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나쁜 남자]에 대해 예전에 감독(김기덕)과 교류하였던 글

김현슥 작성일 06.08.22 14: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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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내공 : 상상초월


예전에 김기덕의 영화 '나쁜남자'를 보고 내가 느낀 감동과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를 통해 깊은 대화를 시도하는 감독으로서의 장선우감독과 그 한참 이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등을 보고 영화라는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나에게...

김기덕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의사소통방식의 충격적 폭과 깊이를 진지하게 진행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기덕 감독을 한사람의 감독으로 아주 깊은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참된 '소통', '대화'에 도달하려 발버둥치는 감독....

모든 예술은 '대화'에 도전하는 투쟁이다.

그것은 기존의 대화 틀에 도전하며, 보다 진정한 새로운 틀과 양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깊이있는 대화에로 도전하는 예술이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다면, 이런 예술 본래적 목적에 도전하는 아방가드한 감독들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며, 그 감독은 그만한 시대정신적 사유에 도달해 있어야 하고, 그런 감독은 당연히 인간의 근본문제들, 철학, 종교적 주제에 대한 민감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김기덕은 그런 감독들 중에 하나이며, 그 소양에 있어서 아주 알찬 감독중 하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하튼 최근에 김기덕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술자리가 아니라, 공적 자리에서 그만 매스미디어를 향해 내뱉음으로 당하고 있는 여러 낭패와 상처에 대해 들었다.

오해할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짱공유 영화 리뷰 계시판에 내 말에 공감하는 그리고 '대화'할 수 있는 고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고자 이전에 썼던 '나쁜남자'에 대한 글을 올려본다.

이글은 나쁜남자 영화 홈페이지에 올렸었고, 김기덕은 이 글에 답글을 달았었다.

그 답글의 내용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김기덕은 신학교 출신의 신학도였으며, 그의 친구는 맹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고, 그 스스로는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병고침을 받은 경험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쁜남자를 만들기 까지 모든 영화는 '종교영화'였다는 것. 등.......

그는 내 글(아래에 붙여둔...)을 읽고, 울면서 그 답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였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절망과 상처 가득한 세상에 대한 종교적 해답을 구하는 '한'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다 이런 문제에 관심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무도가 다 종교적 해답을 구할 만큼 삶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는 못한다는 것.......





----------이하 '나쁜남자'에 대한 해석.... -------------------------------------








김기덕의 영화는 지금껃 나를 매우 당황하게 해온 영화들이었다.

그는 고통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그리고 수단으로 사용한다.

고통이라는 영화 시리즈를 만들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던 때가 대학교 2학년 때 였다.

그런데 김기덕의 영화는 나의 그러한 모든 생각들을 아낌 없이, 때로는 조금 넘치게 표현하는
영화들이었다.

악어, 섬, 야생동물보호구역, 수취인불명, 나쁜남자, 파란대문?

나쁜남자는 특히 그 마지막 부분에 나온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노래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허거덕.

혹시나 하였던 예감이 적중하는 듯한 섬찟함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영화를 보며 느낀 내 예감이 맞는것 같았다.

그 노래는 복음성가로 널리 불리는 노래였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눈앞에 어려운 일보네.

주님 앞에 이몸을 맞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면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다정스래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고3때부터 즐겨불렀던 복음성가였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단련시키시는 방법이 김기덕의 영화처럼, 그런 패턴을 어느정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늘보좌버리고 이 땅위에 말 구유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의 가장 천한 동네 갈릴리에서 자라시고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는 주님.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사람을 들라면 바울이 아닐까?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요, 로마 시민이었던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 모든 인간적인 비전과 장래를 버린다.

그리고 그는 쫓기는 자, 두들겨 맞는 자, 결국에는 죄수가 되어 사형장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하였다.

김기덕은 개인적으로 그런 유사한 경험을 한듯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걸 염두에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런 뉘앙스가 있었다.

