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렉터.. 악마가 깨어나 쾌락을 만났을때 (한니발 라이징)

해에밀 작성일 07.03.04 12: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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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는 악이 잠재돼 있다. 포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이 악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엿볼 수 있는 사소하지만 이기적인 행동들, 그것 역시 알고 보면 악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과 그 욕망이 우선이며, 그 결과의 규모와 상관없이 악한 행동은 그에 따른 결과물이다.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도덕군자들이나 성인(聖人)들은 욕망과 본능의 유혹을 진정으로 이겨낼 수 있었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원동력은 남보다 뛰어난 인내심이다.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없이 선한 사람도 우연한 계기로 악인으로 돌변하거나, 현실 속에서 치열한 이전투구를 벌이다가 악의 화신이 되는 경우도 마주친다.

뚜렷한 목적을 안고 현실과 싸웠지만, 그 목적을 잃고 헤매이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를 본다면, 악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한 후천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악은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20세기 최후의, 그러나 최고·최악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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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전문기자 출신 소설가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한 ‘한니발 렉터’는 완벽한 악마의 모범을 보여준다.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과시하는 천재적인 법의학자이지만, 연쇄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며 살해수법 역시 누구보다 잔인하다.

<한니발>에서는 인간의 뇌를 먹기도 하며, 세상 그 누구보다 점잖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린 아이에게 뇌 요리를 권하기도 하는 등, 그의 악은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세련됐지만 누구보다 거칠고 사악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한니발 렉터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양들의 침묵>에는 한니발 렉터를 중심으로, 선악에 대한 두 갈래의 고민과 인간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온갖 콤플렉스들이 다양하게 충돌한다.

클라리스(조디 포스터)는 유년시절을 보낸 친척의 목장이 알고 보니 ‘도살장’이었다는 점을 상처로 여기는 캐릭터로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양을 구해줘야 옳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녀는 양을 데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의 품에 안겼던 양은 울부짖으면서 그녀의 ‘정의’를 스스로 깨버린다.

한니발 렉터는 그런 행위 자체를 쓸데없는 짓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양은 울음을 멈추었나?”라는 질문에 핵심이 담겨있다. 어설픈 정의가 무의미하다는 뜻도 있지만,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녀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뜻도 있다. 그게 인간의 현실인데, 너는 왜 그렇게 잘난 척하며 오버하느냐는 빈정거림이다.

독심술의 대가이며, 누구보다 잔혹한 수법의 살인마. 그는 클라리스의 연쇄살인 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심리적으로 가지고 놀았다고 봐야 한다. 그에게 맞선 숱한 캐릭터들이 처한 비극을 생각해본다면, 그 정도로 그친 것에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니발 렉터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면서 ‘정의’라는 가치에 대한 회의를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세상은 자신에게 맞서는 것을 정의라고 하지만, 그 댓가는 처참했거나 광적인 복수에 몰두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악’이라 부르는 인간의 잠재된 본능과 욕망을 흔들어 깨우는 것. 그는 ‘몬스터’다.

한니발 렉터, 태어났는가? 아니면 만들어졌는가?

"어린 한니발은 1944년 눈위에서 죽었어. 그 아이의 마음은 미샤와 함께 죽은거야. 지금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군. ‘몬스터’ 말고는."

오는 28일에 개봉하는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 렉터’의 성장과정을 담은 토머스 해리스의 동명 프리퀄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그는 2차대전 당시 라트비아 성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일단의 독일 군인들로 인해 부모를 잃었고, 어린 여동생이 인육이 돼 희생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봤던 어두운 과거가 있다.

ctzxp_347669_1[589524].jpg▲ 한니발 렉터, 그에게도 해맑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이 작품이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성장한 한니발 렉터의 복수와 그에 따른 ‘완성 과정’이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한니발 렉터다운 끔찍한 미소와 잔혹한 살해 수법 등을 그대로 연기해내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안소니 홉킨스가 너무 거대했기에 느껴지는 어설픔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어설픔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미숙했으며, 완숙한 노련미보다는 가끔은 당장의 흥분도 제어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역습도 당하는 젊은 시절. 어설퍼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복수 과정’이 너무 전형적인 탓에, 국내외의 평론가들은 “순수한 악의 카리스마가 복수에 묻힌다”거나 “너무 뻔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악’이라고 처음부터 노련한 것은 아니다.

