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이라고 이름지어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3 ~ 4개월 내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스탈린을 우랄 산맥 동쪽으로 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발단 -
독일군의 초기 진격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지만 곧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특히 1941년 7월부터 9월까지 전개된 스몰렌스크 전투(Battle of Smolensk)는 독일군의 진군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도록 하였다. 스몰렌스크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육교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고,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로 독일 중앙집단군(Army group Center)은 총 24개 예비사단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독일 북부집단군(Army Group North)은 레닌그라드(Leningrad)에 발이 매여 소련군의 루가(Luga) 방어선 돌파에 한달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독일군에 비하여 비교적 전투력이 부족한 헝가리 및 루마니아 군이 많이 포함된 남부집단군(Army Group South) 또한 몇 차례의 반격에 직면하여 진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군(Wehrmacht)은 딜레마에 빠졌다.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중앙집단군의 단독 진격은 독일 방어선에 심각한 위험부담이 되었다. 또한 히틀러는 군의 보급을 위하여 우크라이나를 접수, 이곳을 통하여 식량과 물자를 공습받기를 원하였다.
Heinz Wilhelm Guderian
결국 국방군은 돈바스(Donbass) 지역을 먼저 점령한 후 모스크바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기갑군은 키에프(Kiev)를 공격하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를 지원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진로를 돌렸고, 소련군은 협공을 당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 1941년 9월 19일 철수하였다.
스탈린(Josef Stalin)은 키에프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거듭 되풀이하였지만 알렉산드르 바실리에프스키(Aleksandr Vasilevsky)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는 스탈린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며 철수를 주장하였고, 스탈린은 분노하여 주코프를 참모부에서 내쫒았다. 결국 소련군은 키에프에서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력을 잃은채 철수하였고, 독일은 키에프를 점령할 수 있었다.
키에프 전투(Battle of Kiev)는 독일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독일군의 전격전 계획은 더욱 지체되었다. 구데리안은 훗날 회상하기를 키에프 전투는 분명한 전술적 승리였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Operation Typhoon
- 타이푼 작전 -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 겨울이 가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다는 꿈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고, 1941년 10월 2일 태풍 작전(Operation Typhoon)이 발효되면서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의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를 향해 마지막 진군을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작전 개시 직후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3개월의 준비 끝에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 우리의 적들을 박살낼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오늘 우리는 이 해의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만 함락시킨다면 소련의 나머지 영토들은 곧 항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육군 참모부의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또한 1940년 남긴 기록에서 모스크바를 곧장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앙집단군은 제 2, 제 4, 제 9군으로 구성되어 제 2, 제 3, 제 4의 3개 기갑군 및 공군(Luftwaffe) 제 2 항공단의 지원을 받았다. 작전 투입 인원은 백만 명에 달하였으며, 1,700 대의 전차, 14,000 문의 화포, 950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은 두 갈래의 진격로를 취하였는데, 일군이 브야즈마(Vyazma)로 이동하여 소련 전방전력 및 예비전력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부대들은 브랸스크(Bryansk)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계획이 완료된 시점에서 모스크바의 북쪽과 남쪽으로 부대를 투입,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이 뒤따랐다.
그러나 독일은 보급 문제를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구데리안의 당시 기록에 따르면 독일 기갑군은 파괴되거나 고장난 전차들을 대신할 새 전차들을 지원받지 못하였으며, 연료 또한 부족하였다고 한다. 독일군은 수 개월에 걸친 전투로 지친 상태에서 또다시 3개소에 걸친 동시 다발적인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수비에 125만 병력과 전차 1,000 대, 화포 7,600 문, 항공기 677 대를 투입한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측에는 다행히도 숫자만으로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이 방어군의 포진은 엉망이었으며, 대부분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후방 예비 전력도 거의 없었지만, 바실리에프스키의 호언장담 덕에 독일은 전투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더구나 소련군 병사들은 전투 경험 없는 신병들이 다수였으며 대전차 병기와 같은 중요한 전투장비도 부족하였고, 전차 또한 구형이었다.