어쩜 그는 고상한 미술학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영화판에 어떤 계기로 들어오게 되었고, 현실 영화판에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였을 지도, 영화가 표현한 것 처럼 창녀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는 그를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고 천하게 여기던 창녀촌같은 세상 가운데서 살게 한 그 "나쁜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그 "나쁜남자"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극중에 선아를 사랑하는 여러 남자들이 나온다.

맨처음 나온 그녀의 대학생 연인, 그의 사랑은 포시랍다. 함께 쇼핑하고 군것질하고 여관앞에서 실랑이 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나쁜남자가 선아를 갖기 위해 구성한 작은 시련 앞에서 무너진다.

선아를 사랑한 또다른 남자가 있다. 바로 "나쁜남자"의 제자, 똘마니, 꼬봉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사랑은 선아의 육체와 그녀가 여대생이었다는 데에 근거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집요하지도, 강력하지도 않다. 그저 힘없이 그녀를 그 표면적 고통의 장소인 창녀촌에서 탈출시키는 것에서 그친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잡혀온 선아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친다.

나쁜남자는 선아로 부터 완전한 사랑을 얻기 위한 한가지 목적에 강력하게 집착한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얻는 것보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을 갈구한다.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 노력을 그려놓은 감독의 극적 테크닉이 돋보인다.

그것은 거울을 사이에 둔 사랑이었다.

거울 뒤에서 그녀의 모든 삶을 지켜보는 나쁜남자는 그녀가 그를 진실로 사랑하기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보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선아는 처음에는 나쁜남자를 멸시한다.

그녀는 맑고 청순한 여대생이고 나쁜남자는 머리를 빡빡 깎은 험상궂게 생긴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런 멸시에 나쁜남자는 강제 키스로 응수한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녀의 대학생 남자친구가 있는 중에 행한 그의 돌발 행동은 행인들의 몰매를 자초한다. 그리고 선아의 침뱉음.

그러나, 그렇게 당당하던 아의 자존심과 미래를 지탱해주던 것들은 나쁜남자의 음모로 힘없이 붕괴된다.

잠깐의 소매치기 조작과 누명쒸움과 신체포기각서를 근거로 한 사채업자의 협력으로 그녀는 간단하게 그 모든 자존심과 미래를 잃어버린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돈 1200만원에 그녀는 창녀가 된다.

소매치기 혐의로 파출소 가는 것이 무서워서 우선 일을 무마하려고 사채를 썼고, 신체포기 각서를 썼던 것이 화근이었다.

참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서점에 책 위에 떨어져 있는 지갑에 손을 댄 것이 빌미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쁘고 청순한 미대여학생에서 "이썅년이"가 된다.

가혹한 강간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일은 이 세상에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6만원짜리. 6만원짜리 인생. 6만원짜리 육체. 6만원짜리 자존심. 6만원짜리 미래였던 것이다.

세상은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참혹한 세상에서 그 참혹한 현실이 엄연히 벌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모르고 있었기에 느끼지 못했을 뿐, 우리들의 안전은 참으로 그렇게 연약한 보호막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절망은 나쁜남자의 음모를 고자질하는 그의 꼬봉에 의해 분노로 변한다.

다시 빰때리기.

나쁜남자는 빰을 맞고만 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세상은 강력한 힘으로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거울 뒤에서 나쁜남자는 그녀가 당하는 모든 일을 다 보았다.

그는 대마초를 피우며 그 고통을 견딘다. 정말 처절한 표현이다. 음....

나쁜남자는 그녀가 서점에서 훔치려 했던 책을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의 음모로 자신이 창녀가 된 것을 깨달은 선아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망한다.

절망과 고통을 느낄 때 마다 선아는 거울을 본다.

거울 뒤에는 나쁜남자가 있으나 선아는 그를 보지 못한다.

꼬봉은 그녀를 사랑한다며 그녀를 탈출시킨다.

나쁜남자는 그녀와 꼬봉의 대화를 거울뒤에서 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집앞에서 그녀를 다시 납치한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다.

