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달동네의 아련한 추억속으로 ..

dugue29 작성일 09.02.24 23: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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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둥그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한데 모여

연필을 끄적이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오빠가 주산 학원에 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저녁 시간이 되면 엄마는 으레 내 손에 뜨겁게 데운 보약 한봉지를 쥐어 줬는데

주산 학원에 다니는 3학년 오빠에게 보약 심부름을 하라는 뜻이었다.

약간 산동네에 위치하고 있던 학원까지...8살의 내 걸음으로 약 15분거리.

식기전에 갖다 줘야 하는 임무를 맡은 난....그 비탈진 고개를 종종 걸음으로 올라

학원문을 빼꼼히 열고 오빠를 찾았다.

물론 암산하라고 쥐어준 주판으로 친구들과 한창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오빠를 봤을땐

보약이고 뭐고 목을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런 환경에도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주산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얼마 뒤, 여의치 않은 사정이었지만 집에서는 주산학원을 다니는것에 대해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어린것이 문 닫힌 학원 앞에서 알짱거리는게 안되보여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산수에 돌대가리가 되어 가는 딸래미의 앞날이 걱정되어

급하게 회비를 챙겨주셨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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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어 있는 '산아제한 기구'는 1972년 12월 제조된것으로 확인 되며

정부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니 팔지 말라 명시 되어 있다.

정부의 방해 공작에도, 일제의 고무 풍선에도 굴하지 않고 태어난 1970년도 초의 아가들아!!

당신들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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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딱지와 고무풍선.

길게 찢어먹는 쫀드기와 라면땅 과자 뽀빠이.

유치원 시절. 할머니 동전 지갑에서 10원씩 꾸준히 빼돌려 100원이 되면

동네 슈퍼에 달려가 아폴로를 색깔별로 사고 그래도 돈이 남으면 새끼 손가락만한 설탕을 사서

왠종일 쪽자 만드느라 혼자 바빴다.

서울에 와서야 뽑기 또는 달고나 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알았는데

내가 살던 부산의 동네에서는 그것을 "쪽짜"라 불렀다.

뭔가 야릇하지 않은가............쪽~짜~베이베...

연탄불에 다닥다닥 모여 앉아 시커먼 국자 안에 설탕을 들이 붓고

나무 젓가락으로 한참을 돌리면 찐득하게 녹은 설탕물이 되는데,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얼마나 적정량의 소다로 멋지게 쪽짜를 부풀리냐 하는거였다.

적게 넣으면 잘 부풀지 않고, 많이 넣으면 맛이 써진다.

그렇다. 쪽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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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책방 전시물.

희뿌연 먼지를 닦아내어 가운데만 선명해진 창가.

그런 소소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재연한 전시장측의 연출에 혀를 내둘렀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만화책들은 두줄의 검은 고무줄에 고정되어 있고,

게중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니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의심의를마친책'

 

이라는 문구가 날 호흡곤란의 상태로 인도하였다.

만화는 현대의 기준으로 잘그렸다기 보다 익살스런 그림체로

내용 또한 어렵기 보다 가볍고 교훈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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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것만으로도 상당히 김 빠진 기분을 가지게 하는 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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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의 발로 그린 포스터와 군더더기 없는 문구들.

 

"인분을 준 채소를 먹으면 회충, 12지장충에 걸린다!"

 

사람 똥은 만물을 해롭게 하니 인간은 지구에서 괴멸하라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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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새어나오는 각각의 구수한 된장국 냄새.

푸싯푸싯 밥 짓는 소리와 깔깔거리며 흩어지는 동네 꼬마 아이들의

뽀얀 웃음소리로 가득한 좁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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컹컹 개 짓는 소리가 동네 어귀에서 부터 돌림노래 마냥 꼬리를 물고....

노란 빛을 토해내는 자그마한 창틀 사이로 복작거리는 그네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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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라지만 게중에서 좀 사는것 같은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른 집과는 달리 작지만 마당도 있고 두평 남짓한 대청마루로 있었다.