악도 나름의 성장통을 겪어야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완벽한 노련미를 완성할 수 있다. 이 프리퀄 작품이 보여주는 것, 그리고 넌지시 던지는 질문이란 그런 것이다. 악은 처음부터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한니발 렉터>를 보면, 우라사와 나오키의 걸작 <몬스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몬스터>의 ‘요한’ 역시 수려한 외모와 매력을 앞세운 악의 화신. ‘요한’은 사실상 만들어진 캐릭터지만, 한니발 렉터의 성장과정을 그가 <몬스터>에서 시도했던 것과 동시에 생각해본다면 뭔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악은 ‘흔들어 깨워져’ 서서히 성장하는 것이다.

동생의 살육 장면, 그리고 거기에서 본인도 나름의 깊은 원죄를 짓게 됐다는 것은 콤플렉스이자, 잠재된 악을 발산하는 계기가 된다. 클라리스는 원죄와 좌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수사에 매달리지만, 한니발 렉터는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악의 화신으로 거듭난다.

그렇듯 <한니발 라이징>은 정의에 희망을 느끼는 자와 느끼지 않는 자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프리퀄 작품에서의 어딘가 어설퍼 보이면서도 ‘유망해보이는(?)’ 미소가, 훗날에는 아카데미를 뒤흔든 기괴한 미소로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선인 ‘배트맨’도 그랬지만, 악인 ‘한니발 렉터’도 그렇다. 완벽해보이는 캐릭터, 완벽하기에 지난 날이 더욱 흥미롭다.

흔들어 깨워진 악마는 쾌락을 먹고 자란다

그런데 <몬스터>의 ‘요한’도 알고보면 피해자다. 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밀실험으로 인해 악의 화신이 됐다. 태어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흔들어 깨워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받은 그 악마의 세례를 세상으로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악마들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도 있다. 완벽한 악마만이 느낄 수 있는 절제된 희열, 한니발 렉터는 그 희열에 눈을 떠가면서 주객이 전도된다. 훗날의 한니발 렉터는 복수만이 아닌, 쾌락을 위한 살인과 독심을 즐긴다. 자신에게 대항한 댓가를 치러주는 것이나, ‘대결’이라는 게임을 치루는 것, 그것 역시 쾌락을 위한 것이다.

ctzxp_347669_1[589525].jpg▲ 젊은 한니발 렉터 역의 가스파르 울리엘,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이 미소는 쾌락과 경험을 먹고 아카데미를 뒤흔드는 미소로 거듭난다.

 


ctzxp_347669_1[589526].jpg▲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안소니 홉킨스를 만나 완성된 한니발 렉터의 진짜 살인미소.

 


한니발 렉터와 그를 둘러싼 기괴한 에피소드들,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악이 촘촘하게 모여 극단적으로 구성된 에피소드들이다. 그 ‘극단적’이라는 껍질을 벗긴다면 누구나 느낄 법한 순결한 악과 쾌락의 성장 법칙이 숨어있다.

한니발 렉터는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도 빚을 졌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잠재된 악이 밀집돼 있고, 어떻게 깨워져 자라나는지도 치밀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범죄가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범죄가 살아지지 않는 것. 그리고 흉악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서로가 악을 흔들어 깨워나가는 끔찍한 현실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범죄는, 극도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 변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탈 행위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한니발 렉터라는 캐릭터에도 그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누구에게나 잠재된 콤플렉스와 악, 결국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금기이자 블랙박스일지도 모른다. 세기의 살인범 한니발 렉터도 그 금기를 열었을 때, 흔들어 깨워져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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