그 바닷가는 신비한 곳이다.

붉은 원피스의 여인은 선아의 또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나쁜남자가 이미 그녀와 똑같은 외모의 옛 애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쁜남자가 단순한 한기가 아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다겹의 의미층이 표현되어지는 장소다.

그 붉은 원피스의 그녀는 미래의 선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선아에게 남긴 얼굴부분만 찢어진 사진.

그것은 그녀가 나쁜남자와 자기의 관계를 깨달아 가는 도구가 된다.

다시 사창가로 돌아온 선아. 선아는 그 사진을 거울에 붙혀둔다.

거울은 reflection의 도구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도구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그 도구 뒤에 자신을 사랑하여 이자리로 이끈 그가 있다.

참 놀라운 표현이지 않은가?

절망한 그녀는 창녀가 된다.

창녀가 된다.

창녀가 된다.

창녀가 있는 나라에 사니 창녀가 된 그녀의 현실이 정말 아프게 느껴졌다.

나쁜남자는 술을 먹고 취한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찾아간다.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잠든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잠들고 나쁜남자는 침대 위에 잠든다.

아침이 되고 그는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다.

창녀가 되게 해서라도 자기를 사랑하는 나쁜남자.

정말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참혹한 세상이 일상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참혹한 창녀촌이 그 지저분한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일상임을 그는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창녀촌을 욕하며 더럽다 하는 우리들의 생존방식은 어떠한가?

반찬거리로 파를 다듬는 창녀들의 대낯 일상은 아름답고 평화롭게까지 보인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선아는 파를 다듬는 창녀들과 합류하여 파를 다듬는다.

묘한 감동을 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 동네를 접수하려고 등장하는 깡패가 있다.

나쁜남자는 저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는다.

선아는 피를 흘리는 나쁜남자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진다.

부상당한 나쁜남자는 벽돌을 든 깡패를 종이를 접어 만든 칼로 간단히 무찌른다.

종이칼에 찔린 깡패는 유리칼로 보복한다.

유리칼에 찔려 쓰러진 나쁜남자를 선아는 다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쁜남자도 쓰러지며 선아를 쳐다본다.

회복되어 돌아온 나쁜남자.

선아는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나쁜남자의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쁜남자는 부하의 보복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나쁜남자가 살인죄로 감옥에 가고 장사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던 선아가 면회를 온다.

감옥에서 나오라며 욕을하고 절규한다.

돌아가는 길에 부하가 선아에게 사창가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쁜남자가 말했다며,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가라고 하지만 선아는 사창가로 돌아온다.

가책을 느낀 부하는 사창가에 와서 거들먹거리며 돈을 뜯는 형사를 폭행하고 감옥에 간다.

전과가 있는 나쁜남자. 사형을 언도받는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나쁜남자. 부하는 그 감옥에 함께 있다가 자신이 진짜 살인범임을 극적으로 밝힌다.

출옥하는 나쁜남자.

거울 방에 들어간다.

선아는 울고 있다.

여자 포주가 들어와서 나쁜남자가 출감했음을 알린다.

선아는 거울에 붙은 사진을 보며 기뻐하며 운다.

그때, 나쁜남자는 라이타 불빛을 켠다.

선아는 비로소 나쁜남자를 본다.

둘은 포옹한다.

이 다음이 압권이었다.

나쁜남자는 선아를 맨 처음 만났던 명동의 벤치로 다시 데리고 간다.

이제 놔주는 것이다.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이건 무슨 불교적인 냄새가 확 나는 부분이었다.

깨달음의 과정을 한수 가르치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무슨 도사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나쁜남자는 선아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는 세상을.

그리고 헤어진다.

선아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국도를 따라 걸어간다.

사창가로 돌아온 나쁜남자에게 꼬봉이 대든다.

다른 부하의 감옥간 일과 선아를 놓아준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때 대드는 꼬봉을 때려주며 유일하였던 나쁜남자의 대사가 나온다.

