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츠냐, 그 비극의 시작은 소련연방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 소련연방이 붕괴되자, 연방을 구성하던 공화국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CIS(독립국가연합)이 곧 등장하지만, 각자 공화국들은 "내부단속"이 더 절실했다. 러시아만해도 러시아 연방공화국은 내부에 수많은 자치 공화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옐친의 행정부는 이들 자치 공화국들이 러시아연방에 잔류하도록 만드는게 급했다.
옐친에게 있어서 가장 골칫덩어리는 "체츠냐"와 "타타르" 자치 공화국이었다. 나머지 공화국들이 연방에 잔류하겠다는 협정에 서명을 마친 순간에도 이들은 완강했다. 옐친은 각개격파를 시도했고, 우선 "타타르" 자치 공화국과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옐친은 타타르의 수장이 요구하는 대폭적인 "자치권"을 허락하고서야 그의 사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체츠냐"는 완강했다.
그도 그럴것이 체츠냐는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시아 공군장성" 조하르 두다예프"가 이끄는 정치조직 "체첸 국민회의" 소속 민병대가 체츠냐의 소비에트 회의장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의장을 사살하고, 주요 멤버를 체포했다. 이로서 조하르 두다예프에 반대할 세력은 일단 기세가 꺾였다. 사실 처음부터 두다예프가 인기가 높았던 것은 아니다. 두다예프를 처음부터 지지했던 것은 체츠냐 내부가 아니라 "에스토니아 거주 체첸인 회의"라는 단체였다. 아마도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체츠냐에서 추방되거나 망명한 체첸인으로 판단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진 두다예프는 사실상의 쿠데타로 체츠냐를 장악한 것이다.
물론 반대세력들은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과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용병까지 얻었다. 이들은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노련한 두다예프의 민병대에게 금새 제압당했다. 결국 러시아는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두다예프의 체츠냐 민병대에게는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외에 상당수가 러시아군과 구소련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어, 러시아군의 전술에는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들은10여명의 소규모의 타격팀으로 편성되어 대전차 화기로 무장하고 러시아군을 노렸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전차포가 대적하기 힘든 각도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지하실이나 고층빌딩에 매복했다.
러시아군은 이번 작전을 1956년 헝가리 침공작전처럼 별 어려움없이 해결할 수 있을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바보는 아니었기에 나름 준비를 한 상태였다. 시가지에서 전차포는 각도의 문제상 고층건물 전투에 부적합함을 알기에 러시아군은 "퉁구스카" 자주대공시스템을 시가지 전투를 위에 임시로 투입하였다. 퉁구스카의 사격각도는 기존의 러시아 전차들 보다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스탈린그라드"식 시가지 전투를 가급적 피하기 위해서 게릴라를 "꼬셔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체첸군의 RPG 공격을 유도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기갑차량에 상당한 규모의 반응장갑을 비롯한 방어장비를 추가시켰다. 이를 통해 타격손실은 최소화 하면서 적의 위치를 확인해 섬멸할 생각이었다.
1994년 12월 31일, 마침내 러시아군 기갑차량이 "그로즈니"를 향해 진격했다. 이 원정군은 각종 차량들이 뒤섞여있어 다소 혼란스러웠다.그리고 막강한 화력이긴 했지만, 한가지... 러시아군 기갑병들의 훈련수준이 형편없고, 지휘관들이 교육이 부족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막강한 "항공전력의 우세"를 충분히 활용해 이를 극복할 예정이었다. 하늘에는 무적의(?) 하인드 공격헬기와 수호이25"루크"가 지원을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사고를 치고(?) 있었다. 러시아 공군은 진격하는 러시아군 기갑차량을 오인 공격해 차량5대가 파괴되었고, 진격로 상의 마을들을 폭격했지만, 이들은 "반-두다예프, 친-러시아 파벌"에 속한 것들이었다.
러시아군의 계획은 간단했다. 4개 방면군으로 편성된 부대를 각각 배정된 방향에서 동시에 그로즈니 시가지로 밀고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숨에 시가지 중앙의 "대통령궁"을 접수할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이란게 항상 계획대로 척척진행되지는 않는법, 러시아군은 이미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반 바비체프 소장의 "서부 방면군"은 예하 제19기계화 소총 연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제때 진격하지도 못했다.
