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하르트만

후장킴 작성일 09.12.10 19: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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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하르트만은 2차대전 당시 독일 공군(Luftwaffe)의 에이스이다.

본명은 에리히 알프레드 하르트만(Erich Alfred Hartmann, 1922.04.19~1993.09.20)이고, 부비(Bubi), 독일의 금발기사(The Blond Knight Of Germany) 적에게는 검은 악마(The Black Devil)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공중전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둔 조종사였으며, 2차 대전 당시 총 352 대의 적기를 격추하였는데, 이중 345대는 소련 공군 소속이었고 그중 260 대가 전투기였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결코 깨질리 없는 영원 불멸의 스코어이다.

또한 1,405회의 출격에서 단 한번도 부상을 당했던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르트만의 호위기 또한 단 한번도 격추되었던 적이 없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격추 기록이 100기를 넘는 에이스들은 많이 있지만, 호위기 피격추 경험이 한번도 없는 에이스는 전무할 것이다.

하르트만은 최고의 티이거 전차장이었던 미하일 비트만과 함께 영원히 밀리터리의 신화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르트만은 1922년 뷔템베르크(Wurttemberg)주의 바이자흐(Weissach)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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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어린시절의 하르트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병원을 개업한 덕에 그는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1928년에 독일로 돌아와 수년간 독일 공군의 글라이더 교육 학습에 참가하였다. 1939년 비행면허를 취득한 하르트만은 1940년 말부터 독일 공군전술학교(Luftkriegsschule)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1년 학교를 졸업한 하르트만은 1942년 동부전선의 52 비행대(Jagdgeschwader 52)에 배속되어 메서슈미트 Bf-109G(Messerschmitt Bf-109G) 전투기로 군무를 시작하였다.

52 비행대의 지휘관 후베르투스 폰 보닌(Hubertus von Bonin) 소령은 하르트만을 알프레드 그리슬라프스키(Alfred Grislawski)원사에게 배정하였고, 며칠간 그와 시험비행을 해본 그리슬라프스키는 하르트만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조종사이긴 하지만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하르트만이 그의 스승이자 친구 발터 크루핀스키(Walter Krupinski)를 만난 것도 이 시기였다.

첫번째 출격은, 1942년 10월 14일. 베테랑 파일럿 로스맨의 윙맨으로 시작되었다.
막상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하르트만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로스맨을 잃어 버린다. 이윽고 로스 맨이 하르트만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접근해 왔지만, 그는 그것을 적기의 공격이라고 오인해, 연료 부족이 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쳐 다니고 말았다.

첫번째 실전의 긴장과 흥분 속에서는 위대한 격추왕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2 비행대로 배속된지 1개월 정도 지난 1942년 11월 5일, 하르트만의 첫 격추기록이 드디어 달성된다.

희생양은 '하늘의 콘크리트 토치카'라고 불린 소련의 지상 공격기 슈트르모빅이었다.

이날 4기로 편대를 구성하여 스크럼블 요격에 들어갔던 하르트만은, 편대 안에서 최초로 적기를 발견하여, 편대를 리드하게 되었다.

하르트만은 슈트르모빅의 뒤를 쫓았지만, 상대는 '콘크리트 토치카'라는 별명처럼 튼튼한 기체여서 단순하게 뒤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도 총알만 낭비하는 지경이었다.

목표를 앞에 두고 좀처럼 격추를 시키지 못했던 하르트만은, 슈트르모빅의 약점은 기수 아래쪽 면의 오일 쿨러라고 들었던 것을 생각해 낸다.

그 점에 착안하여 적기의 하부에 접근하여 오일 쿨러 부분을 공격하여 격추시켰다. 그런데 하르트만은 격추된 적기에만 신경쓰다가 파편이 자신의 기체에 맞아서 추락해 버렸다.

며칠후 하르트만은 병으로 입원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에 어울리는 효율적 전투법을 연구한다.

이윽고 병이 나아서 실전에 복귀한 이후, 많은 베테랑 파일럿들의 윙맨을 맡으면서 실전 경험을 반복하여 조종 기술, 상황 판단, 전투중의 마인드 컨트롤 등등, 하늘에서 살아 남기 위한 기량을 연마해 간다.

주위에서는 그를 유망한 조종사로 보기 시작하였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에 참가한 하르트만은 7월 7일 대규모 공중전을 통하여 하루 7 대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8월 이전까지 50 대의 기록을 세운데다가 8월 들어 48 대의 기록을 추가하였다. 총 90 대의 기록을 세운 하르트만은 1943년 8월 19일 Il-2기와 교전중 기체가 손상되어 소련 영내에 추락하였고,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인근 기지로 호송될뻔 하였지만 통증을 위장하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어둠속에서 두 명의 경비병을 따돌리고 독일 영내로 귀환하였다.