"깡패섀끼가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목에 난 칼자욱, 성대를 다친 모양, 제대로 나지 않는 쉰 목소리로 겨우 내뱉는 이 대사 진짜 감동적인 대사였다.)

강에서 오줌을 누는 나쁜남자를 죽도록 얻어맞은 꼬봉이 칼로 찌른다.

쓰러지며 칼을 숨겨주는 나쁜남자.

이 다음이 묘한 부분이다.

제자, 부하의 배신으로 칼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나쁜남자 살아난다. (마치 예수처럼...)

아침에 그냥 깼다. 강가에서(강가라는 이 설정도 참 재미있는 설정이다... 강이 문학적으로 갖고 있는 메타포는 삶과 죽음의 경계, 넘어갈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한계 같언 것이다.... 이 것은 곧 이후 스토리의 전개는 초월적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로 간다.

선아도 어디론가 간다.

둘은 그 바닷가에서 만난다. (부활한 예수가 그 제자들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났듯이....)

그 사진에 있었던 그 옷을 사서 입고 만난다.

그들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바로 선아가 옛적에 이 바닷가에서 와서 줏었던 그 사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들은 트럭을 하나 마련한다.

뒤 짐칸에 침대를 사서 놓고,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 뱃사람들에게 몸을 팔고, 나온 선아에게 나쁜남자 담배를 권한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난다.

이 대목에서 앞에 말한 그 노래가 나온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 마다, 눈 앞에 어려운 일보내" 개사 되었던 그 독일 노래, 원곡 가사를 써드리겠다.

Carola - Blott En Dag 오직 하루..

오직 하루 한 순간만 / 나의 아버지의 손안에서 쉬는 모든 것들이 / 그 속에서 위안을 얻는 / 내가 아이로서 무엇을 갈망할 수 있겠는가 / 그는 내게 어머니의 마음을 갖게 하시고 / 그는 매일 매일 자비로움과 부드러움을 주시네 / 고통을 기쁨으로 만드는 / 그는 매일 내게 가까이 계시네 / 특별한 순간에는 특별한 자비를 베푸시네 / 일상의 근심을 대신 지시고 / 힘과 조언이라는 두 이름의 그 사람 / 그의 모든 값진 재산을 지키시고 / 모두를 보살피시네 / 당신의 날처럼 힘과 물질들을 / 그가 약속하셨네 / 편하고 고요하게 쉬게 하소서 / 사랑하는 아버지의 약속 안에서 / 값진 관의 위안을 헛되게 하지 마시고 / 내게 하셨던 약속대로 / 주여 도와 주소서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 당신의 믿음직한 아버지의 손에서 / 단지 하루, 한 순간만 /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난 여기서 미치는 줄 알았다.

김기덕은 항상 그렇지만, 또다시 영화 전체의 이 기막히고 충격적인 스토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난 이것이 그의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

모든 스토리가 매타포였던 것이다.

매우 처절한 그의 신앙고백이었다고 본다.

매춘으로 삶을 표현한 그의 정서는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이라는 첨언으로 그는 삶을 긍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랑하는 이가 누구일까?

나는 그 부분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감독에게도 이부분은 애매할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는 어떤 힘, 신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그 신적인 존재는 "나쁜남자"같은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하나님은 "나쁜남자"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실 그런면이 있긴하다.

안락함과 살얼음같은 평안에 안주하며, 처절한 투쟁을 벌이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현실을 외면하며 살다가, 그분에게 사로잡혀 생의 비참한 현실, 이 세상의 죄악된 현실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이 비유적으로 비슷하기는 하다.

그러나, 단지 매춘일까? 그분이 우리에게 권하시는 일이.

단지 매춘일까?

난 이 질문을 그 감독에게 던지고 싶다. 단지 매춘일까?

친구.

그것은 자신의 또다른 안락을 혹은, 무력함을 합리화하려는 여운남기기가 아닐까?

신이 우리들에게 허용하시는 일이, 그분의 하시는 일이 매춘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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