소련 지휘부는 르제프(Rzhev)와 브야즈마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브랸스크로 연결하였으며, 칼리닌(Kalinin)과 카루가(Kaluga) 방어선 사이에 모자이스크(Mozhaisk)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결과적으로 도시는 삼중의 방어선으로 보호되게 되었지만 방어선 구축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독일군이 들이닥쳤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채 전방위 상태로 전투를 진행하였고, 볼가(Volga) 근방에서 신규 사단들을 편성하여 수개월 내에 투입할 준비를 하였다. 이제 전투는 시간 싸움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서둘러 달려온 독일 제 3, 제 4 기갑군은 약점을 찾아 브야즈마 근방의 소련군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하였다. 구축이 채 완료되지도 않은 방어선을 돌파한 두 기갑군은 1941년 10월 10일 브야즈마에서 조우하였으며, 소련의 제 19, 제 20, 제 24, 그리고 제 32군을 포위해버렸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외로 이 포위된 소련군들은 쉽사리 항복하지 않았으며, 독일군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예비전력 28개 사단을 투입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포위된 소련군을 섬멸하는데 실패하였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련군들은 철수하여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합류하였는데, 소규모 병력은 물론 1개 소총사단 규모 병력이 집단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도 하였다. 소련군 일부는 브야즈마 근방을 떠나지 않고 독일군에 대한 산발적 공격을 진행하며 시간을 벌었는데, 덕분에 소련 지휘부는 제 5, 제 16, 제 43, 제 49군이 방어하고 있던 모스크바 방면의 방어선에 추가 병력을 조달할 수 있었으며, 극동으로부터 3개 소총사단과 2개 기갑사단 병력을 공수할 수 있었다.
브랸스크의 상황은 브야즈마의 상황보다 조금 나았다. 독일 제 2 기갑군이 제 2군과 공조하여 포위망을 구축하고 10월 3일 오렐(Orel), 10월 6일 브랸스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포위된 소련 제 3 및 제 13군은 항복하지 않고 소규모로 산개 철수하여 포니리(Poniry)와 므첸스크(Mtsensk)에 새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0월 23일까지 버텨낸 다음에야 전선에서 물러났다.
1941년 10월 7일 독일의 공세는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다. 내린 눈은 금새 녹아 도로를 진창으로 만들어버렸으며, 독일군의 진격, 특히 기갑차량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발생시켰다. 게다가 제 4 기갑사단은 므첸스크 근교에서 드미트리 렐리우셴코(Dmitri Leliushenko)와 미하일 카투코프(Mikhail Katukov)의 매복을 만났다. 최신 T-34 전차들은 숲속에 매복하여 지나가는 독일 차량들을 공격하였고, 4호 전차(Panzerkampfwagen IV)로 이루어진 독일 전차부대들을 무력화시켰다.
독일군은 이 피해에 놀라 공세를 중단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애썼고, 구데리안은 이 신형 T-34가 독일의 전차들로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 4호 전차가 T-34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후방에서 엔진을 노려야만 하였던 것이다. 구데리안은 이를 두고 소련인들이 아마도 무언가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브야즈마와 브랸스크에서의 승리로 독일군은 673,000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하지면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514,000 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두 지점에서의 소련군 전력 41%에 해당하는 양이다. 비록 독일이 두 지점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독일은 소련군의 저항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 모스크바 전투 -
1941년 10월 10일 독일군이 모자이스크 방어선이 보이는 지점에 도착하여 목격한 것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련군이었고, 이들을 지휘한 것은 레닌그라드에서 불려온 주코프였으며, 바실리에프스키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전투 동안 스탈린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전의 희생양을 찾기에 바빴지만, 독일군이 두 방어선을 모두 돌파하고 나자 스탈린은 거의 히스테리에 빠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10월 13일 스탈린은 공산당과 참모부, 그리고 기타 주요 기관들을 모스크바에서 대부분 피난시켰다.
이들의 피난으로 모스크바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10월 16일과 17일 양일간 수많은 민간인들이 모스크바를 떠나기 위해 열차를 탈취하고 도로를 가득 메웠다. 그러한 사태 속에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고 이는 공포와 혼란은 감소시키는데 다소 기여하였다.
모스크바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
1941년 10월 13일 독일군은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도착하였다. 대전차 장애물이 방어선에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었지만, 이 방어선에 투입된 4개 군 총 병력은 9만명이 채 되지 않았고, 이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였다.
상황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고자 주코프는 볼로코람스크(Volokolamsk), 모자이스크(Mozhaisk), 말로야로슬라베츠(Maloyaroslavets), 그리고 카루가(Kaluga) 네 요충지에 방어력을 집중시켰다.
