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장군>
1950년대, 한국의 군대는 부패하고 질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알려졌던 인물이 바로 박정희라 함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강점은 곧 그것이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그는 군대 내부의 온갖 부조리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만 해도 군수물자의 유출이 심하여 군수물자가 트럭에 실린 채 부산 국제시장으로 빠져나가고, 군의 후생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갖가지 특권과 부정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그 때문에 사병들은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던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의 군기(軍紀)가 그처럼 해이하고 부정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사건>과 같은 일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즉 군대가 방위군에 해당하는 장정들을 후방으로 이송하면서 막대한 국고금(國庫金)을 유용 착복하고 장정들에게는 보급을 제대로 하지 않아 수많은 사상자와 병자, 동상자를 내게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직업군인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빠져 들어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명색이 장군이라고 해도 월급이 고작 쌀 한 가마 남짓 살 만한 것이었으니 군대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도 박정희 장군은 꼿꼿하게 살아왔다. 그가 제 7 사단장으로 있을 때 참모총장으로부터 각군에 대하여 <모포재고량을 조사보고>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사단장들은 모두 자기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숫자상으로만 맞는다고 허위보고를 했으나 박 장군은 모자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휴전 이 후 기동연습을 하면서 산의 나무를 베어버리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우리 국군이 해야 할 일은 산의 나무를 베어야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심어야 한다." 고 진언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처럼 꼿꼿하고 청빈하게 살다 보니 장군이 되어서도 남의 집 셋방으로 전전했던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 남의 집으로 쌀을 꾸러 가기도 했다.
박정희 장군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육영수 또한 남편의 훌륭한 내조자가 되어 주었다. 생활비가 모자라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옷가지를 내다 팔기도 하고, 콩나물 한 줌을 사면서도 가계부 걱정부터 앞장세우는 알뜰한 살림꾼이었다.
본래 육영수는 옥천 갑부의 만석꾼 집 딸이다. 돈과 물자를 아끼고 정리 정돈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배운 것이기는 했지만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아온 경험은 없었다.
그런데도 박 장군의 가난한 살림을 용케 꾸려 갔으니 두 사람은 이런 면에서도 천장 배필이었다. 박정희 준장이 광주포병학교 교장에서 제 5 사단장으로 전보되어 먼저 강원도 양구로 떠났다. 며칠 뒤 박 준장은 서울 셋방을 얻어 두었으니 그리로 이사하라는 전갈을 가족들에게 보냈다. 그때 이삿짐을 실어 날은 운전기사 이타관(李他官)은 이렇게 기억을 더듬는다.
「서울에 와보니 노량진역 앞의 셋방은 아직 비어 있지 않았다. 나는 화물차 안에서 잠을 자고 사모님 일행은 오빠네 집으로 갔다. 짐은 다른 친척집에 맡겨놓고 닷새쯤 지나서야 겨우 입주를 했다. 돈에 맞추어서 집을 얻다 보니 부엌도 없고 아궁이가 현관마루 밑에 있어 솥을 걸 곳이 없었다.
방에는 불도 들이지 못하여 방바닥에서는 물이 줄줄 났다. 군인들이 비옷으로 쓰던 고무장옷을 방바닥에 깔아놓고 누기가 차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그런 방이었다. 밥은 풍로에 숯불을 피워 냄비에 끊어야 했기 때문에 사모님은 노상 부채를 들고 계셨다.
부자집 따님을 데려다 너무 고생을 시킨다는 생각이 들어 "장군님도 너무하시네요" 하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잖아요" 하며 사모님은 오히려 나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가 오늘날 이만큼 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하고 그때의 일을 회상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절약정신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수돗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자신이 쓰는 화장실의 변기수조에는 벽돌 한 장을 반드시 넣어놓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아무리 더워도 집무실에 선풍기나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파리가 날아들어 오면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파리채로 파리를 잡으며 집무를 했다고 하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겨울에 난방을 하는 경우도 비슷했다. 온도계를 걸어 놓고 최저의 난방을 유지하는 것이 철저한 원칙이 되고 있었다.
<소장으로 진급함>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되는 제 3 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5사단에서도 부정선거 지령이 내려왔다. 박정희 사단장은 자유당이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데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지금부터 선거에 관한 한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하고 소극적인 방법으로 부정선거 지령을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통령으로 출마한 이기붕(李起鵬)에 대해서는 호의를 가지지 못했다.
당시 군대 내부에서도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5사단 안에서도 장교 1명과 하사관 2명이 사단장 앞으로 편지를 써놓고 달아나 버린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저희들은 사단장 각하를 존경합니다만 이번 선거의 작태를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살 마음도 나지 않고 처자식을 볼 면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일로 해서 박 준장은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는 5사단장에서 해임되고 육군대학 입교를 명령받았다. 그것이 장군으로서는 첫 번째인 동시에 박정희로서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한 박 장군은 1957년 3월 30일 제 6 군단 부군단장이 되었다가 9월 1일에는 다시 제7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그가 7사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당시 군대 사고로서는 가장 큰 보급창고의 화재사고가 또 났다. 사단장이 파면되고도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런데도 송요찬(宋堯讚) 1군사령관이 전화를 걸어 "박 장군! 그 병참부장 혼 좀 내시오! 불탄 피복은 다 바꿔줄테니 피해량을 조사해서 보고하시오, 걱정할 것 없소."하고 오히려 위로를 했다
송요찬은 박정희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것이 거북하기는 해도, 그의 용의주도함과 탁월한 지식, 다부진 업무처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우직하면서도 복종심이 강하고 배포가 켰던 것이다.