이러한 전과로 1943년 9월 비행중대장이 된 하르트만은 10월까지 33대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10월 29일 총 148 대 격추로 기사철십자장(Ritterkreuz) 수훈자가 되었다. 1943년 말까지 하르트만이 세운 기록은 159 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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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109G

1944년 들어 그의 격추행진은 더욱 빨라졌다. 그의 전과는 공군본부에서도 관심사가 되었으며, 그의 격추기록은 두세번의 심사를 거쳤다. 공군은 그의 편대에 관찰자를 포함시켜 하르트만의 전투수행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3월 그가 202 대의 소련 전투기를 격추시켰을 즈음 소련 내에서도 그의 무전 콜사인 카라야 아인(Karaya Ein)이 유명해져 있었고, 소련은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소련군은 그를 '검은 악마'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전투기 기수 부분 각 면에 그려진 검은 튤립 그림 때문이었다. 기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상대가 하르트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소련 조종사들은 교전을 주저하기도 하였고, 때문에 독일군 신참 조종사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전투기에 같은 그림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1944년 8월 24일 하루동안 11기의 소련기를 격추시킨 하르트만은 총 300기 격추의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에 놀란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은 영웅적인 전투기 조종사를 잃을 경우 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그를 비행 임무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로비를 통하여 다시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으며, 300대 격추의 기록으로 2차 대전중 27명만이 영예를 안은 다이아몬드 기사십자장 수훈자가 되었다.


1944년 1월부터 2월 사이 하르트만은 50 대의 소련기를 격추하였고, 1944년 전체에 걸쳐 172 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며 일년간 격추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이 해 6월 최초로 미군 전투기와 조우한 하르트만은 루마니아에서 4 대의 P-51 무스탕(Mustang) 전투기를 격추시켰지만 다음달 무스탕 전투기와의 교전때는 연료가 떨어져 전투기를 버리고 비상탈출하였다.

하르트만은 1944년 8월 23일 52 비행대의 게르하르트 바크혼(Gerhard Barkhorn)을 제치고 독일 공군 최고 격추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1945년 초 하르트만은 신형 제트 전투기 Me-262를 장비한 엘리트 비행대였던 44전투 비행단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아돌프 갈란트(Adolf Galland)의 제의를 받았지만, 1달만에 52전투 비행단의 제III비행대 제9 중대장으로 복귀한다.

후일 그는 아돌프 갈란트의 제안대로 남아있었다면 소련에 10년 이상 억류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고 있다.

원대에 복귀한 시점, 편대 지휘의 능력을 인정받은 하르트만은 1945년 2월 제52 전투 비행단의 제I 비행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아직 22살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날 즈음 하르트만과 52 비행대는 미국 제 90 보병사단에 항복하였다.


하르트만은 총 1400 회 출격하여 825 회 공중전을 벌였고, 동체착륙 등으로 14 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그는 단 한번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며, 적기의 공격으로 인한 손상 때문에 비상탈출한 적도 없다.

그는 200 여대의 다양한 소련 단발 전투기들을 격추시켰으며, 80 대 이상의 미제 P-39, 15 대의 Il-2 지상공격기, 10 대의 쌍발엔진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격추기록이 아니라 단 한번도 그의 윙맨을 잃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군을 상대로 끝없이 반복되는 출격에서, 하르트만은 자신만의 공중전 이론을 찾아냈다.

"우선 적기의 존재를 재빠르게 발견하고,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접근하고, Bf109에 탑재된 무기로 근거리로에서 재빨리 공격한다. 그리고 최고속으로 이탈한다"

이름하여 일격 이탈 전투법이라고 한다.

또한 하르트만은 1대1의 격투전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적기에 보다 확실히 총알을 맞히는 것을 중시했다.

이 전투법을 구현하기 위해 하르트만은 구름이나 태양을 이용하여 적기 편대(주로 저공 침입해 오는 소련 공군 지상 공격기대와 상공에서 공격기의 호위를 하는 전투기의 혼합 부대)에 발견되지 않고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어느 정도의 고도 차이가 적절한지, 어떠한 타이밍에 급강하를 하여 공격을 하는 것이 최대의 전과를 얻는지... 후에 편대 지휘자가 되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아군 편대의 손실이 줄어드는지, 등등의 전술과제를 밝혀내면서, 여러가지 상황에 따른 공격 방법과 불확정 요소에의 대책을 검토해, 일격 이탈 전투법의 유효성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단지 일격 이탈법만을 철저하게 사용하여, 독일 패전까지 1,405회의 출격에서 단 한번도 부상당하지 않았다.