동부방면군에서는 바딤 오를로프 소장의 제104 공수사단이 제때 합류하지 못했다. 그결과 단독으로 작전에 투입된 "레닌그라드 군관구"소속 제129 기계화 소총 연대는 합동작전을 수행하지 못한채 진격하다가 대패해서 도로 밀려나 버렸다.
그나마 북부방면에서는 레프 로클린 중장의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소속 제8군단이 작전을 착실히 수행해서 그로즈니를 향해 비교적 순항중이었을 뿐이다.
결국 체츠냐 사령부는 동시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나톨리 크바신 중장의 "러시아 주력군"을 상대하면 되었다. 러시아 주력군은 제131 기계화 소총여단 과 "사마라"주둔 제81 기계화 소총 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131 여단의 임무는 새벽에 그로즈니 북쪽에서 시가지로 진입해 철도역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81연대는 131여단의 좌측방에서 "페르보마이스카야 거리"를 소탕할 예정이었다.
81연대의 기갑차량들은 2개 그룹으로 나뉘어 "페르보마이스카야 거리"로 진입했다. 무려 1마일에 달하는 엄청난 행렬이었다. 첫번째 차량이 "대통령궁"에 접근하려던 순간, 선두 그룹이 매복을 당했다. 체첸군은 소화기와 로켓을 동원해 집중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러시아군의 기갑차량이 공격하기 힘든 지붕이나 지하실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러시아군 대열은 도살장이 되어 버렷다.
체첸군 RPG 사수는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대열의 첫번째와 마지막 차량을 공격해 대열을 마비시켰다. 러시아군의 전차들은 포탑의 각도상 체첸군 대전차화기 사수를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현장지휘관 "스탄케비치"대령은 생존자들을 지휘해 러시아군 지역으로 합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들은 도중에 간신히 러시아공수부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81연대의 각종 차량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거리에 내버려졌다. 체첸군은 승패가 결정나자 재빨리 다른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한편, 정오무렵 131 기계화 소총여단의 첫 대대가 목표했던 "철도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좌측방을 맡은 제81 연대가 떡이되어 물러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편 두번째 대대가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화물역"에 도착했다. 세번째 부대는 도시 외곽에 도착한 상태였다. 철도역에 도착한 부대는 전차와 장갑차를 주차하고, 추가명령을 기다혔다. 그 순간 부대의 통신담당장교는 러시아군 전용통신채널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자가 나타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진 것이다.
얼마뒤, 철도역을 둘러싼 창고와 우체국, 각종 건물에서 체첸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기습에 당황한 러시아군은 철도역안에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사령관인 "이반 사빈"대령은 서둘러 항공지원과 포병사격을 요청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131여단이 절박한 상황에 놓인 그 순간에 러시아군은 믿기지 않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새해를 앞둔 시기에 벌어진 작전인터라, 대부분의 부대들이 새해맞이 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철도역에 주둔한 본대가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2대대와 3대대가 합류를 위해 달려왔지만, 철도역을 앞두고 체첸군에 저지당했다. 이들 부대는 체첸 대통령궁 방면에서 우회해 진입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미 그곳은 81연대의 잔해로 막힌상태였다.
결국 제 503 기계화 소총사단의 일부가 명령을 받고 구원하러 달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점차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을 체첸군으로 오인한 다른 부대가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확인할때까지 장장 6시간 동안 서로를 행해 중화기를 퍼부었다. (훗날 밝혀진 것이지만, 이들 중에는 실제 체첸군도 일부 섞여 있었다.)
그로즈니 시가지의 체첸군인..
한편 북쪽 방면에서 진입하던 레프 로클린 중장의 제8군단이 그로즈니 도심에 진입했지만, 그들 역시 매복에 걸려서 131여단(마이코프여단)을 도울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철도역의 131여단 본대는 아무런 추가증원도 받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자, 사령관 "사빈 대령"은 하나 남은 장갑차로 부상자를 탈출시키기로 결심했다. 장갑차는 부상자로 만원이었다(총40명이 넘게 탑승했다고 한다). 운 나쁘게도 장갑차는 방향을 잃어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이들이 상황을 알아챘을때는 이미 늦었다. 체첸군의 대전차사격으로 장갑차는 박살이 났고, 운좋게 살아남은 13명은 모두 생포되었다.
