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자 전투

후장킴 작성일 09.12.10 19: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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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자(Al Fallujah)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유프라테스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써, 요르단에서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 지역은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전체 주민의 90% 이상으로, 일명 수니 트라이앵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에는 집권 바트당의 고위 간부를 여럿 배출했고, 격렬한 반미 운동을 전개하여 미군정의 통치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 활동의 근거지였는데, 가나무역에서 일하던 김선일씨가 인질로 납치되어 비극적으로 참수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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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미군의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주민들은 자치 의회를 만들어 도시 내의 치안을 유지했다.

의회 지도자인 하메드는 친미 성향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팔루자는 분쟁 지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의회는 점령군인 미군 부대가 도시 외곽에 주둔하기를 원했지만, 미국 육군과 해병대는 시내 중심부에 교대로 주둔하였다.

시의회는 미군들이 이라크 여성을 추행하고, 아이들에게 외설적인 그림이 그려진 껌을 나누어 주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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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Qaids school


4월 23일, 미군이 기지로 사용하고 있던 알콰이드 초등학교(al-Qaids school)에 학교에서의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항의 군중 150명이 집결한다. 최루탄으로도 군중들이 해산하지 않자 미군은 실탄을 발사했고, 17명의 사망자와 7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틀후 舊 바트당 당사에서 이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여기서 또다시 발포 사건이 벌어져 3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

미군은 두 사건 모두 군중들이 먼저 발포하여 대응 사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6월, 미군은 자살 폭탄 테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오토바이를 압수하였다.

6월 30일, 모스크에서 폭발이 일어나 성직자 8명이 죽었다. 주민들은 미군이 모스크에 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주장했고 미군은 반군들의 소행이라고 반론하였다.

2004년 3월, 테러 행위의 증가에 견디다 못한 미군은 팔루자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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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Blackwater USA의 차량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지 11개월 가량 지난 3월 31일, ESS사의 보급 트럭과 호위 차량이 10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호위 4륜 구동 차량에는 민간 군사 회사인 'Blackwater USA'의 미국인 용병 4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규정을 어기고 미 해병부대에 이동에 관한 사전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정부 종합 청사 근처 상점에서 괴한들이 출현하여 차를 향해서 AK를 난사했다. 괴한들이 차를 타고 사라지자 군중들이 몰려와서 시신을 훼손하고 생존자 한명을 마저 살해했다.

한 소년은 휘발유통을 가져와서 차에 불을 질렀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군의 무인 정찰기에 의해서 촬영되어 온세상에 보도되었고, 미국은 1993년의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졌던 '블랙호크다운' 사건을 떠올리며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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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불탄 시체를 유프라테스강 다리에 매달고 환호하는 이라크인들

4월 1일 이라크 경찰은 4명의 시체를 회수하여 미군에 인계했다.

4월 2일 이라크 잠정 통치 평의회는 살해 행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팔루자의 종교 지도자들은 금요일 예배의 설교에서 사체를 손상시키는 행위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설교했지만, 살해 행위 자체에 대한 비난은 하지 않았다.

미 점령군 대변인 키미트 준장은 팔루의 안정을 회복할 것이라고 밝히고, 살해자를 미군에게 넘긴다면 강제력의 행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다.

이후 도시의 지도자들은 살해 행위를 비난 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4월 3일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舊 사담시티)에서 대규모 비무장 데모가 발생하였다. 바그다드 남부의 마훔디야에서는 경찰서장이 살해되었다.


미군 해병 원정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팔루자를 포위하고 광범위한 무장 세력 토벌 작전 - 방심하지 않는 해결(Operation Vigilant Resolve)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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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ujah를 봉쇄한 미군

4월 5일 미군은 팔루자 시가지로 통하는 도로를 험비와 철조망으로 봉쇄하고, 주민들에게 집밖으로 나오지 말 것과 반군들을 토벌하는데 협조할 것을 라디오로 방송하였다.

공격에 가담한 병력은 해병대 1,200 및 이라크 치안대 2개 대대이다. 이라크 경찰은 시아파 지도자인 알 사드르(Muqtada al Sadr)의 측근을 체포하였다.

4월 6일 미군은 시가지 남동부의 공장 지구를 탈취했다.