모스크바 도시 자체도 하나의 요새로 변모하고 있었다. 주코프의 기록에 따르면 25만 명의 여성과 청소년들이 동원되어 중장비 없이 3백만 평방미터의 면적에 해당하는 양의 철조망과 대전차 구덩이를 만들었다.
모스크바의 공장들은 병기 생산 공장으로 전용되었으며, 자동차 공장은 기관단총 공장으로, 시계공장은 지뢰 뇌관 공장으로, 초컬릿 공장은 전투식량 공장으로, 그리고 자동차 수리 공장은 전차 수리 공장으로 재빨리 탈바꿈하였다.
상황은 급박하였고 독일군의 전차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이미 독일 공군의 폭격이 시작된 상태였지만 증강된 대공포와 민병대의 지원으로 폭격은 그다지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대전차호를 구축하는 공장 노동자들
1941년 10월 13일(기록에 따라서는 15일) 독일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독일군은 소련의 방어선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이들을 지나쳐 방어가 약한 칼리닌을 북동부로, 카루가와 투라를 남부로 압박하고자 하였으며, 투라를 제외한 칼리닌과 카루가를 10월 14일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성공에 고무된 독일군은 방어선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였고, 10월 18일 모자이스크와 말로야로스라베츠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10월 21일 나로-포민스크(Naro-Fominsk)가, 27일에는 블로코람스크가 함락되었다.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주코프는 후퇴를 명령하였고, 부대를 나라(Nara)강 동부로 이동시켰다.남쪽에서는 독일 제 2 기갑군이 투라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모자이스크 방어선이 이곳까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을 저지할 소련군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기상 악화와 연료 부족, 그리고 소련군이 파괴한 도로와 교량은 제 2 기갑군의 진군을 어렵게 만들었다. 구데리안은 당초 예정보다 늦어진 10월 26일에야 투라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소련 제 50군과 민병대의 활약으로 10월 29일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데이빗 글란츠(David Glantz)는 그의 저서에서 당시 소련군과 독일군을 서로 마구 펀치를 교환한 복서에 비유하였다. 멀쩡한 듯 서 있는 이 두 복서는 실상 상대를 쓰러뜨릴 힘을 계속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모든 차량의 3분의 1만이 가동 가능하였으며 수송 문제로 말미암아 두꺼운 옷과 동계장비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모스크바 내로 전차를 진입시키는데 성공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대도시에서 보병 지원 없이 전차가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이미 독일군은 1939년 바르샤바(Warsaw)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을 겪어본 바 있었다.
군대와 국민의 사기 앙양을 위하여 스탈린은 11월 7일 붉은 광장(Red Square)에서 크렘린(Kremlin)을 지나 곧장 전선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다. 쇼는 용감했지만 사실 소련군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었다. 10만의 병력이 충원되어 크린(Klin)과 투라(Tula) 방면에 주둔하였지만 여전히 방어는 힘겹게만 느껴졌다. 스탈린은 끊임없이 반격을 외쳐댔지만 예비전력이 없는 것을 알고있는 주코프는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애썼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몇 차례에 걸친 반격을 모두 격퇴하면서 방어전에 쓰일 소련 병력과 차량을 고갈시키고 있었지만, T-34에 맞설 무기가 부족한 모스크바 서쪽 알렉시노(Aleksino)의 독일 제 4군은 소련군의 반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알렉시노에서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력은 병력과 장비면에서 소련군보다 우세하였고, 결국 943,000 명의 병력과 1,500 대의 전차, 650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모스크바를 최종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병력 500,000 명에 890 대의 전차, 1,000 대의 항공기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였지만 지형적 이점은 충분하였다.
도시는 세 개의 원형 방어진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크린의 모자이스크 방어선 일부도 여전히 소련의 수중에 있었다. 소련군 폭파병들과 포병들은 독일군의 침입이 예상되는 도로 주면에 배치되었고, 결정적으로, 이 당시의 소련군은 더이상 과거의 그 전투 경험 없는 신병들이 아니었다.