역시 돈 좀 만진 이 집안에는 그 시대 흔하지 않던 테레비가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하고 돌려야 바뀌는 채널과 아무리 잘 차려 입고 출연해도

검은색과 흰색으로 발광할 뿐인 흑백 테레비.

그리고 뭔가 혼수상태의 세계로 떠나신 재연 마네킹들의 무료한 자세.

원래는 옛날에 방송했던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으로 틀어 놓는데

폐장시간이 가까워서 인지 아쉽게도

꺼진 텔레비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 밖에 담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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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마련된 그림일기 코너.

시간적 여유만 있었더라면 피카소가 부럽지 않을 작품을 남겼을텐데,

폐장 5분전이라고 눈치 주는 관리인의 매정함에 황금색 크레파스만 죄다 훔쳐왔다.

유치원때의 도벽이 여직 고쳐지지 않았어.

그랜 난 또라이. 규범을 모르는 여자지.

꼬맹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의 8분이 1이 '물지게를 든 내 모습' 이였고,

일기의 주된 내용은 "박물관에 와서 옛날 사람들을 보니 참 좋고 신기했다." 라는

뭐가 좋았고 뭐가 신기한지, 행방불명된 주어로 이뤄진 내용이 대다수 였다.

정말 쓰기 싫은데 억지로 꾸며 적은 개학전의 일기장 같았다고나 할까.

자라나는 꿈나무들. 자꾸 획일화 되어 갈텐가!!

그 밥에 그나물 마냥....꿈나물에서 안주 할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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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이발관 - 주인 ▶박정양(1943~)>

 

설명 - 박정양씨는 1957년(당시 15세)부터 수도국산 달동네 송현동 83번지에 있던

대지 이발관에서 일하였다.

대지이발관은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으로

한국전쟁 직후부터 있었다. 흙벽에 기와집 이었으며,

약 5평 정도의 크기였다. 박정양씨는 대지이발관에서 이발기술을 처음 배웠는데,

처음 몇년간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물을 데우고 청소를 하는 등 고된 일을 했다.

현대 강화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달동네 단골손님들의 머리를 단장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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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94년도 말까지 연탄으로 겨울을 나고 물을 뎁혔다.

방도 딱 한칸. 요즘에서야 말하는 개인 프라이버시는 무슨!!

그냥 눈감고 내방이려니~하는수 밖에 없었다.

부엌 한켠에 마련되어진 연탄구멍엔 항상 벌겋게 달궈진 구공탄이 들어있었는데,

그때에는 연탄불이 꺼지면 인생 작살나는줄 알고 항시 번개탄과 구공탄을 재워뒀었다.

당시 내 기억으로 번개탄 하나에 50원인가 100원 정도 한것 같은데,

돌돌 말은 신문지에 불을 붙여 번개탄 아랫쪽을 슥슥 달구면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옮겨 붙었다.

연탄집게로 번개탄과 구공탄의 구멍을 잘 맞추고 나면

연탄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양철대야에 물을 담아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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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가장 빨리 닿는 달동네는 짙어지는 밤기운에도 백열등이 꺼질줄을 모른다.

크게 새로울 것 없는 소쇄한 일상을 떠들고,

어제와 별반 다를것 없는 화제로 긴 하루의 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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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아동학대가 벌어지는 생생한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힘겹게 물지게를 이고 있는 소년을 두고 노골적으로 금전부터 요하는 아주머니의 백태에

각박해진 우리 현실을 재 조명해 볼 필요를 느낍니다.

 

물파는 집 <공동수도>

 

설명 - 196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는 집마다 수도가 없어 공동 수도에 의존하곤 했다.

공동 수도는 수도를 관리하는 사람이 수돗물을 한통마다 일정 금액을 받고 팔던 것이다.

하지만 물이 항상 나오지 않고 끊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럴때에는 물초롱이 긴 꼬리를 만들었다. 달동네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 물 부족에 늘 시달렸다.

달동네 사람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공동수도에서 물을 사서 물지게를 지고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야 했다.

겨울이면 물지게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얼음 둔덕이 생겨 물 긷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나 어릴적에도 물을 뜨러 다녔다.