1월 2일, 사빈 대령과 그의 남은 부하들은 철도역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철수중에 그들은 무수히 버려진 러시아군의 각종차량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체첸군은 이미 외곽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한 상태였고, 사빈 대령과 그의 부하들은 이내 매복에 걸렸다. 치열한 총격전 끝에 사빈 대령은 전사하고,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월 3일,
131 여단은 전사자만도 800명을 넘은 상태였다. 추가로 75명이 생포되었고, 단 160명 만이 무사히 철수했다. 여단의 장교 대부분이 전사했고, 보유장비중 전차 20대(총26대 보유), 각종장갑차량 102대(120대 보유)를 잃었다.
같은 시각, 이번 원정을 총 지휘하던 러시아군의 그라체프 장군은 "그로즈니 도심과 몇몇 지구, 그리고 도시 외곽을 러시아군이 장악했다"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재앙이 닥친 것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
후기-
러시아군의 새해맞이 공세는 처참한 결과를 만들었다. 도심에 투입된 120대의 전차 중 105대가 상실되었고, 131"마이코프"여단의 본부대대(1대대)전체와 81 연대의 전투력 50% 이상이 소실되었고, 남은 부대들에서도 수백명이 죽었다.
한 고위급 러시아 장성은 "1월2일에 우린 전방부대와의 교신이 두절되었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두다예프의 체첸군은 지휘관 마스하도프에 의하면 "러시아군 기갑차량 400대 이상을 파괴했다" 고 한다.
도심에 투입되었던 "스페스나츠 파견대"는 아무런 보급을 받지 못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흘을 버틴후 대부분 체첸군에 항복했다.
체첸군에 생포되어 훗날 석방된 어느 러시아군 중령의 이야기다.
"사흘동안 먹지도 못한채 의지할 곳없이 거리를 떠돌며 싸우다 보니, 그들이(체첸군)이 제안한 것(항복권고) 이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알았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오직 진격하라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다. "
굼뜬 러시아군에 비해 기동력이 우수했던 체첸군은 이제 도시 외곽의 러시아 지원부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주요 목표는 포병대였다.
다수의 생포된 러시아군 병사들이 TV에 세워졌고, 협상을 위해 이들의 부모 들 몇몇이 그로즈니로 보내졌다. 러시아군은 자존심이 완전히 짖밟혔다. 러시아 정부는 협상을 지원하지 않았고, 심지어 공격을 계속했다. 생포된 러시아군 병사 일부가 다시 싸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한편 두다예프의 사령부는 이미 그로즈니에 없었다. 25킬로미터 떨어진 "샤리"에 지휘부를 차린 두다예프는 여전히 그로즈니 시가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대다수가 도시 밖으로 철수했다. 도시를 포위한채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체첸군도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지만, 계속 유지할 전력은 부족했다. 당장 로클린 중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북부 방면군(제8군단)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로클린의 부하들은 참호를 파고 버텨냈다. 두다예프의 체첸군은 이들을 도시에서 몰아내는데는 실패했다.
1월 4,5일에 걸쳐 체첸군은 그로즈니 남부의 도시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기전을 위한 이동이었지만, 금새 러시아군에 발각되어 이동내내 공습을 받아야 했다. 한편 그로즈니 시가지는 여전히 체첸군 결사대에 의해서 사수되고 있었다. 이제 양측은 활발한 증원을 개시했다. 체첸 남부에서 체첸지원병이 도착했고, 러시아군은 러시아 해병대를 추가증파했다.
한편 러시아군은 포병전력과 항공기를 동원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에는 "백린탄"과 "기화폭탄"까지 무기를 가리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소규모 특수부대들은 대때로 시가지에 투입되었고, 러시아군 저격수들도 그로즈니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로즈니 시가지 전투재개가 임박했고, 목표는 당연히 "대통령 궁" 이었다.
이후 전투는 재개되었고, 대통령궁은 집중폭격을 받았다. 한때 러시아군의 벙커버스터 탄이 체첸군 사령관 "마스하도프"의 집무실까지 뚫고 들어갔지만, 탄두가 폭발하지 않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대통령궁을 향한 목줄은 점차 단단히 조여들었고, 결국 체첸군은 대통령궁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2월 13일 지칠대로 지친 러시아와 체첸은 제한적인 종전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이후에도 충돌은 계속되었다.
1차 체츠냐 전쟁의 러시아군 사상자에 대한 공식적인 수치는 1376명 전사에 408명 실종이다. (반면 두다예프는 "새해 그로즈니 공격"에서만도 4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 인권수호자 협회는 15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솔직한 데이터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아래에 131 "마이코프" 기계화 소총여단에 대한 개략사가 이어집니다. 참고하시길...