시내에서는 야간통금령이 발효되었다. 라마 디에서 교전중 미 해병대 12명이 전사하고 20명 부상당한다. 미군은 도시 전체를 장악 하는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고 발표한다.

4월 7일 시가전이 계속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라마 디에서 발생한 대량의 사상자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다. AP통신에 따르면 팔루자의 회교 사원에서는 지하드를 요청하는 방송이 흘렀다. 회교 사원의 일부 시설로부터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사원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알 사드르는 이라크의 통치권을 미국의 협력자가 아니라 정직한 인물에게 넘기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인 알 시스타니는 연합군의 시아파 봉기에 대한 대응을 비난하고, 양측 모두의 자제를 요청한다.


4월 8일 브레머 행정관의 요청에 의해 이라크의 내무장관이 사임한다.

병원 관계자에 의하면 이날까지 팔루자에서는 사망자 280 ~ 300명, 부상자는 적어도400 명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바그다드에서는 헌혈된 피와 물, 식량을 모집하여 팔루자로 옮기는 차량이 출발하였다. 알자지라 방송은 무장 세력에 붙잡힌 일본인 인질 3명의 모습을 방영한다.

4월 9일 브레머 행정관은 미군이 일시적으로 공격을 멈추고 이라크 과도정부와 팔루자의 대표, 반군들과 회담을 가질 것이며, 주민들에게도 구호 물자를 보낼 것이라고 발표한다.

미군의 마크 키밋 대장은 정전의 조건으로 4월 3일부터 팔루자에서 도시의 상황을 보도하던 알 자지라의 아흐메드 만수르와 라이스 마슈타그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3일간의 공격에서 미군은 AC-130과 저격수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작전을 벌였지만, 팔루자의 완전 장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오히려 전쟁의 참상이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전세계로 보도되어 반전여론이 들끓게 된다.

결국 4월 13일 미군은 정전 교섭을 시작하고, 5월 1일에는 시내에서 완전 철수하여 교외로 물러났다.

이 공격에 의해 시민들의 대미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후 알 자르카위가 지휘하는 테러 세력이 팔루자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외국인 납치와 살해 행각을 벌이게 된다.


이상 2004년 4월에 벌어진 미군과 이라크 무장 세력의 교전을 1차 팔루자 전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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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 바그다드 파괴된 미군 험비 위에서 환호하는 이라크인

거창하게 시작했으되, 제대로 끝맺지 못한 이 전투는 이라크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저항 세력은 이라크 전역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고, 팔루자는 완전히 무장 저항 세력의 손에 들어가 외국인 납치와 살해의 성지로 변한다.

가나무역의 김선일씨는 5월 22일 자르카위 테러 세력에 납치되어 6월 22일 끔찍하게 참수되었다.

전력을 재정비한 미군은 8월부터 다시 팔루자의 무장 세력 소탕 작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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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공습

8월 27일, 미군은 무장 세력이 근거를 두고 있던 시의 서부를 폭격하여 5명을 살해한다.
9월 6일, 무장 세력의 공격으로 미군 7명과 이라크군 3명이 사망.
9월 7일, 미 해병대가 무장 세력 근거지를 보복 공격하여 약 100여명이 사망한다.
9월 13일, 폭격과 지상에서의 교전으로 15명이 사망.
9월 16일, 교전으로 16명이 사망.
9월 24  ~ 25일 교전으로 이라크인 8명과 미 해병대 5명이 사망.
9월 27일, 정밀 공습으로 8명이 사망.
9월 30일, 폭격으로 3명 사망.
10월 2일, 교전으로 7명이 사망.
10월 3일, 교전으로 4명 사망.
10월 4일, 폭격으로 9명 사망.
10월 8일, 폭격으로 11명이 사망. 팔루자 주민 대표와 연합군의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알 자르카위 문제로 대립한다.
10월 11일, 폭격으로 2명 사망.
10월 12일, 폭격으로 5명 사망.
10월 14일, 주민 대표가 자르카위의 존재를 계속 부정했기 때문에 교섭은 결렬하고 공중 폭격과 함께 해병대와 이라크군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벌인다.
10월 15일, 미군이 가족과 함께 탈출하려한 주민 대표를 구속(18 일 에 석방)
10월 30일,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팔루자 공격의 중지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11월 2일, 부시 대통령 재선.
11월 4일, 폭격으로 3명 사망.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자유로운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박살낼 필요가 있다'라고 표명.
11월 5일, 이라크 잠정 정권은 파르쟈 시민들에게 45세 이하의 남자는 무장 세력으로 간주될 것이라며 시내로의 출입을 금지한다.



