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의 입'을 원하는가?

해담 작성일 08.08.30 22: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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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일도 있고, 좋은 글이라 가져와 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합법적 절차를 밟아 집권했다. 그의 폭정은 시종 합법성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집권 직후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이 터지자 그는 이 사건을 즉각 대중의 테러 공포로 연결해 권력 기반 강화의 기회로 삼았다. 의사당의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국민과 국가 보호를 위한 법령’을 관철시켰다. 언론·집회의 자유를 금지하고 테러리스트 혐의자를 마음대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해 반대파를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집권 후 일으킨 내부 쿠데타였다. 닷새 뒤 히틀러는 제국의회 선거를 다시 치렀다. 합법의 외피를 쓴 공포를 최대한 동원한 선거였지만, 나치당이 얻은 표는 45%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원한 것은 제한 없는 1인 지배였다. 그는 나치당과 동조자가 의석의 3분의 2에 이를 때까지 반대파 의원들을 체포했다. 이어 의회 견제 없이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는 수권법(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제2의 내부 쿠데타였다. 이로써 히틀러는 제3제국 총통국의 토대를 닦았다. 그때로부터 넉 달이 안 돼 공산당·사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집권을 도왔던 가톨릭 중앙당까지 모조리 해산당했다. 남은 것은 나치당뿐이었다. 합법의 탈을 쓴 초법적 야만의 들짐승이 우리를 부수고 뛰쳐나왔다.

 

 

히틀러 수권법의 정식 이름은 ‘국민과 국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법’이었다. 민주주의의 목을 졸라 교살하면서 고통을 덜어준다고 떠드는 이 뒤집힌 말의 사태는 ‘제3제국 언어’의 적실한 사례다. 히틀러도 제3제국도 사라졌지만 ‘나치의 언어’는 음습한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출몰한다. 국민을 능멸하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말하고 헌법을 모욕하면서 법치주의를 지킨다고 말한다. 지금 집권 세력이 이런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권력기관이 총동원돼 임명직 사장을 밀어내고, 거수기 이사회를 부려 제 식구를 사장으로 세워놓고는 ‘방송 정상화’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법치가 무너지면 자유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그친다. ‘법치’를 멋대로 해석해 유리한 것은 합법으로, 불리한 것은 탈법·불법으로 모는 것이야말로 법치 위반이다. 집권 세력이 말하는 법치주의는 국민의 편에서 보면 초법주의일 뿐이다. 인터넷상에서 표현의 자유는 재갈물렸고, 비판집회는 봉쇄당하기 일쑤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집회의 자유가 깊은 내상을 입었다.

 

제3제국의 언어를 구사하고 초법을 합법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다 히틀러의 후예거나 파시즘인 것은 아니다. 지금의 집권 세력에게는 열광적 대중운동의 지원도 없고 지도자의 카리스마도 없다. 상처받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약속도 없다. 타락한 부르주아에 대한 원한 따위는 애초에 흔적도 없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먼저는 비극으로, 다음은 추문으로 끝난다. 지금 집권 세력의 선례가 있다면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정권에서는 ‘개발’의 정신도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고소영·강부자 내각과 10년 굶은 터에 이제야 먹을 게 생겼다고 달려드는 탐욕뿐이다. 그 탐욕이 먹어치우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고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주검이다. 제3제국의 언어는 누추한 몸을 가려 성스러움을 입히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방송을 틀어쥐려는 이 정권의 집요한 노력이 제3제국식 언어를 유포하려는 것임은 물어볼 것도 없다. 방송을 ‘괴벨스의 입’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국민이 악취를 향기로 맡을 리 없다.

 

 

한겨레 프리즘 고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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