수도가 끊겨서 라기 보다 식수용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도 시설이 있어

새마을 금고에서 파는 100원짜리 표를 가지고 가면

10리터 정도의 약수통 한가득 물을 담아 올수 있었다.

9평 정도의 공간은 세면장처럼 꾸며져 있었고,

입구쪽에 자리 잡은 관리소 할아버지는 항상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절약 또 절약을 외쳐댔다.

 

"물 틀어 놓고 물통 씻지마라 안카나!!!!!!!!"

 

"하루에 다섯통 이상은 안됩니다이!!!"

 

"거 물 넘친다..넘친다!! 넘친다!!!!!!!!"

 

지금도 꿈에 나올까 두려운 할아버지의 새된 음성.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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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치우기 <이광환 일기 1945~1970>

 

1967년 8월 20일 - 그간 똥차가 왔다 갔는데도 퍼주지 않아 똥이 차서

오늘은 똥차를 보고 단단이 항의하고 청소조합(淸掃組合)까지 전화를 걸어 항의하여

결국은 시비 끝에 푸기는 하였지만 때문에 싸우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다. (똥차 반복의 압박!)

 

네. 그랬군요. 故이광환씨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여기서 잠깐 쉬어가겠습니다.

푸시캣 돌스가 부릅니다~!!!! "똥차~"

 

똥차 wish your girlfriend was hot like me?

똥차 wish your girlfriend was a freak like me?

똥치아~

똥치아~

 

부산에 살던 외할머니네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는데,

다년간 공동 변소에서 다리가 덜 저리는 자세를 익힌 내게는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정확한 조준과 마비된 후각.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시몬스 침대가 부럽지 않은 내게도

이겨낼수 없는 시련은 있었으니.......

아랫동네에서 꿈틀거리는 밥풀떼기들의 활기찬 움직임이였다.

그들은 내 괄약근의 힘을 앗아갔다.

그리고 변비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덩파리들의 순산으로 아주 기냥 구데기가 빠~글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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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 상회.

동네마다 하나씩은 끼고 있는 일명 구멍가게라 불리우는 잡화점이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없는게 없었던 가게는 낮에는 꼬맹이들이 문턱이 닿도록 들락거리고

저녁이 되면 난닝구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소주니 막걸리니 사들고 동네 어귀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

간장 한병 살돈도 간당했던 그 시절엔 외상 장부 시스템이 상당히 발달하여

현대의 신용카드 못지 않게 돈 없이도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는데,

그것도 누구네 엄마, 누구네 아들로 통하던 그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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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세로 자립 경제를 도모하던 1960년대의 담배 '풍년초', '환희', '아리랑', '금잔디'

요즘의 던힐이니 말보루, 레종이니 하는 외국명의 상호가 참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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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선반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잡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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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제 눈에 띤것은 다름아닌 비닐 우산이였다.

유치원 시절. 비가 오면 어디선가 우산장수가 짱가 처럼 나타나

 

"튼튼한 우산 오백원~~"

 

하며 말도 안되는 마케팅을 펼치곤 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대나무 살이 휘어지고, 빗방울이 좀 거세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우산은 샤워기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그래도 투둑하고 비닐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냥 듣기 좋아

쉽게 고장나 버리는 비닐 우산임을 알고서도, 비만 오면 우산장수부터 찾았다.

비닐우산은 이제 세월의 뒷켠으로 물러난 추억속 물건이 되버렸지만,

사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당연한 것들도 10년 20년 뒤에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묻어가는게 세월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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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가내 수공업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아롱거리는 백열등 아래로 온가족이 둘러 앉아 성냥갑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시대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이 느껴져 가슴이 벅차오를 찰나,

옆에서 요강이다~요강~ 하고 지저귀는 주영이 때문에 기분 잡쳤습니다.

밤이 늦도록 지루하게 반복되는 작업 속에 가족들은 어떤 진솔한 대화를 나눴을까요.

 

"어머니. 당췌 붙지를 않습니다. 풀칠 좀 제대로 하세요."

 

"......................너나 잘하렴."

 

"어머니. 계속 그럴수록 서로간 힘들어질 뿐입니다."

 

".....................나와라."

 

아......가슴이 막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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