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밤 10시, 아이들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을 찾았다. 늦은 밤까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조문객들의 행렬, 그들은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는 듯 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길거리로 뛰쳐나가 왜 전 대통령 죽음에 애도조차 맘 놓고 못하게 하느냐고 성토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것으로 보였다.
상중이기 때문이다. 상중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 고인과 상주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려고 그런 불편함을 고스란히 감수하는 것이다. 싸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남은 장례절차에 누가 되지 않게 하여 가시는 분 고이 보내려고 감수하는 것이다. 아마도 현 정부의 오만불손한 행동들에 대하여 국민은 장례절차를 마칠 때까지는 인내할 것이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있는 국민들
그러나 현 정부는 자꾸만 국민의 심기를 건드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다. 추모하는 국민 보기를 불순분자를 보는 듯하고, 상주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들이 여러 명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도사를 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궁색한 변명을 하며, 유족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다.
그러면 형평성을 준답시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들에게도 추도사를 하라고 할까? 추도사는 그야말로 고인을 잘 알고, 고인이 사랑하며 존경한 이가 맡아야 당연한 것 아닌가. 혹시라도 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껏 서울광장을 열지 않고, 추모행사장을 경찰차와 전경들로 둘러싼 옹졸한 행동들은 모두 지난 촛불 정국에 화들짝 놀란 결과이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뭐가 그리 무섭고 두려운가? 역사가 평가를 할 터인데.
덕수궁 돌담길을 돌고 돌며 서 있는 시민으로 말미암아 보도는 지나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미어터지는 좁은 보도에서 시민의 소유인 서울광장을 바라보니 절로 화가 난다.
성서에 나오는 '불의한 포도원지기'가 생각났다. 불의한 종에게 포도원을 맡겼더니만 불의한 종이 그 포도원을 가지려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다는 내용이다. 불의한 종은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이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화가 난 주인은 군대를 보내어 불의한 종을 죽여버린다.
지금 현 정부가 하는 행동들이 마치 불의한 종의 행태를 보는 것 같아 괘씸하고, 화가 났다. 지금 국민이 인내하는 것, 그것은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면 다르겠지…' 하는 심정이라는 것을 왜 그들은 읽지 못하는가?
대화합의 기회, 발로 걷어차지 마라
▲ 시민들의 분노 아무리 그래도, 현직 대통령인데...
대화합의 길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현 정부는 그냥 걷어찬 것이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현 정부가 진심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슬퍼하면서 국민의 슬픔에 동참하고,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얼마나 큰 대화합이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현 정부는 이런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주둥이를 잘못 놀려도 한참 잘못 놀렸다.
덕수궁 주변에 시민이 써놓은 글과 현수막 등을 본다. 현직 대통령에게 감히 '개**'라고 쓴 인쇄물까지 도배되어 있고, 현직 대통령 탄핵서명까지 이뤄지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현 정부의 책임이 크다. 나는 그 순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말 중에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죠?"를 떠올렸다.
국민이 현직 대통령에게 이제 막 가자고, 한판 붙자고 한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야말로 '이 정도면 막 가자'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민에게 너무 막 갔기 때문이다. 촛불 정국에서 나는 수도 없이 "그래, 이제 막 가자는 거지?"를 떠올렸다.
그들 안에 들어 있는 분노, 응어리, 한(恨)이 얼마나 큰지 그런 불편함을 며칠째 감수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다. 작은 분노는 금방 표출된다. 그러나 역사를 뒤바꿀 만한 분노는 그렇게 쉽게 표출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민족성은 얼마나 감성적인가? 그럼에도, 이렇게 꾹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장이 시위도구가 될 수 있다느니, 소요사태가 우려된다느니, 나라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데 국민이 정신 못 차리고 있느냐느니 우롱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현 정부는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가' 분노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여리디여린 국민의 마음은 현 정부가 기본적인 예의라도 지켜주면 용서해줄 여력이 남아있다. 이게 우리 국민의 한계지만,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것이 민의라면 다를 손뼉을 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현 정부는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는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사랑하던 대통령을 보내는 국민의 마음에 더는 비수를 꽂지 마라.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출처 : 그러면 전두환씨에게 추도사를 맡기오리까 - 오마이뉴스