 겪은 고초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우리에게 보여 준 이 사랑과 신뢰가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입니다.

독일정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400만 장병들을 잊지 않겠노라고 답했다.

이때 귀환한 독일군 포로들 틈에는 전설적인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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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처음으로 본 딸

딸을 처음으로 본 아버지도 있었으며, 여러가지 영화같은 기막힌 사연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를 아래에 적어본다.

전쟁이 끝난후 노르망디 출신의 한 프랑스 처녀가 주소 한장을 달랑 들고 베를린으로 찾아갔다. 그녀의 애인은 베를린 출신의 독일군이었으나 전쟁 포로로 시베리아에 끌려간 것이다.

애인도 없는 집에서 눌러산 지 7년째 되는 어느날 아침 현관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그녀는 놀라운 것을 보았다.
 
그녀 앞에 정신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애인이 서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함께 외국인 의용 친위대원들도 송환되었다. 서독정부는 이들도 원할 경우 자국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스페인 출신 친위대원의 귀환을 무조건 환영한다고 발표하고, 위로금까지 지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출신 친위대원들은 대부분 서독에 남았으며, 네덜란드 출신들은 귀환을 선택했다.

서독 정부는 독일군으로 단 하루라도 복무한 사람들에게는 연금을 지급했으며, 전쟁 포로로 소련에 억류된 사람들은 추가로 보상금을 받았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 발트 3국의 무장 친위대 복무자들에게도 연금이 지급되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 포로로 붙잡혔다 귀환한 소련군 포로들의 운명은 독일군 포로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스탈린은 귀환병들 대부분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으며 이들중 상당수가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다.

126000034485292.jpg매년 4월 라트비아에서 열리는 Waffen-SS 베테랑들의 전몰자 추도 행진 - 이들 모두 독일 정부의 군인 연금을 수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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