1941년 11월 15일 지면이 얼어붙자 진창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었다. 독일군의 기갑군이 모스크바를 포위해 동부 인근 도시 노진스크(Noginsk)와 연계하기 위하여 선봉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제 3 기갑군 및 제 4 기갑군은 모스크바 저수지와 모자이스크 사이로 진군하여 크린 방면으로부터 모스크바 북부를 에워싸고자 하였으며, 제 2 기갑군은 소련 수중에 있는 투라를 지나쳐 카시라(Kashira)와 콜롬나(Kolomna)를 향하여 남쪽으로부터 도시를 에워싸고자 하였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요격할 예비전력이 거의 없었다. 독일군은 제 16군과 제 30군 사이를 파고들어 둘로 나누었고, 며칠간 전투가 지속되었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군은 사상자에 개의치 않고 모스크바를 향하여 계속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이 공격에 소련군의 방어선을 담당하던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고, 16군은 퇴각하였으며, 독일군은 점점 더 도시로 가까이 다가왔다.
격렬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1941년 11월 24일 크린을 점령하였고, 25일 솔네크노고르스크(Solnechnogorsk)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의 저항은 여전히 격렬하였고 전투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가 성공할 것인지에 대하여 주코프에게 물어보며 '솔직하게 말해주게, 공산주의자처럼'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코프는 가능하다고 답하며 예비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다. 11월 28일 독일 제 7 기갑사단이 모스크바로 연결된 볼가 강의 교량을 점령하였는데, 이 교량으로부터 크렘린은 35 km 거리 안쪽이었다.
소련은 즉각 강력한 반격을 실시하였고, 제 1 타격군은 이들을 다시 볼가 강 너머로 몰아냈다. 독일군은 북서부로 모스크바로부터 20 km 거리에까지 당도하였고, 장교들은 쌍안경으로 모스크바의 몇몇 건물들을 관측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이 시기 소련과 독일 양측은 오랜 전투로 전력을 거의 소진하였고, 일부 연대의 경우 중대 병력인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소총수만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남부의 독일 제 2 기갑군은 도시 근방에 도달하여 포위 작전을 시작하고자 하였지만 이전의 전투로 인한 타격이 회복되지 않은데다가 동계용 군복도 없었다. 이들은 하루에 5~10 km 정도밖에 진군하지 못하였으며 구데리안은 성공 확률이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제 49군과 50군이 투라 방면에서 측면 공격을 개시하였고, 진격은 더 느려졌다.
구데리안은 공세를 강행하기로 하고 부대를 산개하여 소련군을 공격하였고, 11월 22일 스탈리노고르스크(Stalinogorsk)를 점령, 주둔하고 있던 소련 소총 사단을 괴멸시켰다. 11월 26일 카시라에 당도한 기갑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이 도시를 공격하였고, 다음날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되었다.
벨로프(Belov)의 기병군단은 몇 개 소총 여단과 전차대의 지원을 받아 카시라 근방에서 독일의 진격을 저지하였고 독일군은 12월 초 카시라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투라 또한 소련군과 대전차 장애물, 민병대의 선전에 힘입어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독일군은 더 이상 모스크바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1941년 12월 1일 독일군은 민스크(Minsk)와 모스크바 간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미 전차 전력은 심각하게 부족하였으며 소련의 방어는 견고하였다.
소련 제 1 근위 기동 라이플 사단(Guards Motorized Rifle Division)과 33군의 측면 공격에 독일군은 4일의 전투 끝에 물러났으며 이 전투로 만 명의 병력과 수십대의 전차를 잃었다.12월 초 기온은 영하 20도에서 영하 50도를 넘나들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예년에 비하여 포근한 날씨였지만, 동계 군복이 없는 독일군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독일의 차량들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13만 이상의 병력이 동상에 걸렸으며, 포탄에서는 얼어붙은 윤활유를 떼어내야 했고, 차량은 수 시간 동안 데워야 비로소 가동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구데리안은 그의 일기장에 모스크바 공격은 실패로 끝났으며, 독일군은 소련군의 전투력과 국토의 크기, 그리고 날씨를 과소평가하였다고 적었다. 구데리안은 대참사를 막기 위하여 12월 5일 휘하 부대의 전투를 중단시켰다.
소련군의 역습
- 스탈린의 역습 -
독일군의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보부는 소련에게 더이상의 예비전력이 없다며 앞으로 반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첩자 리처드 소지(Richard Sorge)의 보고에 따라 시베리아(Siberia)와 극동으로부터 신규 전력을 끌어왔다.
