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입니다.)
?길고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는 몬테 카시노라는 산 정상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수도원이
있습니다. 바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이 그것인데, 이곳은 524년 성 베네딕토에 의해 설립되고 그 스스로도 그곳에
기거한것으로 유명한, 그래서 천주교인들에게는 성지인 그런곳입니다. 또한 이 수도원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데 그 이유는 긴긴 세월동안 보관되어온 귀중한 서적과 보물, 예술품들이 가득 채워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1944년1월, 나치 독일이 수세에 몰린지도 3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한지도
반년이 흐른 시기였습니다. 1943년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이탈리아 반도 본토까지
밀고 올라왔고 히틀러는 무슨일이 있어도 로마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로 인해 케셀링 원수가
이끄는 C집단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험난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구스타프 라인을 구축합니다.
로마를 사수하기 위해 구축한 구스타프 라인. 몬테 카시노가 라인 뒤에 있는것이 보입니다.
몬테 카시노 주변의 높은 언덕들은 독일군에게 있어 정찰을 하기위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몬테 카시노는 연합군에게 있어 로마로 진격하기위해 꼭 지나야하는 관문이였고 이는 독일군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몬테 카시노 주면은 수많은 계곡과 가파른 언덕들로 이루워져있었기 때문에 미리 방어막을 구축하고 연합군을
기다리는 독일군에게는 방어하기 최적의 장소였고, 실제로도 1차 전투가 시작되자 높은 언덕들 위에서 연합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면서 포탄을 날려대는 독일군 포대에게 있어서 계곡밑의 연합군은 좋은 표적이였습니다.
몬테 카시노 주변의 계곡들은 연합군 병사들에 의해 죽음의 계곡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폭격을 당하기 전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모습
한편 수도원의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던 케셀링 원수는 구스타프 라인에 수도원을 포함시키지 말것을 명령하였고
연합군에게도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문화유적의 손실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 지휘관들은
이를 독일군의 기만작전으로 의심하였고 또 수도원이 독일군의 포격 관측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수도원을 파괴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수도원에 관해 아무런 정보가 없던 연합군측은 어떤 방법으로
파괴해야할지를 고민했지만 제 4 인도사단의 프랜시스 터커 소장이 구해온 서적을 통해 수도원의 특징을 알아냅니다.
암흑기였던 중세시대에 세워졌고 위치 또한 요충지였던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외벽 두께만 3미터가 넘었고 그로인해
왠만한 포격으로 파괴하는것은 어림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수도원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공군력을 동원해서
폭격을 해야했습니다.
아무런 성과없이 독일군에게 격퇴되어 후퇴한 연합군은 2월 11일 정식으로 수도원 폭격 요청을 하였고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나뉘게 됩니다. 제 5군의 마크 클라크 중장과 알프레드 그루엔터 소장은 작전상 필요성 때문에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직접 수도원 근방에서 전투를 지휘한 제 34사단의 부관 버틀러 장군또한
독일군이 수도원을 점거하고 있다는것은 사실이 아니며 실제 독일군의 공격은 수도원 아래의 언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폭격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합군도 손만 빨며 앉아있을수는 없었음으로
이탈리아 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알렉산더 장군에 의해 폭격요청이 승인됩니다.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결국 1944년 2월 15일 아침 142대의 B-17 폭격기와 47대의 B-25, 그리고 40대의 B-26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4시간 동안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쉴세없이 때려댔습니다. 폭격하는 동안 연합군은 총 493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있던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많은 수의 연합군 병사들이 환호하며 지켜보았고
폭격에 반대하던 클라크 장군과 그루엔터 장군은 폭격의 참관을 거부한채 사령부에 틀어박혔습니다. 폭격 이후
다음날까지 포병의 추가 포격이 이루워졌고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 위에 59대의 전폭기가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수도원의 파괴 소식을 들은 당시 교황이였던 피우스 12세는 어떠한 공식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지만, 보좌관 매글리온
추기경은 바티칸의 미국 대사 해럴드 티트만을 불러 크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전쟁중이기에 어쩔수 없었다고 정당화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훗날 나온 조사결과로 인해 연합군측의 폭격은 아무런 성과도 없고 무의미하며 오히려 해가 된
작전이였다고 밝혀집니다. 실제로 케셀링 원수는 독일 병사들을 수도원 근처에도 못가게 하였고 그로인해 폭격으로
수도원에서 죽은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수도사들과 이탈리아 피난민들이였다고 합니다. 수도원 지하실에 숨어있다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40여명의 수도사들과 민간인들은 독일군측의 도움을 받아 후방 병원으로 이송됩니다. 연합군의
실수는 여기서만 그치는것이 아닌데 투하된 493톤의 폭탄중 단 10% 만이 수도원에 맞았고 나머지 대부분의 폭탄들은
독일군은 물론 연합군의 진영에도 떨어져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적을 파괴한것 치고는
연합군은 아무런 이득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조준사격을 가하는 독일 공수부대원
케셀링 원수의 명령에 의해 수도원 근처에도 못가본 독일군이였지만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수도원이 파괴되자
더이상 눈치볼것이 없어진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폐허속으로 숨어들어 진지를 구축합니다. 애초에 튼튼하게
지어진 (수도원이였지만 중세시대때 지어진 만큼 실제로도 요새로써 구실을 했다고 합니다) 건축물이였기에
아무리 폭격을 맞았어도 뼈대는 그대로 남아있었고, 파괴된 성벽의 잔해들은 자연적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은 독일군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제 1 공수사단이였고 이들은 요새화한 폐허속에서 3개월간 주둔하며 연합군을 괴롭힙니다.
그 유명한 구르카 용병부대도 궤멸될만큼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폭격을 가한 2차 전투부터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4차 전투까지 연합군은 5만 5천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었고 독일군 또한 2만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완전히 재건된 몬테 카시노 수도원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구되게 되는데, 성 베네딕토에 의해 새워진 이래
오랜 세월동안 총 5회나 파괴가 되었고 5회 모두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자체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
되었지만 다행히도 폭격이 있기 전 독일의 슐레겔 중령에 의해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예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소실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롬바르드족 얼굴을, 우측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철모와 폭탄 그림을 새겨넣어져 있다고 합니다.
몬테 카시노 수도원 아래에 위치한 연합군 전사자들의 묘비
연합군의 치명적인 오판으로 인해 귀중한 문화유적이 손실되었고 막심한 민간인 피해까지 발생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독일군에게 손수 바리케이드를 제공함으로 인해 전투가 3개월이나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피해를 극대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단지 문화유적을 파괴함으로 만든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나 결과가 그러했고 몬테 카시노 수도원 폭격은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입니다.
현재 몬테 카시노 전투중 전사한 영국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인도인, 구르카인과 남아프리카인들을 안치한
영연방 군인묘지(Commonwealth War Graves)는 카시노 서쪽에,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을 위한 묘지는 리리 협곡의
6번 가도 근방에, 미국인은 안지오에, 독일인은 카시노 동쪽 라피도 협곡에 각각 안치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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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Necrosant의 레어 - 몬테카시노 전투 (Battle of Monte Cassino)와 위키피디아를 참조해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