마이코프 여단 개략사
마이코프 기계화 (소총) 여단의 전신은 제9 "쿠르스크"사단이다. 부대는 적백내전중인 1918년 7월20일에 신생 소비에트 연합의 창설 보셩사단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부대는 코카서스 지역에 주둔하였고, "트랜스코카서스"군관구에 쭉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제 9소총사단으로 명명되었으며 1922년 제1 코카서스 소총사단으로 개명되었다. 내전 종료후 사단은 여러차례 명칭을 변경했으며 1928년에는 그루지아 소비에트 중앙행정위원회로부터 "적군 창설 제10주년을 기념하여 "혁명근위대"와 "적기" 타이틀을 수여받았다.
1931년 사단은 산악소총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1936년 사단은 "붉은 별 훈장'을 받았다. 동년 7월 사단은 다시금 제9 "적기" 산악소총사단으로 개명되었다.
사단은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31소총사단과 함께 제40 소총군단에 배속되어 "트랜스 코카서스 군관구"의 작전에 투입되었다. 전쟁 중 사단은 다양한 야전군에 배속되어 "코카서스 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1943년 9월 3일, 쿠반해방작전이 성공하고 그 중심지 "크라스노다르"가 탈환되자, 사단은 "크라스노다르스카야"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었다.(필자주- 러시아는 유명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지역명칭을 부여한다. 네바강 하구에서 스웨덴 군을 격퇴한 노브고로드의 대공 "알렉산드르"는 "네프스키"라는 칭호를 얻었고, 몽골군을 "돈강 연안의 쿨리코보"에서 격파한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대공은 "돈스코이"라는 명예를 받았다)
사단은 다시금 개칭되어 널리 알려진 "제9 플라스툰스카야- 크라스노다르- "적기" 소총사단" 으로 개편되었다. 이번에는 쿠반지역의 "코사크"들을 대거 "하사관"으로 충원하였다.
1944년에서 45년 사단은 "르부프-샌도미에르즈 공세 44년 7월 13일-8월 29일)의 공세에 참가했고, 45년 4월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공로로 2급 쿠투조프 훈장을 받았다.
종전후, 사단은 "크라스노다르"로 귀환했고, 1950년 "마이코프"로 재배치 받았다. 1956년의 부대개편후 사단은 제9 기계화 소총 사단이 되었고, 그 이후로 "마이코프"에 계속 주둔했다. 1992년 12월 12일 사단은 제131 "쿠투조프-레드스타"독립 기계화 소총여단으로 재편성되어 "북 코카서스 군관구"의 제67 군단에 배속되었다. 속칭 "마이코프"여단은 1994-96년의 1차 체츠냐 전쟁에 투입되었고, 특히 "1995년 신년 그로즈니 공격"에 참가했다. 철도터미널 점령작전을 수행했던 마이코프 여단은 157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휘관 "사빈" 대령을 포함해 24명의 장교가 전사했고, 준사관 1명과 부사관 60여명과 다수의 사병이 전사했다. 그리고 12명의 장교와 1명의 준사관, 59명이 부사관외 사병들이 실종상태다(사망추정)
여단은 T-72 전차 22대와 BMP-2 45대, 각종차량 37대를 잃었다고 한다(하지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이 수치는 작전시 부대에 배정된 장비숫자보다 더 많은 손실이라는 이유로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고도 한다)
마이코프 여단은 전투중 포위되었고, 보유장비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병사들은 살기위해 소그룹으로 분산해서 탈출했다.
여단은 3월에 들어서야 부대를 수습해 "구데르메스" 작전에 재투입되었다. 여단이 입은 총 손실은 1282명에 달했다
1995년 4월 26일, 여단은 "아디게야"로 귀환했으나 석달만에 다시금 체츠냐 전역에 투입되었다. 1996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작전기간 중, 여단은 2개의 기동대대로 개편되었다.
체츠냐 전역에서의 작전 이후에도, 여단은 여전히 "코카서스" 지역에 머무르고 있으며 , 부대는 다시 한번 명칭을 "제131 독립 기계화 소총 "크라스노다르-적기" 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예하 2개 대대는 각각 그루지아"유르타" 지역과 "압하지아-그루지아" 국경지대에서 근무 중이다. 대대원과 여단예하 전차대대는 직업군인으로 완전충당되었다. 징집병 대신 전문군인을 채용한 결과 여단은 2005년 "코카서스 군관구" 부대작전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