또한 하르트만은 사격 기술이 뛰어나서 쓸데없이 총알을 낭비하는 일 없이 1회의 출격에서 다른 파일럿보다 많은 적기를 격추하는 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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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만의 교전원칙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가능한한 최후 순간까지 위치를 숨긴다
2) Bf-109 기관포의 느린 초구속도를 상쇄시킨다
3) 조준을 정확히 하여 탄약 소모를 최소화한다
4) 적의 회피기동을 차단한다

만일 물고 물리는 공중전이 벌어질 것 같다는 판단이 설 경우 하르트만은 스스로를 달래며 전장을 떠났다. 그는 '발견-결정-공격-탈출'의 원칙을 충실히 지켰으며, 적을 발견하면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공격을 실시한 이후에 현장을 이탈하여 다시 첫단계로 돌아갔다.


미군은 포로로 잡힌 하르트만과 52 비행대 조종사들을 동부 전선의 소련에 인계하였는데, 얄타 협정(Yalta Agreements)에 따르면 포로는 그가 속했던 전선의 국가에게 인계하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수감된 하르트만은 민간인에게 발포하였다는 혐의로 전범 재판에 붙여졌다.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히는 등의 힘겨운 처분에도 불구하고 하르트만은 그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였으며 결국 재판은 기각되었다.

이후 소련은 하르트만을 공산주의로 귀의시키기 위해 애썼고, 동독 공군에 배속시키려고도 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총 10년 반의 수감생활 동안 얼굴 한번 못본 그의 3살 아들은 사망하였고, 그는 1955년 서독으로 돌아와 그가 전쟁기간 매일 편지를 쓴 아내와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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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air Sabre

서독으로 돌아온 하르트만은 서독 최초로 부대 전체가 카나디어 세이버(Canadair Sabre) 및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Lockheed F-104 Starfighter) 제트 전투기로 구성된 71 비행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미국에 몇 차례 여행하며 미국제 공군 장비들에 대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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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04 Starfighter - 과부제조기

하르트만은 F-104가 결함을 가진 기체라고 판단하였고 서독 공군에의 도입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록히드의 뇌물 공세로 서독 공군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덕분에 서독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F-104기의 282회 추락을 경험해야 했으며 115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하르트만은 이 일로 상사들의 비위에 거슬려, 결국 1970년 퇴역하였다.

그는 1993년 9월 20일 바일 임 쇤부흐(Weil im Schonbuch)에서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는 에리히 하르트만이 사망후 그의 무죄를 선고하고, 과거 자신들의 판결이 적법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 하르트만의 격추 기록 -

1942년 10월:동부 전선의 제52 전투 항공단에 배속된다.
1942년 10월 14 일:최초로 출격.
1942년 11월 5 일:최초로 적기를 격추.
1943년 3월 24일:5기 격추. 2급 철십자 훈장이 수여된다.
1943년 4월 26 일:8기 격추. 편대장 자격을 얻는다.
1943년 8월 3일:누적 격추수가 50기에 이른다. 제III비행대 제 9중대장에 임명된다. 기수에 검은 튤립 모양을 페인팅 하게 된다.
1943년 9월 ~ 10월:하르트만은 소련 공군으로부터 남부의 '검은 악마'로 불리게 된다.
1943년 10월 29 일:누적 격추수가 100기에 이른다. 기사철십자장이 수여된다.
1943년 12월 13 일:누적 격추수가 150기에 이른다.
1944년 3월:누적 격추수가 200기를 넘어 떡갈나무 잎이 첨부된 기사철십자장이 수여된다.
1944년 5월:동부 전선 붕괴의 여파로 제 52 전투 비행단은 크리미아로부터 철수.
1944년 6월:제52 전투 비행단에 루마니아 유전 방위 임무가 부과된다.
1944년 6월:누적 격추수가 250기에 이른다.
1944년 8월 23일:누적 격추수가 290기에 이른다.
1944년 8월 24일:첫번째 출격으로 6기 격추. 두번째 출격으로 누적 격추수 300기 달성.
1944년 8월 25일:다이아몬드 기사철십자장이 수여된다.
1945년 1월:제트 전투기 Me262로 구성된 44 전투 비행단에 배속되지만, 1개월만에 제 52 전투 비행단에 복귀한다.
1945년 2월:제 52 전투 비행단의 제 I 비행 대장으로 임명됨.
1945년 5월 8일:1,405 번째 마지막 출격. 마지막으로 소련 편대에 일격 이탈로 1기를 격추한다. 한편, 누구에게 격추되었는지 깨닫지 못했던 소련기 편대는 우연히 근처를 비행하고 있던 미군기 편대에 싸움을 걸어 미소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하르트만의 최종 격추수는 352기.


 - 하르트만의 수상 내역 -

- Front Flying Clasp of the Luftwaffe in Gold with Pennant "1300"
- Pilot and Observer Badge in Gold with Diamonds
- Ehrenpokal der Luftwaffe (13 September 1943)
- German Cross in Gold (17 October 1943)
- Iron Cross 2. and 1. class
- Knight's Cross with Oak Leaves, Swords and Diamonds
   - Knight's Cross (29 October 1943)
   - 420. Oak Leaves (2 March 1944)
   - 75. Swords (2 July 1944)
   - 18. Diamonds (25 August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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