11월 6일, 미군과 이라크군 1만명이 팔루자를 포위하여 봉쇄했다. 미 해병대 제 1 해병 연대장 Michael Shupp 대령은 "이라크 정부의 허가가 내려지는 즉시 공격을 시작한다"라고 천명. 시민 30만명 대부분이 탈출하였고, 무장 세력 1,200 명을 포함하여 3,000 ~ 6,000명이 남아 있다고 발표.

11월 7일, 잠정 정권은 쿠르드인 자치구를 제외한 이라크 전역에 60시간의 비상사태를 선언한다.


 

이상의 경과로 2차 팔루자 전투가 벌어진다.  작전명은 당초 Operation Phantom Fury로 결정되었었으나, 이라크측의 요구로 Al-Fajr(새로운 새벽)으로 변경되었다.

11월 7일 미군과 이라크군은 시가지 북쪽에 있는 철로 제방 북측으로 집결하였다.

11월 8일 알라위 총리는 "1월의 의회 선거를 실시할 위해 테러리스트들을 토벌한다"라고 선언하고, 팔루자 침공을 승인하였다. 추가적으로 팔루자 시민들의 외출 금지령, 바그다드 공항의 48시간 폐쇄, 생활 물자 수송을 제외한 시리아와 요르단 국경의 봉쇄를 명령한다.

미 군정의 폴 브레머 행정장관은 2004년 6월 28일자로 이라크 잠정 정부(알라위 총리)에게 통치권을 이양하였고, 다음해인 2005년 1월 30일에 이라크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총선거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라크 전역의 치안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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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8 155 mm 야포로 팔루자 시내를 포격하는 미해병


미 해병대 제 3 정찰대대와 이라크군 제36 코만도 대대가 시의 서쪽 유프라테스 강변으로부터 작전을 개시했다.

격렬한 준비 포격후 진격을 개시한 미군은 팔루자 종합 병원과 유프라테스강을 가로지르는 2개의 다리를 장악하였고, 시가지를 동서로 횡단하는 10번 고속도로까지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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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확보에 대하여 CNN은 무고한 민간인이 부상당한 것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보도했지만, 미군은 병원을 이용한 反美 프로파간다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공식 발표한다.

작전중 회교 사원에 대한 공격으로 10명이 사망하고 병원에서의 전투로 38명이 사망하였다는 보도에 대하여, 미군은 시민 사상자 발생을 부정하고, 사망한 것은 무장 세력 42명이라고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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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치열하게 전투중인 무장 저항 세력

이라크 알 카에다와 팔루자 무장 저항 세력의 수뇌인  알 자르카위는 인터넷으로 철저한 항전 성명을 발표한다.

또한 무장 세력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는체 하거나, 죽은척 엎드린 후 연합군이 접근하면 공격하는 작전을 즐겨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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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자 시내를 포격중인 M-109A6자주포


11월 9일 대기중이던 미 해병 연대 전투단(이라크군 보병대대 4, 미 육군 기계화 보병대대 2)은 8 일 저녁부터 9일 새벽에 걸쳐 격렬한 포격으로 진격로에 매설된 지뢰를 모두 제거한 후, 시가지 북쪽의 철도 제방을 출발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팔루자 중심부의 Jolan 공원을 제압한 후 연합군은 천천히 시가지를 한블럭씩 소탕해나갔다.

한편 수니파 이라크 이슬람당과 이슬람 종교자 위원회는 팔루자 침공에 항의하여 총선거를 보이콧할 것이라고 위협하였고, 이라크 이슬람당은 잠정 정부 내각에서 철수했다. 또한 알라위 총리의 친척 2명이 유괴되고, 바그다드에서는 보복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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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중 잠깐 휴식을 취하는 Malboro Man


11월 10일 연합군은 시가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국도 10호선을 따라 각 부대를 일렬로 늘어놓고 남쪽으로 소탕 작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미 해병대와 기계화 보병대대의 진격 속도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틈으로 무장 저항 세력 일부가 후방으로 침투하였고, 시가지 북부에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 육군은 국도 10호선을 확보중이던 일부 부대를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통과한 지역을 다시 소탕해 나갔다.

