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해석해보는 레버넌트(스포있어요)

ALEXS 작성일 16.01.29 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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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영화가 상영하는지 관심도 못가지다가 디카프리오가 드디어 상을 받는다 어쩐다 말들 많아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연기야 아역시절부터 두말할 나위 없이 잘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타이틀을 하나 거머쥐게 될 것 같다고 하니 팬은 아니지만 사뭇 기대는 되네요.

 

 

각설하고, 스토리만 대충 읽고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동료에게 배신을 당하고,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글래스(레오)가 당사자인 피츠제럴드(톰하디)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인데요.

 

우선 처음으로 관객을 압도한 것은 도입부의 사냥꾼들과 원주민 사이의 전투씬.

현실감, 박진감, 경이로움까지 선사하는 초반의 롱테이크들이 어디선가 낯이 익다라고 생각했는데 다름아닌 <그래비티>의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작품이었네요. 스텝 이름까지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워낙 신기방기하게 봐서 기억에 남습니다.

 

초반이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서 뒤에 나오는 장면들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강렬하게 각인 시킨 이유는 어쩌면 그러한 갈등의 원인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더 의미있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도 듭니다.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원주민들의 습격으로 사냥꾼들의 수입원인 가죽을 빼앗기고, 다수의 동료들을 잃게 되는 일행들. 남아있는 가죽과 함께 남아있는 동료들이라도 본거지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글래스는 곰의 습격을 받아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원주민들에게 유리한 지리조건으로 배까지 버려야 했고, 험난한 육로에 큰 부상을 당한 글래스를 데려가기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일행들은 결국 가망없어 보이는 글래스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실리를 추구하는 피츠제럴드는 의도치 않게 글래스의 아들을 죽이게 되고, 아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글래스는 복수에 눈이 멀게 됩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는 확고한 이유가 생깁니다. 바로, 아들을 죽인 피츠제럴드에게 복수하는 것.

 

불구가 되기 직전의 몸을 이끌고 일행이 향한 곳을 뒤따라 가는 글래스. 오로지 복수라는 신념만으로 상처도 극복하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추격 중에 또 다른 적인 원주민들과 조우하여 시련을 겪고, 곪아가는 상처 때문에 죽을 고비도 찾아오지만,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피츠제럴드만을 좇는 글래스.

 

 

 

'복수'라는 키워드가 나오기 전에 선행되는 상황은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등일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 혹은 우리,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 쪽도 있을거구요.

 

영화의 큰 흐름은 아들의 복수지만, 그 뒤에 깔린 상황들은 뺏고 빼앗김, 지킴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서부 개척시대인 것이 가장 크고, 살 터전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 프랑스인들에게 딸을 빼앗긴 원주민 족장, 생계수단인 동물가죽을 지켜야하는(?) 사냥꾼들,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글래스를 먼저 공격해오는 어미 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주인공과 하나뿐인 남은 가족인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다짐, 그러나 끝내 지켜주지 못한 아들의 복수까지.

그 와중에 글래스의 위치는 몹시 애매합니다. 침략자인 사냥꾼의 입장이자, 침략자에게 죽임을 당한 원주민의 남편, 그리고 혼혈아의 아버지.

원주민들에게 좇기는 입장임과 동시에 아내와 아들을 죽인 서양인들을 증오하는 입장.

 

하지만 영화 중반부로 가면서 키워드가 하나 더 추가됩니다. '신념'. 벌판에서 만나 글래스를 구해준 인디언 역시 글래스와 비슷한 처지입니다. 가족을 잃고 홀로 떠도는 처지. 그러나 그는 글래스에게 '복수는 신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글래스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중간 중간 환각?꿈?속에서 무너진 교회 앞에 서 있는 죽은 아들을 만납니다. 아마도 글래스에게도 신념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장면인데,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는 아버지를 그저 슬프게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혹은 불교의 '자비'도 같은 맥락으로 신념은 종교를 초월하여 두루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은 아내 역시 환각 속에서 글래스에게 말합니다. 깊게 뿌리 내린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새차게 몰아치는 폭풍이 와도 이 또한 지나갈거라는 것일까요. '용서'하듯 흘려보내라는 것일까요. 아내 역시 원주민이기 때문에 그녀만의 신앙에 바탕을 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글래스는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복수심만이 그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피츠제럴드를 좇는 도중에 납치당한 원주민 족장의 딸을 구출하게 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원주민들에게 또 다시 공격을 받는 글래스. 원주민의 입장에서도 복수는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가까스로 본거지로 돌아온 글래스. 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처절한 설원 위의 혈투 속에 복수의 기회를 잡는 글래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말합니다. '내가 죽은 후에는?' 그리고 끝내 복수를 해내고야 마는 주인공.

그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원주민 일행이 글래스의 옆을 지나갑니다. 이제껏 그를 공격했던 그들은 그가 딸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글래스를 용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수의 순간을 목격한 그들은 글래스를 어쩌면 측은한 눈길로 지나쳐 갑니다. 복수의 성공을 축하하는 눈빛이 아니라.

 

이제껏 그를 따라다니던 아내의 환각도 이제 사라집니다. 아내의 표정 또한 복수해줘서 고마워라기 보다는 차가운 표정으로 외면하듯 등을 돌립니다.

 

이제 피투성이로 눈밭에 홀로 남겨진 글래스. 멀어지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다 관객을 바라봅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요. 복수를 했는데 이제는? 스크린은 어두워지고 주인공의 숨소리만이 남아 있다가, 얼마 못가 숨소리마저 끊어집니다. 복수를 함으로써 글래스가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면서 영화는 끝이 나네요.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깊게 내린 뿌리처럼 강한 신념으로 제아무리 새차게 부는 폭풍도 흘러보내라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좀 비약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침탈에 대한 변명과 동시에 중간자인 글래스의 역할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조금 더 나간다면 같은 침탈의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 정서에 비춰본다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잠깐 했습니다(이건 너무 나간듯).

 

 

 

장황하게 적어놨는데 아무튼 재밌게 봤습니다.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 그 뒤에 깔린 숨은 연출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감상평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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