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암과 앙투안은 이혼한 '전'부부다.
이들이 서로를 직접 마주하는 일은 거의 없다.
법원에서 이혼소송을 진행할 때, 미리암이 미성년자인 줄리앙을 앙투안에게 보낼 때.
그리고 앙투안이 미리암을 일방적으로 찾아올 때.
미리암은 앙투안의 집착에 고통을 호소하고 앙투안은 미리암의 회피에 괴로워한다.
두 사람의 엇갈린 주장을 듣고 판사는 묻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제 관객들은 추리게임을 하게 된다.
둘 중 누가 거짓말쟁이일까? 진실은 무엇일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줄리앙은 미리암과 앙투안의 집(정확히는 두 사람 부모의 집)을 오간다.
엄마도, 아빠도, 사회적 제도도 줄리앙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아직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나이인데, 줄리앙이 느끼는 건 엄마의 슬픔과 아빠의 분노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본인이 울타리의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한다.
엄마를 보호한다는 일념을 가지고선 앙투안의 친절에 흔들리지 않고 그가 고함을 질러도 꿋꿋하게 버텨낸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줄리앙이 지키려하는 엄마, 미리암일까?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사라진 줄리앙의 얼굴 클로즈업을 반복해서 보고 나면 이런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그 누가 잘못했던지간에 이 싸움 속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어린 아들일테니까.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앙투안의 행보는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한다.
정체가 모호했던 불안감이 끝에 가서 윤곽을 드러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마침내 앙투안은 불안감의 정체를 밖으로 꺼내고야 만다, 다행히도.
덕분에 미리암과 그녀의 아이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아파트의 문이 닫히니 이제 불행은 멀리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까지 다 올라간 뒤에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참 잔인하다'였다.
앙투안의 폭력도, 나약한 면이 없잖은 미리암의 회피도 줄리앙을 생각하면 잔인했지만 영화가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은 그보다 더 잔인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판단의 보류를 요구했다.
첫 장면부터 앙투안이 악인이라는 제법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 놓고도 말이다!
심지어 미리암이 자녀들을 세뇌시켰다는 변호사의 주장과 중간중간 나타나는 앙투안의 친절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미리암과 아이들을 향한 의심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덕분에 관객들은 두려움에 떠는 엄마와 어린 나이에 뼈저린 혐오감을 깨달은 아들을 보면서도 마음 편히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관객들을 제3자의 자리에 못박아 놓았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극적인 놀라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상황을 지켜보되 그들에게 제대로 된 공감을 해주지는 못하는 존재다.
폭력의 절정이 드러나서야 관객들은 미리암과 줄리앙의 편이 됐고 상황이 종료되서야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때 미리암은 이미 망가진 아파트 문을 닫았다.
마치 마음의 문을 닫듯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을 향한 때늦은 애도와 오랫동안 떨칠 수 없는 찝찝한 여운이었다.
마치 영화가 직접 나서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방해해놓고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공감해주지 못했다며 벌을 준 느낌이었다.
크레딧까지 다 올라가고 영화관을 나오며 다시 한번 엔딩을 곱씹어봤을 때 서러움은 배가 됐다.
영화의 제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임을 알기에.
그리고 이미 누군가의 경험을 들어본 적이 있기에.
닫힌 문 너머에서 이어질 그들의 삶은 한참 뒤에야 고통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줄리앙이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혹은 죽음이 지나간 뒤에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