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인터넷에서 산 천원짜리 손톱깎이가 구입한지 이틀도 되지않아 부러졌었습니다 그래서 천원을 환불 받기 보다는 그 회사 직원과 입씨름을 한다고 전화비가 천원이 넘게 나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새 손톱깎이가 왔더군요. 미안하다며 회사측에서 사례로 영화예매권을 동봉했더군요.
전화비를 투자한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천원 짜리 불량 손톱깎이 덕분에 7천원짜리 영화를 *로 보게 된 셈이죠. 그 예매권으로 오늘 사일런트 힐을 친구들과 보러 갔습니다.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개인적으로 원작게임을 해보지 않은터라 별반 기대를 안하고 극장으로 갔지요.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벼운 기분으로 본 덕분에 의외로 괜찮게 영화를 본것 같네요. (사실 이 감독의 전작인 늑대들의 후예는 굉장히 재미없게 봤었거든요.)
게임이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태생적 한계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이해하기가 힘들다' 라는 명제도 영리하게 잘 비껴갔더군요. 오히려 이 영화를 보고나니 게임을 해보고 싶어졌으니까요. 영화의 전반적 스토리도 무리없이 이해가 가능 하구요.
그 중에서도 이영화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몇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으로 치닫으면서 밝혀지는 마녀재판에 대한 진실입니다. 마녀 재판은 그동안 많은 예술작품에서 모티브를 제공해 왔지요.
하지만 '사일런트 힐'에서의 마녀 재판은 영화를 보는 내내 단순히 마녀재판이 아닌 우리의 사형제도를 빗대고 있는건 아닌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형을 법정 최고형으로 기준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죄질이 나쁘면 피고인을 죽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법으로 명시해 놓은것 이지요.
사형 제도에 관한 정당성 논리를 나타내자면 다음과 같이 단순화 시킬 수 있지요. 정의 ---> 법 ---> 재판 ----> 사형 이라고 말입니다. 즉 법으로 정해진 정의를 재판을 통해서 말 그대로 '정의' 내린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오류가 발생 합니다. 바로 재판을 진행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겁니다. 현재 몇몇 소수 국가를 제외하고는 사형에 관한 법률은 보편적 정의를 글로서 옮겨 놓은것이 사실입니다. 그점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법은 항상 가치 중립적이니까요. 하지만 그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인간은 가치 중립적이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을려고 노력하지만 가치 판단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을 항상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니까요. 그러한 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의 심각성은 배가 됩니다.
교회로 모여들어 순수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은 지금 기다란 막대에 매달려진 '죄인'들이 빨리 불에 태워지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들의 머리속에서 지금 매달려진 사람들이 불경스럽고 용서 받지 못할 존재라는건 재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들의 재판관인 '크리스타벨라' 가 유죄를 선고 했으니까요. 화형식 뒤의 죄의식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불에 태워졌으며 불로 인해 오히려 그 죄인을 정화시켜 줬으니까요. 있을수 없는일 이지만 혹시나 판결이 잘못되어졌더라도 양삼의 가책은 수반되지 않습니다. 판결은 그들이 내린것이 아니라 '크리스타벨라'가 내렸던 것이니까요.
그녀의 결정권에 있어서 동조를 했을뿐 만약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크리스타벨라'의 잘못인 셈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러한 책임을 자기가 지게되는 대신 무소불위의 권위와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최종적 책임은 그들이 믿는 '신'의 몫이니까 누구도 책임은 지지않아도 됩니다.
과오는 있지만 책임질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구입한 천원짜리 손톱깎이도 책임을 지지만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저울질 하고도 책임질 사람은 없는 재미있는 세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