소련은 12월 초 58개 사단을 예비 전력으로 확보할 수 있었으며, 주코프와 바실리에프스키가 제안한 공세는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사실상 소련군이 이 공세에 투입한 병력은 1,100,000 명으로, 독일군의 규모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지만, 주코프는 병력을 신중히 배치하였으며 요충지의 경우 적과 아군의 비율을 1대 2로 배정하였다.
1941년 12월 5일 칼리닌 전선에서 시작된 소련의 반격은 이틀 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의 도시 몇개를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같은 날 12월 5일, 히틀러는 명령 39호를 발효하였다.
이는 동부전선의 전 독일군에게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는 내용이었지만, 독일군은 현재 위치에서 제대로 된 방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견고한 방어진 구축을 위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구데리안은 한스 슈미트(Hans Schmidt)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과 논의끝에 현 위치를 사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2월 14일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와 귄터 폰 클루게(Gunther von Kluge)로부터 제한적인 철수 승인을 받은 독일군은 히틀러의 승인 없이 오카(Oka) 강으로 퇴각하였다. 1940년 12월 20일 이 사실을 알게된 히틀러는 철수를 중단시키고 곡사포로 땅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현 위치를 사수할 것을 다시 한번 명령하였다.
구데리안은 현재 동계장비들이 폴란드에 묶여있으며, 이 장비 없이는 적의 공격보다 추위 때문에 더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항의하였지만 히틀러의 응답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구데리안을 해임한 것이었다. 이날 제 4 기갑군의 회프너(Hoepner)와 제 9군의 슈트라우스(Strauss)는 물론 중앙집단군의 지휘관 보크도 같이 해임되었는데, 보크의 경우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발표되었다. 이 날에 앞서 12월 19일에는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치히(Walther von Brauchitsch)가 해임되었다.
Walther von Brauchitsch
이 동안에도 소련군의 반격은 계속되었다. 북쪽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12월 15일 크린에 이어 16일에는 칼리닌을 해방시켰으며, 코네프(Konev) 장군은 독일 중앙집단군을 포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지만 르제프(Rzhev)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당해 실패하였다. 남부로 진군한 소련군은 12월 16일 투라와 모스크바 사이의 독일군들을 몰아내었고, 중앙의 소련군은 12월 26일 나로-포민스크, 28일 카루가, 다음해 1월 2일 말로야로슬라베츠를 해방시켰다.
예비전력이 부족해진 소련군의 반격은 1942년 1월 7일 중단되었으며, 그동안 전투에 지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독일군을 모스크바로부터 100 km 에서 250 km 까지 몰아냈다.
이 승리에 소련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으며, 독일군은 2차 대전 첫 패전을 기록하였다. 단번에 소련을 쓰러뜨리지 못한 독일은 장기전을 준비해야 하였고, 모스크바에 대한 전격전은 실패로 끝났다.
비록 독일군을 물리쳤지만 모스크바의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며, 전선은 아직 멀어지지 않았다. 소련은 5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으며 독일은 30만에서 45만의 사상자를 냈다. 1943년 초 독일은 전선을 후퇴하여 서쪽으로 물러났지만 모스크바 전선은 1943년 10월 독일 중앙집단군이 스몰렌스크에서의 두번째 전투에서 패배하여 물러나기까지 유지되었다.
모스크바 공격에 실패한데 분노한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모든 장군들을 해임하고 새 인물들로 주변을 채워나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전투 지휘 경험이 많지 못하였다. 전투는 추축국에 뼈아픈 패배로 남았고 소련의 빠른 점령이라는 당초 목표는 이제 요원한 것이 되었다.
- 평가 -
소련은 독소전 개전 이후 최초의 승리를 맛보았다. 이 승리에 고무된 스탈린은 자만에 빠지게 되었으며 적극적 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1942년 1월 5일 스탈린은 봄에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소련 남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격을 시작한다는 주코프의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예비 전력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반격은 독일군의 능숙한 전술에 휘말려 르제프의 혹독한 패전을 가져왔으며, 이 전투는 '르제프 고기 분쇄기'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하르코프(Kharkov)에서 다시 독일군에게 대패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재공세를 유발하였고, 이는 훗날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로 이어졌다.
모스크바는 1965년의 제 20회 승전일 기념식에서 '영웅 도시'로 지정되었으며, 1944년 제정된 모스크바 방위훈장(Defense of Moscow medal)은 당시 모스크바 전투에 참여한 모든 병사와 시민, 민병대원들에게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