박정희 준장은 이듬해 3월,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부하가 진급 소식을 전해주자 "불 낸 사람을 뭣하러 진급시켜!" 하면서도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소장 진급은 송요찬, 백선엽, 장도영 등 그때의 군 수뇌부가 박정희의 인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군사령관 송요찬 중장은 1958년 6월 17일 박정희 사단장을 1군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므로 박 장군은 예하 사단장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군 내부에서도 더욱 확고한 위치를 구축해 갔다.
박정희 소장은 부하가 계통을 밟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 헌병부장이 참모장을 거치지 않고 송요찬 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차량관리자를 군법회의에 넘긴 적이 있었다. 박 소장은 헌병부장에게 기합을 넣고 바로 사령관실에 들어가 "시정을 하든지 나의 사표를 받든지 양자택일하라" 고 하자, 송 장군은 껄껄 웃으며 "내가 워낙 결재를 많이 하다보니 그것이 그냥 묻어 넘어간 모양이구먼"하면서 군법회의을 취소시켰다.
어느 날 박정희 소장은 윤필용(尹必鏞) 보좌관을 불러 "기밀비에서 5만 환을 떼내 채명신 장군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갔다 주되 나는 지금 전방 시찰중이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윤필용이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와 내용을 물은즉 "내가 숙군시절 서대문 형무소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그 친구는 헌병으로서 김창룡과 함께 나를 조사했던 사람이다. 내가 육사 중대장으로 있을 때는 가르친 5기생이야. 나는 당시 조사 받지 않을 때는 취조실 바닥에 늘 꿇어앉아 있곤 했어. 그 친구는 복도를 왔다갔다하다가 내가 눈에 뜨이지 않으면 <박정희 이 * 어딨어!> 하며 고함을 질러댔어! 그 사람이 군복을 벗고서 동기생인 채명신이한테 돈을 얻으러 온거야.
채명신이 나한테 기별을 했는데, 내가 직접 돈을 주자니 그 사람이 얼마나 무안해하겠나. 우리가 다 세상을 잘못 만난 바람에 오해를 했던 것 아니겠어" 하고 그 친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는 그 뒤 장님이 된 채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송요찬은 또 육군참모총장이 되자 1959년 7월 1일 박정희 소장을 6관구(수도경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박정희 장군의 눈물>
제2공화국의 헌법은 고전적(古典的)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에 준거한 것이기 때문에 형식상 가장 민주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정권의 정통성도 갖추고 있었으나 정권 내부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국민통합에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민주당의 당내투쟁은 사실상 감투 분배를 위한 정권쟁탈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정권을 물려받고서도 신생국가(新生國家)의 새로운 설계를 가지지 못하고 밤낮없이 싸움으로만 세월을 보냈다. 민족의 대의(大義)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신구파(新舊派)의 감투싸움으로 이전투구의 추잡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으니 국민들은 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민 각 계층간에는 <방종>을 <자유>로 인식하여 밀수, 폭행, 도벌, 사기, 협잡, 마약, 절도, 살인, 방화 등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마치 <자유>인 양 갖가지 부조리가 훤한 대낮에도 거리낌없이 자행되어 가위 무법천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관이 범법자를 목격하고도 단속은커녕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어촌에서는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속출하고 빚에 짓눌린 농어민들은 목을 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도시에서는 실업자의 홍수, 외국상품의 범람, 일본문화의 상륙,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틈탄 공산주의자들의 간첩침투가 나라의 운명을 누란(累卵)의 위기 속으로 휘몰아 가고 있었다.
더구나 혈기왕성한 젊은 대학생들은 민족적 감정과 통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결과에 대한 판단은 하지 못한 채 불같은 정열만 가지고 남북회담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전국의 17개 대학학생들은 <민족통일 전국학생 연맹>을 결성하고 남북한의 학생대표들이 무조건 판문점에서 만날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그 무렵 박정희 소장은 대구에서 선산으로 가는 도중 남부여대한 한 무리의 가족들이 유랑민의 모습으로 처참하게 길가에 쓰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지프차를 세우고 그들의 행색을 바라보았다. 굶주린 아이의 커다란 눈이 생기를 잃고 두려움과 원망의 빛으로 허공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남루한 옷섶에 드러난 앙상한 가슴팍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박 장군은 더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전신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실의와 좌절, 굶주림과 허탈, 원망으로 가득 찬 저 군상들을 어찌 한단 말인가! 저 어린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이 나라 정치인들은 권력욕에 눈이 어둡고 감투싸움으로 무작정 세월만 보낼 것인가! 아니다! 이 나라 정치인들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한다. 우리도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신부터 뜯어고치고 사회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확 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개혁! 정치개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린아이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의 입술은 더욱 굳게 다물어지고,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한 가닥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출처] 청렴결백한 장군 박정희 |작성자 보물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