 

 

 

http://www.youtube.com/watch?v=vjJUp7lwgbk
미군측에서 촬영된 팔루자 전투 - 혐오장면이 2번 나옵니다. 심약자는 클릭하지 마세요.



11월 10일 해병대 대변인은 중심부를 포함하여 시의 70%를 제압하여 무장 세력 70명을 살해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500명의 무장 세력을 살해했다고 밝혀, 미군도 전과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라크 주둔군 작전 사령관인 메츠 장군은 알 자르카위가 본격적인 침공 이전에 팔루자 시내에서 도망갔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11월 11일 미군은 국도 10호선을 넘어 다시 남쪽으로 진격이 개시한다.


11월 12일 연합군은 시의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무장 세력 60명을 살해했다. 4일간의 전투로 미군18명, 이라크군 3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슬람 종교자 위원회는 침공에 대한 항의로 4일간의 총파업을 국민에게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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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잡힌 무장 저항 세력


11월 13일 이라크 정부는 팔루자에서 무장 세력의 일부 거점을 제외하고는 작전이 거의 끝났다고 발표했다. 무장 세력은 총 1,000명이 사망했고, 20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집계되었다.

시아파 종교 지도자 알 사드르는 총선 보이콧을 선언한다.


11월 14일 적신월사의 구호 트럭의 팔루자 진입 시도가 미군에 의해 저지된다.

11월 15일 적신월사의 트럭이 재차 진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피난민을 가장하여 구호 물자를 시내로 반입하였다. 이날 미군이 부상당한 이라크인을 확인 사살하는 영상이 유출되어 문제가 된다.

11월 16일 잠정 정권의 다워드 국방장관이 무장 세력 1,6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한다.

11월 17일 연합군은 팔루자 시가지 남부에서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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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자에 투입된 이라크군


11월 19일 잠정 정권의 나키브 내무장관은 팔루자 전투가 종결되었음을 선언한다.

11월 20일 미 육군 제 2 보병 연대 2 대대는 팔루자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작전 이전의 주둔지로 복귀한다. 대대는304명 이상을 살해하는 전과를 세웠고, 사상자는 전사 7명,  부상 72명이 발생했다.

11월 21일 잠정 정권은 시가지 86 지구중 75 지구에서 수색을 완료하여 안전함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한다. 한편 미군은 20개소에 달하는 무장 세력의 고문 장소를 발견하였고, 팔루자 경찰은 숨겨진 지대공미사일, 박격포, 지뢰 등의 무기를 발견했다.

11월 25일 이라크군은 자르카위의 깃발을 내건 공장을 발견하고 독가스 공장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독가스를 제조했던 흔적은 없었다.

잠정 정권은 팔루자에서 발생된 사망자가 2,080명, 포로가 1,6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미군의 사전 발표에서 팔루자 시내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 인원이 3,000 ~ 6,000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할때 무장 세력의  1/3에서 절반까지가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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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자에서 쫓겨난 무장 세력들은 이라크 각지로 흩어졌고 11월 9일에는 북부 도시 모술에서 경찰서가 습격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11월 13일 이후에는 시가지 서쪽이 무장세력의 지배하에 놓였다. 

11월 14일 미군은 2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모술 경찰서를 탈환했지만, 시가지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으며 팔루자에 주둔중이던 1개 보병대대를 이동시켜 11월 16일부터 재차 공격을 시작하여 시가지의 지배력을 회복하였다.

11월 22일, 모술의 미군 기지에 자폭 테러를 발생하여 미군 19명과 이라크인 3명이 살해된다.


팔루자에서는 11월 19일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 되었고, 12월에 접어들어서는 무장 세력의 세력이 부쩍 회복되어 치안은 더욱 악화되었다.

12월 15일 연합군은 다시 한번 대규모 전투를 벌여 무장 세력을 제압한다.

팔루자 점령 후, 미군은 현지의 무장 세력중 친미적인 그룹을 이라크 군 혹은 경찰로 인정하여 치안 유지에 임하게 하고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정책을 취했지만, 이라크인들은 전투가 일어나면 도망치거나 적에게 항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군에게 훈련을 받아 현대적인 전투 기술을 가진 이라크 병사가 탈주하여, 무장 세력에 참가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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