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말이죠... 리차드 파인만 씨가 어떤 분인지 잘 알거든요??

해담 작성일 09.05.25 13: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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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인을 명복을 빕니다. 존경하는 분께서 가시니 많이 우울하더군요.

 

 

과학 갤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 전문분야가 물리학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빌린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있다고 보거든요.

 

 

 

리차드 필립스 파인만은 1918년 5월 11일 뉴욕 시에서 루실 필립스 파인만(Lucille Phillips Feynman)과 멜빌 아서 파인만(Melville Arthur Feynman) 사이에서 태어났다. 직업 세일즈맨인 멜빌 파인만은 아들에게 자연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물려주었다. 파로커웨이에서 성장한 리처드 파인만은 라디오를 수리하고 타자기를 고치며 온갖 종류의 퍼즐을 푸는 데 명수였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퍼즐은 내게 이르게 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발명해 낸 모든 빌어먹을 수수께끼들을 알고 있었다."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파인만은 다른 과목은 몹시 싫어해서 다른 물리학자들처럼 폭넓게 독서하거나 교양을 많이 쌓지도 않았다.(그의 IQ는 그렇게 높지 않은 125정도이다. 그런데 훗날의 교양 수준을 본다면, 그는 지능 지수를 측정하는 데 문화적인 요소를 충분히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산 증인이다.)
1935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 들어간 파인만은 수학에서 불가사의한 소질을 드러냈다. 그는 이론 물리학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학적 절차를 상당히 쌓았다. 그가 4학년 때 쓴 논문 「분자 내의 힘과 긴장」은 인상적인 전조였다. 1939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파인만은 당시의 유태인에게 불리한 제도적 편견을 극복하고 프린스턴에 들어갔다. 그는 핵물리학의 발전을 이끈 지도자인 존 휠러(John Wheeler)와 작업했는데, 휠러는 금세 파인만의 소질을 간파했다. 파인만은 1942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논문은 「양자 역학에서 최소 작용의 원리」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미국의 일류급 이론 물리학자로서 평가받게 된다.

파인만은 원자폭탄 작업에 충원되었고 프린스턴에 있을 때 맨하튼 계획에 참여했다. 1943년 뉴멕시코 로스엘러모스(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원자폭탄이 만들어졌다. 한스 베테(Hans Bethe)는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고 파인만을 "총명과 탁월함을 겸비했다"고 평했으며 그를 책임자 자리에 앉혔다. 파인만은 로스앨러모스에서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그는 임계질량을 통한 중성자 분열과 관련된 복잡한 계산에 독창적인 기법들을 다양하게 도입했다. 또 한 곳에 안전하게 비축할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의 양은 얼마인지를 정했고 개발중인 폭탄의 이론적 측면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최초로 그는 핵 장치를 시험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마어마한 폭발을 보며 그가 한 생각은 이러했다. 그저 "의기양양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종일관 그것을 작동시키느라 힘들게 일했고 정말 작동할지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늘 이론적 계산에는 믿지 못할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 온 터였다. 그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연이 계산한 대로 되고야 만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 자연은 우리가 계산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

1945년부터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베테와 함께 연구하면서 양자 전기 역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파인만이 양자 전기 역학을 수정한 것은 전후 물리학의 주요 사건이다. 기존 이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파인만이 설명한 대로, "계산하여 해를 구하려고 하면 너무나 풀기 어려운 복잡한 방정식으로 빠져든다. 제일 근사한 해를 얻을 수는 있지만, 수정하여 더 정확한 해를 구하려 하면 무한량들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전자가 전자기장 안에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양자 역학의 용어로 그것을 설명하려면 기본적으로 무한수의 양성자 -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가상의 입자(Vurtual particle)들로 알려진 - 의 방출과 흡수에 말려들게 된다.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같은 인물들이 숱한 시도를 거듭했지만 계산은 계속 불가능한 해를 산출했다. 그런데도 그 근거가 된 이론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파인만의 독특한 접근법은 일련의 다이어그램(뒷날 파인만 다이어그램으로 불림)을 써서 전자와 광양자, 전자가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광양자를 추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양자 전기 역학이 기술하는 기본 운동들이다.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추상적 계산을 구체화함으로써 숫자들을 '되틀맞춤(Renormalization)'하고 필요 없는 무한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경로 적분(path integral)' 방법의 결과로 양자 전기 역학은 완전히 새로 태어났으며, 오늘날에는 10^9까지 놀라운 정확도를 가지고 계산할 수 있다. 1965년 파인만은 노벨 물리학상(Noble Prize in Physics)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양자 전기 역학을 재정식화한 줄리언 슈윙거(Julian Seymour Schwinger)와 도모나가 신이치로(Sin-Itero Tomanaga)와 함께였다. 파인만의 방법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었으며 그의 다이어그램은 소립자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광범하게 이용되었다.

