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3
01.
"북한주민은 이미 金正日을 버렸다"
18일 만난 탈북자 김성일(48. 2008년 4월 탈북)씨는 『제발 남한에서 대북(對北)지원을 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對北지원은 주민들관 상관없이 김정일과 특권층의 배만 불려준다는 것이다. 오히려 김정일과 특권층의 기를 살려줘, 개혁(改革)·개방(開放)의 동력을 없애버리는 게 對北지원이라고 했다. 북한동포를 도우려면 지원을 끊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金씨는 북한문제의 해법은 「백성이 염증(厭症)을 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왁!」 하고 이빨을 보이면 남한이 「와」하고 수그러드니 버릇이 안 고쳐진다는 것이다.
그는 4월에 북한을 나왔다. 對北지원이 중단되니 장마당 쌀값이 5000원까지 뛰었다. 『좀만 있으면 주민들의 도강(渡江)행렬이 이어지고, 당에서도 정신을 차릴 수 있으련만 남한에서 50만t의 쌀이 들어왔다』 金씨의 표현을 빌자만, 『김정일은 또 다시 배를 내밀었다!』
그는 『정부건 민간이건 대북지원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북한사람을 도우려면 탈북자들 도우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이야말로 북한에 진짜로 어려운 백성을 도울 길을 알고 있다고 했다.
송복 前연세대 교수는 「햇볕정책」이 아니라 「엄동(嚴冬)정책」을 펴야 북한이 변한다고 말했다. 金씨도 무릎을 쳤다.
『북한은 2007년 사회안전부 포고를 통해 「셋이 모여 술도 먹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만큼 불만이 높아진 것이죠. 북한사람들, 무서워서 말 못할 뿐이지 모두 김정일을 버렸습니다. 충성심(忠誠心)같은 건 이제 없어요. 對北지원을 중단해 보십시오. 김정일의 공갈만 안 먹히게 해놓으면 탈북자들이 90년대 중반처럼 중국으로 몰려갈 겁니다. 그런 일이 또 다시 벌어지면 북한은 반드시 변합니다. 김정일이 변하든, 주변에서 변해서 김정일을 몰아내든 북한주민에게 살 길이 트일 겁니다. 김정일의 공갈로 남한의 對北지원이 지속되는 한 북한주민의 고통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金씨는 북한에서 전기 없이 살았다. 「강솔」이라는 솔가지에 불을 붙여 밥을 먹었다. 자동차용 배터리로 전구를 키기도 했지만, 간부들에게 문책 받고 빼앗겼다.
태국을 거쳐 탈북 한 그는 당시 모습을『천국 같았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와서 보니, 똑같은 민족이 한쪽은 지하(地下)100층, 한쪽은 지상(地上)100층이 됐다』고 말했다.
자식들만이라도 노예 같은 삶을 연장시키기 싫었다는 金씨는 남아 있는 자신의 친척, 친구, 동료들에 대한 걱정에 끝없이 말을 이어갔다.
02.
金씨는 끝내 통곡했다
김성일씨는 끝내 통곡했다. 회령에서 살았던 그는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을 「교화소(남한의 감옥 같은 곳)」 등으로 보내는 장면을 끝없이 보아왔다.
통상 탈북자는 3년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개천교화소」든 어디든, 한 번 가면 알 수 없는 곳이다. 오전 7시 무렵이면 10명에서 15명 정도가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교화소 행(行) 버스에 올라탄다.
이날 아침은 가족들과 마지막 상봉이 허락된다. 돈 벌러 조선족 식당에서 일하다 공안에 잡혀 온 어머니와 고향에서 기다리던 어린 자식들, 벌목공으로 일하다 잡혀 온 아들과 눈이 빠지게 자식을 기다려 온 노모(老母)... 버스 앞은 피눈물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되고 만다.
『무슨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당(黨)에서 먹여주고, 입혀준다는 사회주의 국가 아닙니까? 그런 나라에서 굶어죽기 싫어 도강(渡江)했던 사람들이에요. 젖먹이 아이 떼놓고 돈 벌러 갔다 잡혀 온 처자들. 이제 그 어린 새끼들과 생이별입니다. 그런 장면 안 본 사람은 북한을 말하지 말아요. 밭에 있던 소도 웁니다. 지나가던 개도 웁니다. 통곡소리가 아침마다 메아리치니, 동물들도 무슨 일인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웁니다.』
金씨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죽을 각오로 강을 넘었다』고 했다. 실제 그는 탈북 당시 「자살약」을 챙겼다. 살아서 다시 돌아가는 건 상상 못할 일이었다. 캡슐 속에 「까만진(농축된 아편)」을 넣고 북한을 떠났다.
사나울 정도로 퍽퍽한 기질의 金씨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가슴 속 상처가 눈에 보일 것 같았다. 2300만 동포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