파인만은 195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CalTech)으로 옮겨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초저온 상태에서 중력을 무시하는 액체 헬륨의 이상한 성질을 설명하는 이론도 그의 업적이다.또한 '초유동(Superfluidity)'을 설명하면서 초전도(Superconductivity)와 관련된 현상을 거의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초전도는 1957년 존 바딘(John Bardeen)과 리언 쿠퍼(Leon N. Cooper), 존 슈리퍼(John R. Schrieffer)에 의해 밝혀졌다. 파인만은 베타붕괴(Beta decay), 즉 방사성 원소의 점차적인 해체로 증명된 '약력'의 움직임에 관한 이론도 발전시켰다.

파인만은 홀짝성 보존 법칙(law of parity conservation)이 약한 상호 작용(Weak interaction)에서는 지켜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 1950년대에 실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일생 처음이자 유일하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연 법칙을 발견했다"고 스스로 묘사할 만한 순간을 경험했다. 친구이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동료인 겔만(Murray Gell-Mann)은 파인만의 자만을 나무랐다. 하지만 겔만과 파인만은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일반 이론을 발전시켜 1958년 「페르미 상호 작용 이론」으로 처음 출간했다. 일반적으로 양자 전기 역학은, 또 파인만 자신은 원자 구성 입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겔만의 양자 색역학 이론(Quantum chromodynamics) 발전에 기여했다. 파인만은 때론 강의중에 봉고 드럼을 치기도 한 다채로운 교수였다. 그의 스타일은 생기 있고 유머가 넘쳤는데, 그러면서도 물리학의 폭넓은 주제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196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물리학 개론을 강의했는데 나중에 『파인만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로 출간되었다. 그 책은 애초에 대학 차원의 교재로 만들어졌지만 독창성 때문에 기초 물리학의 모범적 저술이 되었다. 독자를 위한 여섯 차례의 강의는 1965년 『물리 법칙의 특성(The Character of Physical Law)』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파인만 강의 스타일 특유의 느낌을 담은 그 책은 중력, 과학과 수학의 관계, 에너지 보존 법칙, 대칭 법칙, 엔트로피 개념 등에 관한 기초적인 입문서이다. 1980년대에도 파인만은 캘리포니아 빅서의 에살렌 연구소에서 청중을 상대로 가의했다. 1985년 『파인만씨, 농담하는 거죠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라는 자서전적 회고록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1986년에는 로저스 위원회에 참가하여 우주선 챌린저 호의 이륙시 폭발을 조사하는 정부측 심사원으로 임명된다. 챌린저 호의 일곱 승무원이 생명을 잃었다. 파인만이 폭발의 주요 원인이 고무 덮개가 찬 기온으로 굳어진 데 있음을 알아내자, 그는 대중 매체의 머리 기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는 청문회에서 극적이고
짧은 순간에, 그 재료에서 떼어 낸 한 조각을 얼음물에 떨어뜨림으로써 고무가 어떻게 일순간 탄성을 잃어버리는지를 보여 주었다. 파인만은 챌린저호의 재앙으로 미 항공 우주국(NASA)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가해진 관료적 억압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파인만은 로저스 위원회에서의 활동을 자세하게 그린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든 왜 걱정하는가? (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를 1988년에 출판했다.

파인만은 20세기의 많은 물리학자들처럼 무신론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무신론자였다. 그는 아버지 장례식 때 랍비가 송가를 외려 하자 뒤엎어 버렸고, 만년에는 종교에 관해 그가 한 말들이 캘리포니아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삭제되기도 했다.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이 불가사의한 우주, 어마어마한 범위의 시
간과 공간, 온갖 동물들, 서로 다른 행성들, 저마다 운동하는 갖가지 원자들 등등, 이 모든 복잡한 것이 그저 한갓 무대 위에 올려져서 신이 선악을 위해 다투는 인간을 지켜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무대는 그런 드라마를 하기에는 너무 크다."

파인만은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부인은 1945년 결핵으로 죽었다.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짧게 끝난 뒤, 1960년 궤네스 하워스(Gweneth However)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1978년 처음 흔치 않은 유형의 암 종창(stomach cancer)을 진단받고 수술로 제거했다. 1986년 임파구에서 또 다른 형태의 암인 감염된 거대 혈청이 나타났고, 이듬해에는 복부에서 종창이 발견되었다. 파인만은 원자탄 작업을 하는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긴 종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파인만의 마지막 강의는 1987년 12월 4일 있었다. 그 강의는 휜공간(curved spacetime)에 대한 것이었다. 두달 후인 1988년 2월 15일 파인만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한테서 들은 탄누투바에 가려 했다. 친구인 랄프 라이턴(Ralph Leighton)과는 1980년대에 몽고 근방 러시아의 그 나라를 찾아가는 방법에 관해 길고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죽기 두 주전 그곳을 여행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듬해 7월 친구 레이턴은 파인만을 위해 탄누투바를 방문했다. 키질에 있는 아시아 기념물 센터에는 리차드 파인만을 애타게 했던 기념물이 있다.

 

 

 

여러분 짝퉁 조심하세요~ 짱공 리처드파인만과 구별하셔야 합니다. ^^

 

이 글 보시고 우울한 마음 잠깐 접으시고, 여기서만 살짝 웃어주세요.

 

 

출처는 x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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